마태복음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태복음5장38절-48절)

남수연 2026. 2. 13. 00:57

 

https://youtu.be/qtN2Fe7tJBA

 

 

산상수훈의 말씀은 사람들 생각과 굉장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또 기절할 만한 말씀을 하시죠.

이게 가능할까, 이렇게 꼭 살아야 하나 의구심도 들죠.

며칠 전 블로그 설교문 아래 누가 악성 댓글은 아니지만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한마디 한 걸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속에서 발끈하더군요.

이런 고마운 피드백을 주다니, 그런 마음은 전혀 안 들었습니다.

오른 뺨을 때리는 데 왼뺨까지 내주는 건 확실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혹시 어쩌다 기를 쓰고 한 두 번은 모르겠지만 계속 이렇게 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걸 모르시겠어요?

아시면서 왜 이런 높은 수준의 희생과 삶을 요구하시는 걸까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천국이 임했다고 하셨죠.

우리는 이제 이전의 사망의 법이 아닌 천국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천국 백성들의 법을 잘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목표입니다.

 

오늘 말씀은 천국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냐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연장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특히 나를 괴롭히고 피해를 주는 사람들과의 경우죠.

구약성경에서도 이런 경우에 맞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과 비교해서 오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두 법을 비교하면 더 정확히 알 수가 있겠죠.

먼저 옛 계명을 알아보고, 그 다음 새 계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을지 순서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먼저 옛 계명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구절은 출애굽기 21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옛 율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똑같이 갚으라 하셨다는 것이죠.

이런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이 당한 것보다 더 많이 보복하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가 누구에게 맞아 코피 터져서 들어왔을 때 어떨까요?

애가 힘이 있다면 가서 쌍코피 터치고 오라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또 반대로 너무 가해자 인권을 보호하는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사건 판결 난 걸 보면 속이 부글거리죠.

가해자의 처벌이 가벼우면 피해자는 그 억울을 평생 못 풀 것입니다.

가해자도 그대로 당해봐야 자기 잘못을 조금이라도 깨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동해보복법은 사적인 보복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신 법입니다.

재판할 때 상대방에게 해를 입힌 것만큼 벌을 부과하라는 것이죠.

이런 강력한 법은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악을 원천 차단하는 분명한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상해가 아닌 구금이나 배상금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판결 원칙은 공평하다는 생각은 들죠.

구약시대 이 율법은 그때로서는 최선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다시 주시는 새 계명은 어떻습니까?

피해자에게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 정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악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면 공분을 일으킵니다.

지난 주에 안성시 38번국도에서 안타까운 사망사고가 있었습니다.

화물차가 대형 크레인을 견인하며 우회전을 하다 중앙분리대에 설치된 철제 방현망을 가격합니다.

철망이 뜯겨지며 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소렌토 승용차 앞 유리를 덮친 것입니다.

운전자가 놀라서 옆을 보니 아내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수석에 탔던 50대 아내가 사망한 것입니다.

대형 크레인을 견인하며 회전 반경에 신경 쓰지 않은 운전자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하더군요.

누군가의 잘못으로 애꿎은 사람이 귀중한 생명을 잃었으니 네티즌들은 강력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 사고를 낸 화물차 운전자가 새벽에 혼자 차를 몰고 가다 교량 표지석을 추돌해 사망합니다.

가해자가 사망함으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합니다.

참 기가 막힌 사건이죠.

처벌은 못하고 억울한 죽음만 남은 것입니다.

보는 사람들은 허탈함으로 끝나겠지만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어떻게 억울함을 풀겠습니까?

오늘 예수님 말씀은 피해자에게 그런 억울함을 주시는 건 아닐까요?

당시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로마 폭력과 권력자들 횡포가 생각나 끔찍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로 드신 상황은 그 당시는 약자들의 일상입니다.

차라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 주라고 하시는 게 더 속 시원했겠죠.

사실 구약의 그 율법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2. 그러면 왜 그 율법을 산상수훈에서 바꾸셨냐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좋으십니까, 오늘 주신 계명이 좋으십니까?

