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병든 자와 의사 (마태복음9장9절-13절)

남수연 2026. 3. 28. 19:14

https://youtu.be/D8F3LVoliZg

 

미국에서 자동차 보험을 들 때 주의를 주는 첫 번째 조항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고든 절대로 먼저 죄를 인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면 사고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백 프로 져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가르칠 필요도 없죠.

순순히 자기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세상 모든 종교를 통틀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자기를 죄인이라 자백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사람들에게서 유래한 세상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인이라는 이 말이 참 거북하고 생소하죠.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성도들 입에서는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면서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신자들은 양심과 도덕적인 죄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지기에 죄인식이 더 선명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본성적인 죄의 뿌리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래야 비로서 십자가가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아직 죄를 인식하는 부분이 완성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면 오늘 말씀을 특히 잘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복된 죄인임을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당시 세리에 대한 인식으로는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가 있죠.

1) 먼저 마태를 부르시는 과정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과 마태는 같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몇몇 제자들을 부르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계셨죠.

마태는 그날 평소처럼 세관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무서나 세무직원은 왠지 호의를 갖는 게 쉽진 않죠.

중국 고전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세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당국의 청부를 맡은 세리도 악명 높았습니다.

세리는 정해진 월급이 없었습니다.

로마당국에서 할당한 세금만 걷어서 보내면 세리가 얼마를 걷든 묵인했습니다.

더 걷은 게 세리의 월급입니다.

상한선이 없으니 자연히 과도한 세금을 걷었던 것이죠.

국민들은 많은 세금에 쪼들리는 데, 반면 세리들은 점점 부자가 되는 게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이죠.

로마군의 경호를 받던 세리에게 사람들은 반박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신 세리를 매국노, 죄인으로 낙인찍음으로 복수했던 것이죠.

세리는 회당 집회와 성전 출입을 할 수 없고 유대공동체에서 쫒겨 난 사람입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나병환자와 같은 처지인 것이죠.

그런 세리 마태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2) 왜 예수님은 하필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일까요?

물론 죄인의 오명을 쓰고 평생 괴로움 속에 살다 영원히 심판당할 마태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신 것이죠.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같은 목적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효과가 있는 것이죠.

죄인 세리마태를 부르신 것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 자신에게도 도덕적인 죄의식은 근본적인 죄를 깨닫는 데 분명히 유리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엔 과거 세례요한의 제자도 있었고, 경건주의자도 있었고 독립을 위한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은 자신의 의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로 뽑힐만 하다 생각했고 그닥 죄인이라는 생각은 없었을 것입니다.

본성적인 죄인식은 양심을 괴롭히는 도덕적인 죄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죄들이 본질적인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도덕적인 죄를 괴롭게 대면하며 점점 본성의 문제를 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여기에는 성령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죄의식을 갖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태만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뻐한 제자는 없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결국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죠.

바울사도 같이 완벽한 의인인 줄 알았던 사람도 죄인 중의 괴수라는 걸 깨닫게 되잖아요?

신자들이 주님 앞에 처음 나올 때는 내 상황이 문제지 나 자신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나중에는 모두가 내가 문제다, 내가 죄인이란 걸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도 교회도 다툼이나 분란이 점점 적어집니다.

복음서에서 그렇게 자리다툼 하며 싸우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선 완전히 바뀌잖아요?

세리마태는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움직이는 구원교리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또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은 마태를 위한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당연히 놀라운 반전의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한 누가 복음을 보면 마태의 이름을 알패오의 아들 레위하고 기록합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의 조상이죠.

마태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은 걸 보면 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가 구약성경을 백 군데 넘게 인용합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히 성경을 배우고 신앙교육을 받았다는 것이죠.

세리는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와 유대인이 쓰던 아람어에 능통해야 합니다.

물론 세무사일은 정확한 계산과 빠른 두뇌회전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마태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그런 마태라도 속주국인 유대사회에서 성공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아마 배경도 가난한 집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마태가 부자가 될 유일한 방법은 그것 밖에 없던 것이죠.

그러나 세리의 직업은 돈만 준 게 아니라 죄책감과 수치심도 준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도 마찬가지죠.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의 삶을 살며 레위라는 이름이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름을 감추고 마태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한 기록이 복음서 전체 중에 한 군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출신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당당하게 나서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묵묵히 제자들 뒤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죠.

