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과 같은 성경은 신앙생활에 실용적인 말씀은 아닙니다.
예를들어, 기도에 대해 배우고 실제로 기도하면 어려운 문제들을 잘 풀어갈 수 있습니다.
용서와 화목에 대한 말씀을 실천하면 실제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죠.
염려하지 마라, 근심하지 마라, 이런 말씀도 심란했던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오늘 말씀은 행동하고 실천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실용적인 말씀들만 매일 들으면 믿음이 좋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이치와 근본을 배우지 않으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아무리 실용성 있는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약하면 실천해서 유익을 얻기가 힘들죠.
그래서 믿음의 지식, 구원의 이치에 대해서도 항상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이런 믿음의 근간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믿음의 터를 더 굳게 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1. 마태복음에서 본문과 바로 앞16장에 있는 내용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요점 정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에 잘 정리된 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6장을 참고로 해서 오늘 17장을 보려고 합니다.
수요기도회에서 16장을 잘 배우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잠시 사역을 멈추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으로 가셨죠.
오늘 본문도 계속 이어진 이야기로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유명한 답을 하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온 말이라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대답에 대해 만족해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정답을 잘 말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이 대답이 베드로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조사하고 배운다 해서 누구신지를 깨닫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잘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 것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자 베드로가 격분하고 항변하잖아요?
베드로가 왜 그렇게 감정이 격해졌는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도 당연히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봉기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말은 모두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이 그 전철을 밟으시겠다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철저한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만류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하시죠.
너희들도 내게 오려면 이전의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맞이할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예고하십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너희들 중에 그 영광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엿새가 지났습니다.
오늘 변화산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16장에서 말씀으로 오간 사실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현실화 된 것이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되잖아요?
또 구원의 방법은 죽으심을 통해서라는 것을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를 통해 확고히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림 때 영광을 보게 될 제자들이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 영광을 제자들이 오늘 미리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천국의 영광, 이런 것은 길게 보지 않아도 세상과 다르다는 감이 잡힙니다.
한 입 먹어보면 음식 맛을 아는 것이지 한 그릇 다 먹어야 아는 건 아닌 것같은 것이죠.
우리가 말씀을 볼 때, 기도할 때 찾아오는 그 짧은 순간의 천국 맛이 꾸준히 믿음과 경건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시고 오늘 풍성한 진리의 보고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세 가지를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 모세와 엘리야, 베드로의 엉뚱한 제안입니다.
1) 변형되신 예수님의 용모입니다.
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태는 아주 간단하게 예수님의 변모에 대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도 참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잠들었던 제자들이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예수님은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계셨습니다.
‘연예인을 봤더니 아우라가 있어’ ‘자체발광하는 얼굴이야’
그런 정도가 당연히 아닙니다.
해처럼 빛나는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은 저절로 경외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특징을 표현한 말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죠.
그런데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났다는 말씀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굳이 그걸 기록한 이유가 있을까요?
구약성경에서 얼굴에 빛이 났던 사람이 있었죠.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과 독대하고 내려올 때 얼굴에 빛이 났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빛나는 얼굴에 마음을 뺏기는 걸 보고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죠.
모세 얼굴의 반영된 빛은 수건으로 가려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희어졌다는 것의 차이점을 아시겠죠?
주님 자체가 빛나고 계셨기에 낡은 주님의 옷까지도 그 빛이 뚫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복음서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얼굴이 빛나는 것만으로는 모세하고 구별이 안되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했잖아요?
예수님의 빛은 하나님 본체가 가지신 영광의 빛이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환상 중에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죠.
1장16절,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그동안 주님은 인간의 육신 속에 본래의 영광은 완벽히 가리고 계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 인격 안에 완전한 하나님이 계신 것이죠.
우리 안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과 영광을 포기하고 죄인의 속죄자가 되셨습니다.
그 결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권능이 아니면 콘크리트 바닥 같던 우리 마음이 어떻게 복음을 듣고 결실한 좋은 밭이 되었겠습니까?
또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능력을 주십니다.
해가 어둠을 힘있게 비추는 것 같은 능력이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죠.
성경은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하시잖아요?
우리가 육신과 제한된 환경에서 살지만 그 속에 갇혀서 꼼짝 못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덮고 있는 암울하고 두터운 삶의 장막을 능히 뚫고 나가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을 본래의 모습으로 변모시키심으로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우리가 많은 설교를 통해서 들었듯이, 대속할 인간은 세상에 없기에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 진리가 견고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임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2)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예수님과 대화한 부분입니다.
이 광경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모세와 엘리야라니요!
현재 제자들 믿음으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더 굉장한 사람입니다.
(1)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 하나님이 긴 역사 속에서 진행해 오신 구원의 날이 임박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십자가의 대속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십자가를 향해 초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셔야 합니다.
이제까지 많은 로마의 반역자들이 못 박힌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셔야 합니다.
이땅에서는 모든 사람이 단지 육신의 죽음만 겪을 뿐입니다.
그 누구도 아직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지 상상이 안 가죠.
지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지지하기 위해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도 큰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위로도 필요하잖아요?
우리는 정서적으로 우리끼리의 사랑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중에도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독한 예수님의 마음을 돕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를 내려 보내신 것이죠.
예수님에게 무슨 지지와 위로가 필요하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짝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을 당연히 원하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의 방문은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 충격을 받을 제자들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사람이 견뎌내기에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할 가장 큰 힘은 천국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도, 제자들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영광과 천국의 확신이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죽음 앞에서 재산이 힘이 되겠습니까, 박사학위가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도 죽음 앞에서나, 죽음과 같은 고난 중에 천국 소망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가지시길 축복드립니다.
(2)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가 왔을까요?
아브라함도 있고, 다윗도 있고, 다니엘도 있잖아요?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님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전후 맥락 없이 갑자기 오신 게 아닙니다.
