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5장1절-12절 (팔복)

남수연 2026. 1. 31. 22:17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3, 공적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전도, 교육, 치료라고 할 수 있죠.

이것은 모든 기독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제자 된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죠.

주님은 지난 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오늘은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5장부터 7장까지 말씀을 산상수훈,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전수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십계명은 구약성도들에게 주셨던 하나님 백성의 법이었죠.

산상수훈은 신약성도들에게 주신 천국 시민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산상수훈은 십계명을 해설하고 십계명이 완전하게 성취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팔복으로 산상수훈을 시작하십니다.

팔복 본문은 시처럼 아름답죠.

팔복은 예수님이 가져오실 하나님나라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팔복의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두 나라가 얼마나 다른지를 팔복과 산상수훈 말씀이 보여주시는 것이죠.

어쩐지 산상수훈이 세상 상식과는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

이해가 안되잖아요?

우리가 뒤에서 이런 말씀들을 이해해 볼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미 살아가는 하나님나라를 충만하게 느끼고 더욱 소속감을 갖고 살게 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1. 산상수훈 말씀을 배울 때 몇 가지를 짚고 접근해야 합니다.

1) 본문의 여덟 가지 복은 우리 안에 이미 이뤄진 천국의 상태입니다.

이 복은 천국 자녀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발견하려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팔복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애통하다, 온유하다, 긍휼히 여긴다, 이런 단어를 세상에서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과 깊이는 전혀 다릅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간디는 팔복에 감명을 받고 비폭력평화주의를 시작했다고 하죠.

그렇다고 간디가 팔복을 소유한 것도 아니고 팔복을 이해한 것도 아닙니다.

여덟 가지 복된 마음과 천국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고 천국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또 흔히 하게 되는 오해는 팔복의 앞 부분을 조건절로 보는 것입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죠.

만일 그렇다면 심령을 가난하게 하려고 애써야 천국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 노력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앞의 절과 뒤의 절을 대등절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과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대등한 내용인 것이죠.

그러니까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뜻이 더 정확합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는 이미 그들이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가난하게 할 수가 없죠.

세상 사람들의 심령은 절대로 가난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궁핍할지는 모르지만 영적 가난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자기는 종교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게 심령의 가난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단어는 영이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비참한 영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걸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라면 그것이 복이고, 천국 자녀라는 증거인 것이죠.

 

3) 또 팔복 말씀과 산상수훈의 교훈이 너무 거룩한 삶을 요구해 부담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이 우리 것임을 알기에 마음에 찔리면서도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팔복의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했다 해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복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파민을 추구하고 성공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팔복 같은 복은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도 신명기 28장의 복을 설교해야 아멘이 나오죠.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아멘이 절로 나오죠.

그러나 물질의 복만 가지고 사람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팔복 중에 한 가지만 빠져도 고통입니다.

화평 하나가 빠지면 고래등 같은 호화주택도 그냥 싸움터입니다.

의를 모르고 불의로 가득 찬 인생이라면 살아서 수치고, 죽어서 고통입니다.

그래도 우리 안에 팔복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작동하기에 지금 삶이 그나마 평안한 것입니다.

어차피 물질의 복은 좇아가게 마련이고 그걸 다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팔복의 사람이 되려고 애쓸 때 생활 속에도 믿음이 스며드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어려운 환경이 올지라도 천국의 복을 여전히 누릴 수가 있는 것이죠.

 

4) 신자가 되었어도 산상수훈 내용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현실 신앙과의 차이가 너무 크잖아요?

팔복과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모든 구절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지 않으면 정말 우리와 동떨어진 교훈이 됩니다.

단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이 성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성도들 안에도 분명히 이 새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산상설교의 내용에서 먼저 예수님을 떠올리고, 그 뒤를 우리가 따른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복을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2. 오늘 여덟 가지 복 중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이 팔복의 마음 상태가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예로 드신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하다는 것은 부드럽고 온순한 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 온유함도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진리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될 뿐 아니라 주님도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사십니다.