옛 계명이 좋다는 생각도 약간은 들 것입니다.

1) 오늘 말씀은 세상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엔 하나님나라의 약속만 받았지 완전한 하나님나라가 오지 않았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나라와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얼추 맞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그렇잖아요?

천국은 이 세상보다 조금 개선 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보면 되죠.

천국을 알려면 그것도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오늘 주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고 또 천국인 것이죠.

만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다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천국 자녀들에겐 그 주님의 DNA를 심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게 실제로 있는 성도라면 그건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이 말씀도 실천 가능하고, 오히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산다고 성도들이 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의 생명력은 더 강해지고 더 풍성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주님의 교훈은 하나님아버지의 성품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을 차별해서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대로 살 때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게 입증된다는 것이죠.그리고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자비하심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씀으로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옳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으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렇잖아도 못 믿을 이야기인데요.

소금과 빛에서도 너희 착한 행실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죠.

이전과 내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계신 게 증명이 안됩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고 증명하는 게 왜 중요합니까?

세상에는 하나님이 구원하실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오게 된 것도, 교회에서 믿음이 성장하게 된 것도, 먼저 믿은 성도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잖아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을 공평하게 대우하신다는 것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성도들이 특별 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디 성도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 자녀라는 특권의식이 너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오만하게 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상담가인 이호0교수가 심리상담을 하는 코너가 있습니다.

거기 세 아이를 가진 부부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아내가 청소와 집안 일을 거의 안 한다는 거예요.

집 사진을 보여주는 데 정말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때 집안일 안하고 뭐하냐고 이교수가 물었습니다.

평일에도 교회를 네 번 간다는 거예요.

교회학교 반사를 하고 세 번은 오후에 찬양팀을 한다고 합니다.

교회에 가면 너무 행복하다며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더군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게 뭐가 문제인지 전혀 인식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계속 고충을 털어 놓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매일 배달음식을 먹이고, 병약한 아이도 돌보지 않아 괴롭다는 데 아내는 남 얘기를 하듯 웃고 있었습니다.

신앙만 중요한 내 삶이고 가정과 가족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인 듯 했습니다.

그 얼굴엔 시종일관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런 오만이 보였습니다.

이교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더군요.

오늘 예수님 말씀은 세상에서 성도가 특권을 누려도 안되고, 특권의식을 가져서도 안되다는 걸 보여주십니다.

그건 하나님 나라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곳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것이 오늘 주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더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게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물질, 명예, 건강, 성공, 인정, 그런 것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꾸 현세적인 그런 복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은 주시며 왜 내게는 그걸 안 주시냐는 것이죠.

우리가 말씀대로 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어지간한 것은 잘되는 게 순리입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이타적이고 겸손하고 그렇게 산다면 거기에 좋은 열매가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세상의 생로병사와 많은 재난들을 아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도우심을 구하고 천국의 마음과 지혜로 대처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처럼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 혼란에 빠집니다.

낙심하고, 냉소적으로 믿음에 뒷걸음질 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인을 만나고, 고발당하고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잘 이해하는 믿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하나님 자녀의 여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심판 때 타인에게 행한 선행을 찾으시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5장에서 예수님이 멸망할 사람들에게 왜 나를 믿지 않았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을 심판하십니다.

구원받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으셔요.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 상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마치 선행을 구원의 조건처럼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던가요?

45절에서도 너희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이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심판 받을 사람들이라고 아무 선행도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선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6절에서 말씀하시죠.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사랑한 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니라 벌 받을 일입니다.

그런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한 통속이던 사람들이 자기의 유불리에 따라 서로 배신하잖아요?

그게 사랑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은 해와 비도 공평하게 주시지만 심판도 공정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악인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구하시는 산상수훈의 열매가 전혀 없다면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그러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의 교훈을 우리 수준에 맞춰 몇 가지만 이해를 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번에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꾸준히 마음에 두고 평생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여기 예로 든 사람들은 실제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못 만나 보진 않으셨잖아요?