주님이 그런 마태에게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수제자 베드로도 베드로복음을 쓰진 않았잖아요?

베드로는 항상 앞에 나서다 보니 말씀을 듣는 것은 뒷전이었을 것입니다.

뒤에서 조용히 주님을 따르던 마태는 말씀에 주목했고 가장 긴 복음서를 쓸 수 있었던 것이죠.

마태는 세리의 직업 특성대로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더 초즌이라는 미국 드라마에서도 그걸 포착합니다.

마태가 세관을 나올 때 필기도구를 챙겨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은 아픈 과거가 있는 마태를 억지로 사람 앞에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에게 맞는 사역을 주시고 그것으로 인정받게 하신 것이죠.

주님은 우리 각자의 지나온 날을 아십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 뿐인 과거라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가치있게 사용해 주실 계획이 있으십니다.

마태가 하나님 아들의 생애와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 큰 역설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법정에 증인으로 세울 수 없었습니다.

세리의 증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것이죠.

그런 마태를 온 세상 앞에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의 존재 가치를 되찾아 넘치게 인정해 주신 놀라운 사랑이시죠.

우리도 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마태와 같이 우리가 가진 것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마태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르고 큰 잔치를 벌입니다.

1) 마태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가르치시는 주님을 오가며 보았겠죠.

골목에 몸을 숨기고 예수님 말씀도 들어보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것은 주님을 메시야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과거 하나님을 경외했던 때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을지도 모릅니다.

메시야의 등장이 누구보다 두려웠을 사람은 세리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죄인들의 심판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리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세리들이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날 자기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가 즉시 세관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죄인으로 살아가는 갈등과 고민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이 되죠.

마태는 세리의 직업을 버렸습니다.

다시 돌아갈 마음을 완전히 버린 것입니다.

어부가 생업이던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죠.

어부는 언제든 다시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혼란한 시기에 제자들은 잠깐 고기 잡으러 돌아갔었잖아요?

마태의 직업은 아무 때나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도 이전과 비슷하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과거처럼 살기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축복드립니다.

 

2) 마태의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잔치는 기쁜 일이 있을 때 합니다.

주변에 보면 잔치할 일이 거의 없는 집이 있죠.

늘 침울하고 근심이 잔뜩 끼어있는 집들이 참 많습니다.

마태의 집에 그동안 무슨 잔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집에서 잔치까지 벌여 비난을 자초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인생이 잔치하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의 잔치집 같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세리의 목적은 돈입니다.

돈이 인생의 목적이라 로마의 개 취급을 받는 것도 개의치 않던 사람들이 세리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난 뒤 큰 잔치를 베풀고 재산을 다 풀지 않습니까?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이죠.

마태도 직업만 버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모은 재산은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한 전대에 넣었을 것입니다.

세리가 돈을 포기한 것은 정말 인생의 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 목적이 달라지셨습니까?

성도들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도 물질이든, 취미든, 어떤 세상적인 안전망이든 포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안전망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안전망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걸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삶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 빠져나갑니다.

건강도, 재산도, 사람 관계도, 일도, 우리 인생에서 앞으로 뭐가 빠질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빠져 가는 것을 어쩔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더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믿음은 얼마든지 더할 수가 있잖아요?

믿음이 받쳐주면 빠져나가고 남은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너무 뺄셈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무렴 우리의 결핍을 채우지 못할 만큼 하나님이 작으시겠습니까?

그러려면 믿음을 착실히 세워가는 덧셈을 잘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뺄셈을 느낄 때 믿음의 덧셈으로 빈 곳을 채우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런데 이 날 마태의 잔치에는 예수님과 제자들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가 자기 같은 세리들을 잔치에 불렀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은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집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그래서 결국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점차 구원 받게 되는 것이죠.

배우김원0 씨가 지금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처음엔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끼던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뇌를 다치게 됩니다.

뇌전증과 후유증으로 34년째 투병 중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부모님이 아들을 돌봤지만 성인이 되는 아들을 감당하는 게 쉽지 않죠.

