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소금과 빛 (마태복음5장13절-24절)

남수연 2026. 2. 4. 16:27

https://youtu.be/JtB5j2wGHCY

 

지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천국을 얻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는 천국 자녀들입니다.

천국 자녀들은 여덟 가지 이름을 가졌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

이것이 우리들의 이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본래 없던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죠.

산상수훈의 골자는 먼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걸 확신하지 못하면 믿음이 늘 불안정합니다.

용인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계신데, 유소년 때 유망한 야구선수였다고 합니다.

운동하는 데 돈이 많이 들잖아요?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엄마가 문제였습니다.

엄마가 도박 중독이었다고 합니다.

집까지 다 날리고 결국 아들도 야구를 못하게 됩니다.

도박이 무서운 게 이 목사님이 몇 년 전까지도 어머니의 도박빚을 갚았다고 합니다.

그런 형편이니 운동도 했겠다 한껏 비뚤어진 청소년 시기를 보낸 것이죠.

그러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의 전도로 교회를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은 교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교회에서도 골칫거리가 된 이 목사님을 무조건 사랑으로 품어 줍니다.

거의 일년 내내 밥을 사줬다고 합니다.

운동선수 출신이니 얼마나 밥을 많이 먹었겠어요.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어느날 선생님이 사영리로 복음을 전합니다.

사영리 설명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페이지가 나오잖아요?

그때 예수님을 믿겠다 그런 마음은 하나도 없었죠.

그런데 그 선생님의 진심을 아니까, 또 밥도 얼마나 얻어 먹었습니까?
그래서 선생님을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그러고 나니까 무언가 마음을 꽉 채워주는 것 같았다는 거예요.

어린데도 그동안은 무얼 해도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했다고 합니다.

불우한 가정사로 자존감도 낮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만족을 모르면 항상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쓰죠.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내 존재감을 찾으려 합니다.

그게 다 불완전한 지표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늘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그런 공허가 신기하게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김에 결국 신학교까지 가게 되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운동하고 방황하느라 무슨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유학가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내가 아직 믿음의 유목민이다, 하나님께 정착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드시면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조용히 기도할 때,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로 믿겠다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결과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직도 예수님을 믿기에 망설이는 분들이 없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내가 천국자녀임을 확신해야 그 다음 어떻게 살아야하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것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좋겠죠?

그러나 천국 자녀가 되면 사실 옛날처럼 살아지질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뀌었기에 결국 의지도 행동도 그걸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1. 이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니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이름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입니다.

이것은 나 혼자 구원받은 것으로 내 인생 목적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이죠.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 주님이 세상의 소금으로 우리를 아예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죠.

우리가 소금이기에 내 자신의 부패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 세월 속에서 내가 점점 더 썩어간다면 뭔가 이상한 것이죠.

사실 우리는 본성이 부패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늘 나를 경계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그 본성이 노출되죠.훌륭한 사역자인 줄 알았는 데 어느날 나락으로 가는 사람도 보게 되잖아요?

우리는 내 자신의 부패 방지에도 늘 신경 써야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를 세상 속에 소금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너무 막중한 책임이죠.

뉴스와 기사들을 보다 보면 세상의 악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마약조직 같은 거대 불법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보면 그 엄청난 힘에 눌리죠.

요즘 미국의 무자비한 공권력을 보면서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죠.

제가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미국남성과 결혼한 한국여성이 두 딸을 키우며 사는 일상을 올립니다.

지금은 텍사스에 사는 데 의료서비스가 취약해서 이사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곳이 미네소타였습니다.

요즘 이민국 단속반에 미국인이 총에 맞아서 큰 시위가 일어나 혼란스러운 곳이죠.

그때만 해도 이런 이슈가 생길지는 몰랐죠.

이번에 올린 영상에서 가족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 새집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묵고 있는 호텔에 이민국 단속반이 뜬 것입니다.

아내가 한국인이지만 미국 남편과의 합법적인 이민이잖아요?

그런데도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동안 아내의 긴장한 빛이 역력하더군요.

동양여성이니 얼마든지 트집을 잡고 차에 싣고 갈 수 있는 분위기잖아요?