지금도 우리 곁에서 괴롭히는 사람일 수도 있죠.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살다 보면 말도 안되게 악한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신체적인 폭행만이 아닙니다.

내 명예를 더럽히고 욕하고 터무니없이 모함하는 악인도 만납니다.

설마 했었는 데, 그런 사람도 만나게 되더군요.

우선 그럴 때 맞대응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악은 스스로 그치질 못합니다.

그렇기에 오른 뺨을 쳤다면 거의 왼뺨도 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으면 구약시대처럼 정당방위가 아닙니다.

지금은 똑같이 대응하면 쌍방과실이 됩니다.

맞대응한 내게도 남는 것은 똑같은 악인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나도 미워하는 경우가 그렇잖아요?

미움이 내게 들어오면 천국이 사라지잖아요?

그래서 이런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맞대응하지 말고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악을 그치게 하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악을 그치게 하신다는 걸 저는 극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성도들이 악한 자를 용납하는 것은 악을 조장하거나 수용하는 게 아닙니다.

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억울한 관계가 있다면 오늘 주님의 관대하심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길 축복드립니다.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 로마군인들이 속주국 국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행시킬 수 있는 법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의 장비나 짐을 같이 운반할 수 있게 만든 법이죠.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한 것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지로 우리를 괴롭히며 자기 인생에 끌어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인생을 무례하게 침범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미워하고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기본으로 남을 위한 봉사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시간과 재물과 재능 같은 것들이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면 그걸 나눠야할 때 누구든 불청객처럼 느껴집니다.

나의 일부가 형제와 이웃을 위한 것이라 인정하고 떼어 놓는 마음으로 사는 게 좋습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압니다.

원수는커녕 조금 내게 잘못한 사람도 용서하기 힘들잖아요?

그냥 왠지 싫은 사람도 있죠.

악연이 된 사람을 억지로 사랑해 보려고 하면 거부감이 목까지 차오르죠.

그래도 원수에게도 복을 빌어야 하는 게 복 있는 천국 자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며 자신을 그렇게 몰고 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었던 주동자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우리 기도로 회개하고 하나님 자녀가 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디를 가든 그곳을 위해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이 합당하면 평안이 임할 것이고, 합당치 않으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원수를 위해 복을 빌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복 받기에 합당치 않으면 그 복은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동생의 죽음 때문에 평생 원수 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생이 명문대에 합격하고 입학 전에 대학로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 싸움이 일어나 맞고 쓰러졌는 데 그 머리 위로 차가 밟고 지나간 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간 병원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동생을 보며 짐승처럼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동생을 때린 자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칼을 품고 다닙니다.

고통스런 시간 속에 예수님을 만나 선교사까지 되었지만 그 원한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깨달은 날, 원수 같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는 기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평생에 원수가 없다면 좋겠죠.

그러나 원수를 만나더라도 용서하고 축복하는 관계로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로 인해 내게 천국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환경, 상황, 질병, 가난, 이런 것들이 사람 못지 않게 우리를 힘들게 하죠.

저는 여기에도 오늘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과 너무 싸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들을 예수님께서 케어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너무 억울해 하거나, 너무 연민에 빠지거나, 너무 낙담하거나, 너무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게 우리를 위해 나을지도 모릅니다.

고난이 내게 왔으면 고난 중에 있는 나를 껴안아야 합니다.

내게 해와 비를 주신 주님께서 번개와 벼락도 주시는 데 골라서 받을 수는 없잖아요?

지질학에서 벼락은 공기 중에 질소를 땅에 충전해 지력이 올라가게 한다고 하죠.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벼락같은 고난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도 오늘 산상수훈 말씀을 생각하고 따른다면 그 고난을 통해 우리 심령을 더욱 복되게 하시고 천국을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살아간다고 욕을 먹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내 것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고 구원의 생명을 주고 사람을 유익하게 한 것은 주님의 산상수훈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단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다면, 이젠 산상수훈의 용서와 관대함을 흠모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내가 먼저 채워져야 하겠죠.

사실 세상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리로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용서와 관용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선인과 악인에게 필요한 것을 공평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온전하심을 잘 닮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