팔복의 온유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악인들 틈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대하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을 이단 취급하는 거만한 바리새인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정권 잡을 걸 기대하고 자리다툼 하는 제자들을 아끼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죄를 모르시지만 죄인들을 이해하셨습니다.

성결하신 주님이 죄인들의 죄가 얼마나 추하고 거리끼셨겠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도 남의 죄는 참지 못하는데요.

그런데 주님이 그런 죄인들을 무시하셨다면 왜 그렇게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랐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잖아요?

진정한 온유는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성질부릴 사람이 없죠.

지난 주 한 청문회에서 공직 후보자가 인턴 직원에게 막말을 쏟아 붓는 것을 증거로 틀어 주더군요.

그 분의 공과 실을 떠나서 본인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생각했습니다.

후보자의 십여년 전 비망록에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건 모의원이 공개한 내용입니다.

오 하나님, 제가 온유함을 얻기 위해 많은 세월 기도했지만 제 힘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주님 고쳐주시옵소서

기도하는 데 왜 온유함을 얻지 못했을까요?

우리 안에 주님의 성품이 심겨졌지만 왜 이렇게 온유함이 없는 것일까요?

내 성질대로 계속 살아서 그렇습니다.

옛 성품이 가시덤불처럼 번성해 온유함을 막아 자라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 마음을 우리가 가꿔야지 주님이 가꿔주시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도 이전에 성품 그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여전히 사람과 얽혀 곤고할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위선이 아니라 천국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가야 할 모습이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스스로도 천국 자녀의 성숙을 이루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복음서는 예수님이 애통하며 우셨던 것을 전해줍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무덤에서 우셨죠.

주님은 다시 살리실 줄 아시면서 왜 우셨을까요?

그 눈물은 죽음과 심판이라는 두려움을 겪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애통함이신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우셨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거역하고 영원한 심판을 향해 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애통한 마음으로 우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지실 두려운 십자가 때문에 슬퍼하셔야 하잖아요?

주님의 애통은 죄와 사망과 영벌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깊은 곳에도 그런 애통이 있습니다.

내 자식들, 내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걸 보면서 깊은 곳에 슬픔이 있죠.

저 아이를 어떡해 하나

또 여전히 세상을 좇고 싶고 미련을 가진 나를 보며 애통한 마음이 듭니다.

혹시 끊지 못한 죄라도 있다면 거기 끌려 다니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은 탄식과 애통함이 있게 되죠.

그래서 신실한 성도들은 마음 깊은 곳에 늘 애통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고 애통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또 현실의 여러 가지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애통해 합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느끼는 슬픔과 아픔이죠.

그러나 우리 현재의 고난과 애통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성도들은 천국의 소망으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대부분의 고난은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미 고난이 왔다면 하나님이 그걸 넓은 의미에서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결재를 거치지 않고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차피 받을 고난인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든 일에 기도하는 것은 허락하신 고난을 이겨낼 힘과 위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고 잘 끝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고난으로 인한 슬픔과 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 애통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을 아시고 우셨잖아요?

우리의 슬픔과 아픔도 아십니다.

그렇기에 탄식하며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의 위로가 임하시는 것이죠.

현재의 위로와 내세의 완전한 위로를 믿고 때로 당하는 슬픔의 시간도 잘 이겨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위해서 박해받고 십자가를 지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말씀 그대로 따를 때 성도들은 세상에서 박해를 당합니다.

내가 사회생활 중에 믿음으로 인한 아무 불편이 없다면 직장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친구들 모임에서 자꾸 신앙 얘기하면 나중엔 나를 빼고 만납니다.

사회생활에서 믿는 티를 내면서도 미움 안 받으려면 굉장히 잘해야 합니다.

손해도 봐야 하죠.

지금도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는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런 위험은 없죠.

그러나 우리에게도 매일 내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그런 어려움이 있는 것이 복됩니다.

내 신앙으로 인해 박해받는 것이 없다면 너무 소극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경북 양산 매곡마을은 420년 동안 단 한번도 교회가 세워진 적이 없습니다.