우리 개인에게 오실 때도 주님은 믿을만한 체계가 잡히도록 계획적으로 꾸준히 인도하십니다.
히브리서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들의 사역이 다음 단계인 예수님께 이양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할 수없던 그 과업이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되는 것이죠.
그리고 누가복음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이 별세하실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방법은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가장 확고히 믿어야 할 복음 중에 복음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3) 베드로가 이 광경을 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부분입니다.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다른 두 복음서에도 베드로의 이 말을 기록해 놓은 걸 보면 제자들도 이 말이 엉뚱하게 들렸나 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좀 창피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정신도 없었고, 이 상상도 못할 방문에 흥분되기도 했겠죠.
이 순간이 더 지속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긴급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재빨리 머리가 돌아갑니다.
‘야, 이제 됐구나!’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전통을 문제 삼았잖아요?
모세가 왔으니 율법 전문가들의 입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은 이미 말라기에 예언된 내용입니다.
엘리야가 예수님 옆에 있다면 주님이 메시야인 것이 증명되는 것이죠.
본능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는 말을 언제 했는지가 나옵니다.
누가복음9장33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모세와 엘리야가 그냥 떠나려고 하는 걸 보고 베드로가 안되겠다 싶었던 것이죠.
손님들을 모실 장막을 치겠으니 좀 더 머물라는 것입니다.
요즘 지자체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죠.
유세장에는 각 당 대표들과 인사들이 후보자 옆에서 응원을 보냅니다.
남아서 그렇게 주님 하시는 일을 좀 거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빛이 나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양옆에 동반하고 유대사회에 등장하시면, 게임은 끝난 것이죠.
베드로가 초막 짓겠다는 말이 정신없이 한 말 같지만, 경황이 없을 때 본심이 더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우리 본성이 항상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우리가 반응할 때 신앙적인 생각이 먼저일 것 같습니까?
거의 본능적으로 이제까지 살아왔던 생각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아차하며 믿음의 관점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죠.
사람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관성을 얕잡아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타인보다, 항상 내 안전과 현세적인 형통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신앙까지 교묘히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오래전부터 굶주린 아프리카에 새마을 운동을 보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세네갈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했던 분이 안덕0박사입니다.
이분이 임기는 끝났지만 선교사의 마인드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낮 기온이 50도에 육박하는 아프리카는 느리게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농지를 개간하고 작물 심는 걸 가르치는 데 사람들이 멀뚱이 구경만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야산을 하나 매입해서 그 동네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농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50여 가구 이상이 참여하겠다고 신청합니다.
안박사가 나눠줄 땅은 잡목과 잡초와 돌이 많은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줄을 쳐서 신청한 가구마다 나눠준 것이죠.
다음날 아침에 안박사가 일어나서 기적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모두 나와서 자기 밭을 개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돌을 들어내고, 나무를 뽑고, 잡초를 거둬냈는지 하루 좀 지나자 야산이 농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게으른 게 아니었던 것이죠.
사람이 자기에게 돌아올 게 있으면 없던 부지런함도 나오게 됩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나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각자 마음 속에 성공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의 생각도 신앙이 이 땅의 삶을 잘 되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로막는 베드로를 꾸짖고 말씀하셨죠.
‘네가 하나님나라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 세상 일을 생각하는구나.’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세상 일을 생각하게 만드는 게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말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베드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것을 좀 부추긴 것입니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생각을 넣어준 게 누구입니까?
사탄이 그 생각을 억지로 가룟유다 뇌에 주입했겠습니까?
가룟유다의 마음 속에 있던 배신의 생각을 거들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 죄에 대해 핑계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그 생각을 한 것이고 결국 죄를 선택한 것도 자기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세상을 좋아하고 돈과 쾌락과 성공을 좇는 우리를 너무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죠.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라는 책을 쓴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강남을 선망하는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책 제목이죠.
이분은 31년째 강남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기 환자들 99.9%가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돈, 마약, 성폭력, 살인 등의 강력 범죄에도 강남 스타일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선망하는 돈과 성공이 결국 행복보다 고통을 준다는 게 의사의 주장입니다.
책을 낸 지 2년이 지난 지금 이 의사가 걱정하는 것은 이제 이것이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로 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 일에, 또 이 땅에 인생을 거시겠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이땅에서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원합니다.
물론 우리 믿음은 그런 삶을 가져다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목적의 전부이면 안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안박사님은 한국을 왔다갔다 하지만 주로 아프리카에서 삽니다.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아프리카의 기아와 싸웁니다.
물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불편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한번은 동네 사람들이 고맙다고 점심을 대접하는데 나비 애벌레를 삶은 국이었습니다.
한 동네에 갔더니 작대기 수십 개를 세우고 함석 지붕만 덮어 놓은 곳이 교회였습니다.
안박사와 구독자들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 힘을 합치고 있었습니다.
거기가 편하고 좋아서 아프리카에 있겠습니까?
안박사님이 한국에 돌아와 모교회에 가는 영상을 보니 그분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더군요.
그분도 여기가 좋지만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안박사와 후원자들은 사람의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잖아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결국 모세도 가고 엘리야도 가고 두려워 떨게 한 하나님의 음성도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엎드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7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만 남으셨다고 하죠.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결국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의 이 위로의 손길이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 우리에게도 오늘 예수님의 위로의 손길이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변화산 사건은 중요한 믿음의 이치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아들이 되어 이땅에 내려오신 것이죠.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매일 예수님 말씀에 주의하는 우리 모두에게 복이 임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뿌리 깊은 본성은 베드로처럼 이기적이고 현세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을 통해 자꾸 시선과 관심을 예수님께, 그리고 우리가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될 영광 된 하나님나라에 두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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