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우한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것을 구독하고 따라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제 나이 이후 성도님들은 아마도 누구를 팔로우하는 일이 드므시겠죠.
저도 지인 몇 명을 팔로우하고 있지만 게시물 확인도 잘 못합니다.
팔로우는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소통 방법이죠.
오늘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이 ‘팔로우 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팔로우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예수님을 팔로우하는 것은 유명인을 팔로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삶을 본받고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팔로우하고 계십니까?
그러려면 내 생각과 생활 방식,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삶에서 제자의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자가 되는 것을 구원과 사명의 두 가지 주제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셨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서 세례요한의 죽음이 기록됩니다.
이후 1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처음 전파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입니다.
새로운 직책을 맡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철학과 정책 같은 것을 발표하는 것을 취임일성이라고 하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실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키시고 천국 시민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을 따르던 삶이 잘못된 것을 알고 돌이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해 회개하고 천국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절대로 가벼이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따르고 싶은 것을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또 다른 하나의 선택지를 모두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따라가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두 길의 목적지가 다르잖아요?
두 길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우리 죄성이 남아서 세상 길에 있는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우리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는 절대로 똑같을 수 없습니다.
회식에서 누군가 술잔을 받지 않을 때 유난스럽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연예인이 사주를 보러 가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지만 사주는 괜찮다고 하더군요.
사주나 역학은 통계라나요.
내 미래가 통계대로 흘러간다고 믿는 것은 괜찮은가요?
하나님은 나를 위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으시잖아요?
하나님은 현재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미래에도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괜찮다 해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외적으로도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차별된 무언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내게 그런 것이 있는지를 늘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예수님이 포하신 말씀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와 부르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사명을 주십니다.
1) 예수님은 오늘 모든 사람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복음을 믿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한사람씩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우리가 여러 사람들에 묻어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오셔서 주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보통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스승을 찾아가죠.
성수동에 수제화 거리가 있습니다.
옛날엔 다 구두를 맞춰서 신었죠.
저도 중학생 때인가 검정 학생 구두를 한번 맞춰 신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분이 엄청나게 좋았습니다.
수제화 거리에 지드래곤 같은 유명 연예인들이 찾는 구두 명장이 있더군요.
그 좁은 구둣방에 영국에서 제화를 배우고 온 젊은 청년이 찾아와 제자가 되어 배우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기술과 노하우는 스승을 찾아가 배워야 전수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로 삼을 사람을 찾아가 부르십니다.
스스로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려는 사람이 없어서겠죠.
예수님은 세상에서 인기가 없으십니다.
신자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케이지만 예수님 제자가 된다는 것에는 망설입니다.
하나님 자녀지만 제자가 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와 부르신 우리들은 이미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 명령을 주시잖아요?
너희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의 나라는 제자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다른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죠.
2) 예수님은 제자가 된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내 믿음도 약한 데 무슨 사명?
그렇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이 사명을 조금씩이라도 감당하며 사는게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삼고 이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19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고 가족들과 걱정 없이 사는 게 생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 돈과 먹고 사는 문제에 있습니다.
제가 운동을 나가 걷다 보면 아파트 주변이라 노년기 부부들이 함께 걷는 걸 자주 봅니다.
지나쳐가면서 대화를 들어보면 거의 돈이야기입니다.
누구네는 어떻다 이야기하며 노후 대책 같은 걸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무얼 먹고 살라고요?
누가 직장 그만두고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면 솔직히 말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괜한 걱정이긴 합니다.
주의 일을 하다 순교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굶어 죽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1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게 과연 좋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삶은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네 명의 제자들이 평생 어부로 살다 죽은 것과 주님의 제자로 살다 죽은 게 어느 게 베스트입니까?
솔직히 나를 그렇게 부르신다면 어쩔지 모르겠지만, 열두 제자의 삶이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건 사실이잖아요?
천국에서 그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겠죠.
3)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의 생업을 갖고 주님을 따릅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주님의 일과 생업과의 연계성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교사로서 2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제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교사를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더군요.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 전에 이미 아시고 또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인생을 살던 우리의 일대기 전체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가마치통닭이라고 아시죠?
가맹점 수가 800개가 넘는 우리나라 치킨 산업 3,4위 기업입니다.
대표가 김재0장로입니다.
이분이 열다섯 살이던 어느 겨울밤, 방에 연탄까스가 들어와 부모님 두 분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다섯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가장이 되었습니다.
친척이 하던 남대문시장 지하 닭집에서 일자리를 얻고 닭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추위에 곱은 손으로 닭을 잡고 밤에는 수금을 다니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합니다.
그러다 억울하게 뺑소니 누명을 쓰고 들어간 구치소에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가마치통닭과 양계회사를 일군 것입니다.
김장로님은 100명 선교사 파송을 목표로 삼고 지금 80여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교회를 지었습니다.
가맹점 사장의 인터뷰를 보니 다른 회사보다 가맹점에 더 많은 수익을 배분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여러 치킨점을 했었지만 크리스찬 기업이라서인지 지금이 제일 수입이 좋다고 하더군요.
한 점주는 식당을 하다 완전 망하고 가마치통닭에 가맹점 문의를 했습니다.
자본금이 없으니 벌어가며 갚겠다고 사정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그 조건을 들어주고 가맹점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천사를 만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낚으라고 우리에게 각자의 인생 바다를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의 생업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로 그물을 던져 사람을 낚는 것이 최상의 직업 소명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만큼 보람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이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 말씀에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너무나 쉽게 자기의 생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20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게 가능할까요?