서천0 목사는 고향인 그곳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종가집 종손에 외동아들로 태어난 서목사가 군대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영적 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종가집이니 제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 제사상에 절을 하지 못하겠는 거예요.

제사 뒤에 어른들이 다 절을 하는 데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것이죠.

종씨 마을 모든 친척들의 차가운 눈총과 비난이 서목사를 따라다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목사는 종손집안의 제사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부모님 몰래 창고에 있는 제사상과 병풍과 제기들을 하나씩 불태웁니다.

제삿날 난리가 난 것이죠.

이후 동네에서 완전 따돌림을 당합니다.

그런데 타지에서 사역 중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게 됩니다.

어머니를 모실 겸 고향에 내려와 요양원을 겸한 교회를 개척합니다.

사찰이 열 개나 있고 유교 제실이 세 개나 있고 입구에 당산나무가 있는 마을에 교회라니요.

종가 친척들의 방해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작은 요양원과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방충망도 고쳐주고 등도 바꿔 달아 줍니다.

그렇게 50가구 이상 어르신들을 돌봐 드렸습니다.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어르신들을 섬기는 모습에 드디어 친척 중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얼마 뒤 건축하고 남은 폐자재를 땔감으로 쓰려고 전기톱으로 자르던 중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팔에 낀 토시가 전기톱에 빨려 들어가면서 왼쪽 팔 절반이 절단이 된 것입니다.

코로나 때라 수술이 가능한 병원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겨우 수소문해서 찾아간 병원에서 접합수술을 했지만 신경이 끊어져 손가락기능을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네 번의 수술을 거쳐 겨우 손가락을 펼 수 있는 정도가 됩니다.

만일 복음을 위해 목사로 헌신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그런데도 서목사님은 손가락을 다 펴고 축도할 수 있다고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서목사가 주님을 위해 고향마을에 헌신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지금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열두 명 영혼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았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는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는 제자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나를 전도하려던 사람들에게 싸늘하게 대한 경험들이 다 있잖아요?

예수님은 주님 앞에 나온 제자들이 그런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이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놀라운 증언을 기록합니다.

스데반집사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순교할 때입니다.

스데반은 살기 등등한 유대인들 속에서 예수님이 메시야시고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외칩니다.

사도행전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예수님은 오늘 말씀대로 그렇게 천국으로 스데반집사를 맞이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고난과 불편을 견디고 있으시죠?

그것만큼 우리가 천국 자녀라는 증거는 없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3. 오늘 팔복의 말씀은 우선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제자들 말고도 무리들이 주님을 따라왔다고 하죠.

7장에서 산상수훈을 마친 뒤 무리들이 이렇게 반응했다고 합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자들만 이 말씀을 들은 게 아니라 무리들도 들었다는 것이죠.

제자와 무리들은 다릅니다.

무리들은 따르다가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본다면 그 안에 제자가 있고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도 전도 받아야 할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들에게도 들려주신 것은 제자가 되도록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런 곳이니 나를 따를 자는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리로 끝나서는 안되고 반드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 배웠듯이 제자는 결단하고 버릴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람들이죠.

신앙에는 우리가 하는 게 있고, 되어지는 게 있습니다.

어느 부분은 우리가 노력하고 힘써야 하고,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뭐가 맞는 거냐 의문이 생기지만, 우리는 두 가지를 다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스스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내가 아무리 충성하고 헌신해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분들은 성경도 믿음의 원리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구원의 진리를 다 이해하고 단번에 믿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제 구원에 대한 진리들을 충분히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결단하지 못했다면 이젠 믿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믿으면서 뭔가 뒤끝 남겨두지 말고 전적으로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결단하고도 구원의 과정이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결단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길 결단하면 팔복의 마음을 주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반드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고 복있는 자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름다운 팔복의 말씀은 아름다우신 예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마음에도 분명히 이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졌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세상나라입니까, 하나님나라입니까?

팔복에서 그 차이를 깨닫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여덟 가지 복된 마음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거기가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이 늘 천국일 것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통해 천국을 맛 볼 것입니다.

또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복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