그래서 지금까지 4명의 자매들이 함께 남동생을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김원0 씨는 동생 목욕을 맡았는데, 성인이 된 남동생의 대소변을 닦아내고 목욕시키는 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동생을 돌보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한순간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믿음을 따라 살다보면 어느 날 내가 예수님을 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진다깨닫는 것입니다.

0 씨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은 아이티 심장병 어린이 돕기와 보육원 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최근엔 미혼모와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미혼모 자립을 돕는 단체를 만들어 헌신하고 있습니다.

김원0 집사가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주셨냐, 나는 내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다. 내 목숨도 드릴 수 있다.

제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집사님의 믿음이 저 정도인 데, 그에 비해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가 배우김원0 씨 같은 인맥과 재력과 영향력은 물론 없죠.

그러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다면 우리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걸 예수님께서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죠.

사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순종할 수 있는 건 너무 많잖아요?

복음 전하고, 기도하고, 천국시민의 마음을 갖도록 잘 다스리고, 친절을 베풀고, 주님을 더 알아가길 힘쓰고.

그런 것에 돈도 필요 없고, 건강도 필요 없고, 능력도 필요 없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이 늘 살아있어서, 그런 노력을 통해 누군가에게 흘러갈 수 있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3. 이때 마태의 구원과 대비되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입니다.

바리새인의 등장으로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들은 예수님께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11,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데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함께 다니는 게 창피했겠죠.

사람들이 수군거리잖아요?

마귀는 불만스럽고 의혹이 생길 때를 놓치지 않고 덫을 놓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직접 대답하십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의혹이 들 때 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잘 보면 바리새인의 질문과 좀 동떨어진 대답을 하시는 것 같죠.

왜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식사를 하냐고 묻는 데,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대답이 엉뚱한 것 같지만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세리와 상종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부정한 물건이나 시체에 닿으면 부정해지기에 가까이하지 말라는 규정을 사람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불쾌한 존재니 부정한 자로 낙인찍어 버린 것이죠.

세리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부정한 죄인이라고 막 나가는 것입니다.

이 악한 생각에 주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의사는 병자의 병이 옮을까 봐 무서워 피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오히려 병자를 만져서 치료하잖아요?

예수님은 죄인의 병든 영혼을 만져 고쳐주시는 의사이십니다.

의사는 병든 자를 찾아 가지 건강한 자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고 의롭다 생각하면 죄를 고쳐 줄 의사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에게 두려운 말씀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을 고쳐주시려고 하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게 13절에 하신 말씀입니다.

13절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씀은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율법 인식과 이웃 사랑의 문제입니다.

호세아서의 이 부분은 앞에 이렇게 시작됩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때도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낫게 하시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때도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의사이신 하나님께 오지 않았다고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7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죄로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을 치료하길 원하셨다고 하죠.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죠.

성전 제사만 붙들고 의인이라고 자만했습니다.

성전 제사를 많이 드리면 의인입니까?

속죄제물을 드리는 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처구니 없이 제사 많이 드리는 걸 의라고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을에 핏자국이 가득했다고 하십니다.

제사장의 무리도 살인했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 제사장 무리들이 지금 세리와 죄인들을 인격 살인하는 거잖아요?

호세아선지자 때나 예수님이 오신 지금이나 사람들이 똑같다는 게 소름끼치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들은 어떨까요?

예배를 드리고 헌신하는 게 우리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짓는 수많은 죄를 하나님께 심판받고 그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배도 봉사도 헌신도 섬김도 감사에서 나오는 보답 아니겠습니까?

종교행위가 공로가 되고 의가 되는 것은 인간이 만든 세상종교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신앙의 헌신조차도 속을 잘 걸러보면 죄가 섞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헌신이라는 것 속에 자기 의가 있지는 않은지,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던 바리새인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헌신하며 다른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마태와 바리새인을 비교해서 이렇게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13절하,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신구약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다 죄인이라는 것이죠.

죄인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뭐하러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 인식에 부족함을 느끼신다면 이렇게 해야합니다.

말씀과 양심에 나 자신을 매일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꾸 비춰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죄인식은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도 죄와 악을 떠나려는 노력, 죄를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죄의 깊은 뿌리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걸 위해 십자가에서 내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이 모든 성도님들께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