또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죠.
21절,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애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옛날 우리 청년 때는 이 구절 때문에 참 갈등도 많았습니다.
내가 이런 정도로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
그렇게 못하는 내가 과연 제자일까.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걸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해 아내가 있었고 장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보니 아버지 세베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마가복음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품꾼들과 배를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반을 떠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실 세베대 가문은 예루살렘에도 집이 있을 만큼 부자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가업을 물려 받고 평생 고생 모르고 살았을것입니다.
그런데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실제로 가정과 끊고 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베드로 집에도 머무시고,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죠.
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 한마디에 따른 것은 아니고 몇 가지 과정과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자가 되는 것에도 잘 적용이 될 것입니다.
1) 이들이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서는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나 따른 것처럼 보이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전체 윤곽이 보입니다.
이들 중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요한에게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말을 듣고 주님을 찾아갑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뒤 형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래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던 것이죠.
네 명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 사역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지만 그냥 물고기를 잡고 있죠.
그렇지만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던 지식은 제자로 결단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성경을 묵상하고 성경 말씀을 읽는 게 믿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예배에서 좀 졸면서 듣는 설교일지라도 그게 믿음을 키우는 자양분입니다.
2)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특별한 기적을 본 다음입니다.
그런 것이 전혀 없다면 사람들이 굳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오겠습니까?
사람이 현실적이잖아요?
당장의 안전과 풍요를 좇지 누가 보이지 않는 내세를 위해 내 인생을 투자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도 큰 기적은 아닐지라도, 뭔가 특별한 은혜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바로 직전에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합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한 이날 아침에 예수님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물가로 몰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뭍에서 좀 띄워달라 하시고 배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뭔가 불편한 기색을 보입니다.
하루 조업을 망쳐 심란한 베드로도 할 수 없이 주님 말씀을 듣고 있었겠죠.
말씀이 다 끝난 뒤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그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게 됩니다.
고기 무게에 배가 가라 앉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배의 친구들이 와서 물고기를 두 배로 옮겨 싣습니다.
도와 준 친구들은 아마도 요한과 야고보였을 것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데 분명 영향을 준 것입니다.
베드로가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놀라 예수님께 했던 말이 있죠.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
아마도 베드로가 메시야로 소개받았던 예수님을 만나고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수 청년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기다려온 메시야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죠.
유대인들이 그래서 예수님을 배타적으로 대한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마음, 그리고 저울질했던 마음이 베드로에게 큰 죄책감으로 다가왔던 것이죠.
사람들이 처음엔 다 그렇게 하나님을 이리저리 탐색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결심하고 따르기까지 단번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면 보통은 들락 달락하죠.
그러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도 차츰 이해가 되고 공감하게 되죠.
또 성도들의 간증도 들으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단지 큰 기적을 봤다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3)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부르심의 음성을 들려주셔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의 영에게 명령하시면 그 말씀대로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그대로 된 것처럼 성령님에 의한 예수님의 명령은 그대로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강한 믿음도 넣어주시는 것이죠.
거기에 강하게 반응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변화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음성으로 부르신 사람들은 주님을 순종하며 따르게 됩니다.
이런 부르심의 결정타가 없다면 사람들은 평생 믿을까 말까, 조금 다가왔다 멀어졌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정적인 콜링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장로교 교리 중에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무도 그 뜻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 필요 없다고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죠.
‘구원 받아라’ 하시면 받아야 합니다.
버티고 방황하고 주님 주변을 뱅뱅 돌며 배회해도 결국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복음을 이해하기까지, 또 예수님이 옳으심을 인정할 때까지, 갈등의 시간을 허용하십니다.
그게 없이 갑자기 우리 영혼을 낚아 가지 않으십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신다고 했죠.
물고기 낚는 게 어렵습니까, 사람 낚는 게 어렵습니까?
사람을 낚는 게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한번에 낚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영에 ‘너는 나를 따르라 오너라’ 그러시면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이 ‘네’하고 즐거움으로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나서도 종종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버거운 문제로 계속 기도하며 전전긍긍하게 될 때가 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주님이 믿음을 확 주시면 상황이 어찌 됐든 평안하고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사무엘 모친인 한나가 그랬잖아요?
자식이 없어 수모와 무시를 당하는 원통한 마음을 먹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쏟아 놓죠.
그 사연을 들은 엘리제사장이 말하죠.
사무엘상1장17절,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제사장이 그닥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은 한나의 마음이 한순간 바뀝니다.
한나가 가서 먹고 그 얼굴에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도, 또 믿음의 삶의 고난 중에도 그런 특별한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처럼 우리도 결국엔 모두가 다 주님을 따르게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라도 우리를 복된 주님의 나라로 데려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음으로 열어 놓으신 천국을 얻기 위해 다 주님을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기능공은 스승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고 그대로 물건을 만들어 내죠.
예수님 말씀을 잘 배워 예수님께 속한 것을 만들어 내길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제자인 내게서 예수님 닮은 것이 나와야지, 마귀와 세상적인 게 자꾸 나오지 않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나의 일터와 가정은 내게 주신 조업장입니다.
물고기를 낚을 때도 어종에 맞는 미끼와 낚는 방법이 다르더군요.
주님께 기도해서 지혜를 얻고 올해 귀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영혼의 어부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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