거대 조직에 맞선다는 것, 세속을 거스르고 변화시킨다는 것, 거기서 소금이 된다는 것, 정말 불가능한 일이죠.

한 사람의 악인인들 우리가 변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악과 불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 부패를 막도록 성도들을 심어 놓으셨다는 것이죠.

마치 고등어에 소금 치듯, 배추를 소금에 절이듯,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불가능한 일을 된다고 하셨겠습니까?

실제로 유대인 제자들 작은 무리가 결국 로마제국의 합법적 승인을 얻어 내잖아요?

성도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된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이 됩니다.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확실한 예수님 제자가 되면 그 가정의 부패가 방지된다는 것이죠.

앞에 말씀드린 그 목사님 어머니가 지금은 권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멀으셨다고는 하더군요.

어린 아이 한 명이 교회에 착실히만 다녀도 그 가정이 반드시 변합니다.

신자들이 많은 사회라면 그 사회의 타락과 악이 확산되지 못하게 어느 정도 제어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도 이걸 뒷받침해 줍니다.

노예해방, 평등사상, 약자의 인권보호, 이런 업적은 교회의 공헌입니다.

지금도 기아와 난민, 분쟁지역 사람을 돕는 NGO단체 중 대다수가 기독교 단체입니다.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컴패션, 기아대책이 기독교 신앙으로 운영됩니다.

해외에서도 가장 활동을 많이 하는 NGO단체 중 상위 세 군데가 기독교단체입니다.

요즘은 신앙이 없는 분들의 자선과 봉사 참여율도 높죠.

그러나 초기 자원봉사는 거의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 된 신자들이 소금의 역할을 해 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를 주님이 이미 세상을 위한 소금이 되게 만드셨잖아요?

그 사명을 조금이라도 해 내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뭔가 빠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왠지 불편하고 떳떳하지 않은 것이죠.

세상을 향한 소금의 사명이 있음을 잊지 않고 기회를 따라 무엇이든 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빛이라면 먼저 내게서 어둠이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을 영적 맹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영적인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주님이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점점 영이신 하나님과 내세에 대해 명료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죠.

그게 우리 마음을 얼마나 밝게 하는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 성도들 마음 속엔 컴컴한 무덤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죽음의 순간 아버지 품으로 가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을 모를 때 내 미래를 모르고, 더구나 죽음 이후의 내세를 모릅니다.

사람의 생로병사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의 빛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요한복음 8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생명의 빛을 얻었으니 아직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빛을 어떻게 비추겠습니까?

16절에 그 원리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빛은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전처럼 악하게 살겠습니까?

그런 모습이 세상사람들에게 뭔가를 비춰준다는 것입니다.

저이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뭔가 다르구나

그것이 곧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살게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세상이 교회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 사는 신자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빛이 광선검처럼 강력하지 않고 흔들리는 호롱불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둠과 비교할 때 빛은 본질이 다릅니다.

어둠이 빛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내 착한 행실로 단 몇 사람에게라도 예수님을 비출 수 있다면 복있는 성도입니다.

뮤지컬가수였다 트로트를 부르고 있는 에0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코로나 때 뮤지컬 공연이 막히면서 트로트경연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0이라는 이름이 좀 특이해서 관심을 끌죠.

0 씨가 기독교대학인 한동대학교를 나와서 찬양 사역 단체인 마커스 멤버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평소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0 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예명을 에0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뮤지컬 쪽에서 발탁된 것이죠.

일반 음악인으로서는 에0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싫었는데, 포스터에 마커스 예명대로 에0 이라고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가수로 활동하면서 계속 에0 이라는 예명을 쓰게 된 것이죠.

그 이름이 가수활동을 하며 아무래도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이름이 연예계 활동 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고 믿음을 지켜주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이름이 소금과 빛이라는 걸 의식하고 산다면 그것이 또 우리 믿음을 지켜줄 것입니다.

 

2. 우리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성도들에게도 세상을 향한 제사장나라가 되도록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이죠.

구약시대엔 율법을 등한시했고, 예수님 당시엔 교묘하게 율법을 변형시켜 지키는 흉내만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율법은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안식일 준수가 신약시대 주일성수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의미나 주일을 지키는 의미나 뭐가 다릅니까?

주일도 지키지 않는 성도가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까?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면 두가지를 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율법의 본 뜻을 끄집어 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셔야 합니다.

해석만 해주시고 지키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먼저 주님은 잘못 인식된 율법을 바로 잡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종교인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던 것이죠.

모든 율법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율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는 큰 온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뒤에도 나오지만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배우자가 부정을 저지른 경우입니다.

그런데 남성 위주의 고대사회에서 그 율법을 악용하게 되죠.

남편이 원하면 마치 아내에게 인심 쓰듯 이혼증서를 줘서 내보냈던 것입니다.

뒤에서 다시 예수님이 아내를 그렇게 버리지 말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죠.

그럴 바엔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얼마나 당시 남자들이 자기 정욕과 욕심대로 아내를 버리는 일이 흔했는지 알 수 있죠.

그러니 우물가의 사마리아여인이 다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본래 이혼을 금지하셨던 이유도 사랑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를 통틀어 일부일처를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밖에 없다는 게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율법대로 지키게 하시는 것일까요?

산상수훈의 계명은 언뜻 보아도 구약 율법보다 엄청 쎕니다.

더 강력한 계명을 주신다고 사람들이 그걸 지킬 수가 있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그 해답은 구약성경 에스겔서에 있습니다.

에스겔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죠.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을 내 쫒았던 타락한 마음에 새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구약성도처럼 말씀에 저항하거나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순종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지, 안 하려는 마음은 없잖아요?

물론 우리 안에는 구약성도들과 같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와 새 마음으로 얼마든지 계명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20절하,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의 의는 종교적인 자기 열심에서 나온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주님의 의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행실이 종교인의 열심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문제적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나 스스로도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선한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이 바르게 해석하신 구약의 율법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죠.

오늘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것도 무엇으로 해석하면 됩니까?

이웃 사랑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적잖이 놀랐을 것입니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척박하게 살던 사람들의 일상은 대화가 욕이죠.

옛날 우리 때를 생각해 보면 동네 사람들이 걸핏하면 싸웠습니다.

그런데 남들에게 화내고 욕하고 무시하면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말씀은 좀 지나치고 싶죠.

어차피 구원받은 몸인데, 이 계명은 불가능하니 패스하자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형제에 대한 태도는 우리 믿음의 상태를 민감하게 반영합니다.

누군가에게 벌컥 화를 내거나, 속으로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요?

그 즉시 우리 안에서 천국의 심령이 사라집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지옥의 불꽃을 톡톡히 경험하기도 합니다.

말실수하고 마음이 지독히 불편해 본 적 있으시잖아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본 의도는 범죄를 막는데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으셔서 낳으신 사람들을 존엄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은 당연히 어떤 사람이라도 존엄하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인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요한사도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노하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모두 자기자랑, 교만에서 나옵니다.

다 나보다 못하다 생각되서 그런 감정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가정에서도 교우관계에서도 직장에서도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죠.

우리도 나름 노력은 합니다.

그게 됐다 안됐다 하기에 서로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죠.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 이해하려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미워해도 되겠니?’

누군가 밉고 무시하는 마음이 들 때 이걸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길 원하는 그대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죠.

또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이 충만할 때 형제를 더 이해하고 존중하는 건 당연합니다.

이 말씀대로 지키려면 성령의 충만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감화를 받게 되면 타인에 대한 존중과 화목이 훨씬 쉬워집니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도 역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주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함께 신의 악단을 보고 왔습니다.

북한을 덮고 있는 거대 악 속에서 몰래 예수님을 믿는 북한 성도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냥 총 한방에 쓰러지는 것이죠.

그런데 그 서슬 퍼런 공산정권 밑에서 지금도 계속해서 믿음의 성도들이 나온다는 게 기적 같습니다.

성도들이 죽더라도 소금과 빛의 이름으로 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박교순과 김태성이 그렇게 자신이 죽고 단원들을 탈북시킨 것이죠.

우리도 내게 주신 소금과 빛이란 이름대로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때론 소금처럼 우리를 녹여내야 합니다.

또 우리 속에 남은 교만과 우월감으로 형제에게 원망을 듣지 않도록 주님이 주신 새계명, 형제사랑을 잘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