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종말장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마지막 끝이 있다고 예고하십니다.
어찌 보면 둘 다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 같죠.
예루살렘 멸망은 이천 년 전 이미 지나갔고, 왠지 우리 시대에 세상 종말이 올 것 같지도 않잖아요?
그러나 구원역사에서는 예수님이 오신 뒤부터 앞으로 재림하실 때까지를 종말로 봅니다.
우리가 갑작스런 부고를 받을 때, 고인은 세상 끝의 종말과 다름없는 종말을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종말 기간 내내 세상에는 공통적인 징후들이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다만 세상 끝에는 그 징후들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파괴적이 되는 것이죠.
오늘 주님이 종말에 대해 말씀해 놓으신 것은 알고 대처하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도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길 축복드립니다.
1.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1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주를 보내시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지난 주 혼인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 최종 선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성전을 나오십니다.
이후로 예수님은 성전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나오셨다는 것은 상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그곳의 멸망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떠난 성전은 무너지고 예수님이 떠난 이스라엘은 멸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어가길 간절히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걸어잠근 빗장을 열지 못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문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하셨다는 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없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도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행보는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당연히 나라를 다시 세우실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본문 앞 2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성전을 나오셨던 겁니다.
38절,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제자들이 듣기에 얼마나 이상했겠습니까?
이미 바벨론에 멸망했던 역사가 뼛속에 아프게 새겨진 유대인들입니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일제강점기가 새겨져 있는 것 같은 것이죠.
그런데 다시 나라가 황폐하게 버려진다는 건 또 망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독립왕국을 세우려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국토가 황폐해진다니 충격이죠.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제자들이 성전의 화려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웅장한 건물과 이 아름다운 돌들을 좀 보십시오, 주님!’
멸망이 안 믿어지는 것이죠.
저는 예수님을 알기 전엔 이 세상에 종말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어른들이 말세라는 말을 가끔 들었지만 세상은 영원한 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마지막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성경 말씀을 누가 믿겠습니까?
베드로후서3장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기서 물질이 풀어진다는 원래 뜻은 ‘기본요소들로 해체된다’입니다.
사람들은 만일 종말이 온다면 문명이 그냥 파괴될 거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온 땅을 가득 채운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최초의 원소로 풀어져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창조하신 대로 무로 돌아가는 것이죠.
어떤 인간의 머리에서 이런 것이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은 미련이 가득 섞인 제자들의 물음에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2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우리가 애착하는 세상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선고대로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완전히 멸망합니다.
남은 예언대로 이 세상도 끝이 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후 이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죠.
그리고 1948년에 조상들의 땅에 현재 이스라엘국가를 재건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전은 다시 짓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반드시 하나님이 정해주신 곳에 세워져야 하잖아요?
그곳은 구약의 지명으로 모리아산, 신약의 예루살렘입니다.
종교에 열심인 이스라엘이 왜 건국하고 80년이 되도록 성전을 건축하지 않았을까요?
성전 터에 이슬람사원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길 건드렸다간 정말 3차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이런 국제적 분쟁의 이유로 성전을 못 짓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오신 뒤로 성전 시대는 끝이 났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멸망선고는 이스라엘 선민시대는 끝나고 온 민족의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성전을 나오셔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을 마주 보고 앉으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시온산에 세워져 있습니다.
시온산과 마주 보는 산이 감람산입니다.
저도 감람산에 올라가서 마주 보이는 예루살렘 도시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성전 터에 세워진 황금돔 사원의 지붕이 금빛으로 빛나는 걸 보았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도성에 이슬람사원이라니, 왠지 마음이 착찹했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마음이 슬프셨을 것 같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멸망, 종말에 대해 예수님께 다시 질문하죠.
3절,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 끝으로 생각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구분 없이 대답해 주십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예루살렘 멸망에만 적용되는 몇 가지 말씀 외에 종말장에 나오는 말씀들은 두 경우에 공통으로 해당됩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종말의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주님은 네 가지의 징조를 이야기하십니다.
1)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칭하고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는다고 합니다.
5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종말의 시대엔 그리스도를 사칭한 자들이 신자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 많은 사이비 이단자들이 나타났잖아요?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도 이미 그리스도를 사칭한 자가 세 명이나 나타났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통일교, 신천0, 하나님의교회 같은 사이비 단체의 교주들은 자신을 하나님,또는 하나님의 중보자로 자처하죠.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는다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미혹한다고 하셨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24절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큰 기적들을 행하는 자들이 많은 신자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오히려 신자들을 미혹한다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성령을 가장한 악한 영들은 신비한 현상과 기묘한 일들로 신자들을 현혹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세계를 주셨지 초자연적인 세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신 자연의 섭리 속에서 말씀에 근거한 이성적인 믿음을 갖는 게 가장 안전하고 바르다는 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민족과 나라 간의 전쟁이 많아집니다.
7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죠.
그런데 종말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잦아질 것입니다.
사실 지구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오는 게 아닙니다.
국가 간의 전쟁으로 스스로 종말을 불러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지구는 멸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지상의 삶을 지속하기 힘들 그때 하나님은 이 땅의 역사를 끝내실 것입니다.
경제평화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력 분쟁이 60여개라고 합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전쟁국가에 군대와 전쟁비용을 지원하는 나라들까지 치면 90개국 이상이 전쟁과 얽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 나라 절반이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종전 합의 중인 이란 전쟁에도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결부되었습니까?
그래도 우리 세대는 아직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러기를 바라며 기도해야죠.
그러나 이번 이란전쟁으로 알게 된 것처럼 이젠 어느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도 직간접적인 고충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평화의 주님을 거절한 곳에 전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진정한 화목과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우리 가정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은 전쟁의 소문이 들릴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6절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우리에게 전쟁 같은 재난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떠하든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같이 소심하고 걱정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 비결을 다윗은 시편131편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다윗같이 전쟁을 많이 한 장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게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죠.
두려운 전쟁 중에서 다윗이 배운 게 이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젖 뗀 아이같이 마음을 평온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됐다는 게 아닙니다.
난민 캠프을 보면 사람 사는 게 저렇게 구차하구나 싶게 옹색합니다.
아기를 안은 엄마의 얼굴도 수심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엄마 품에 잠든 아이 얼굴만은 세상 평온하죠.
아기에겐 엄마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점점 늘어갈 전쟁의 소문과 환난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걸 배워야 합니다.
미래를 어떻게 대비한들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매일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만 흉흉한 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마음과 영의 상태를 평소에 힘써 터득해야 합니다.
절대로 그런 평온과 담대함이 저절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요동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할 수 있는 그 방법은 우리가 익히고 습득해야 합니다.
어? 기도했더니 마음이 편해졌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네.
그런 경험치를 자꾸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몬스침대 캠페인이 ‘불안의 시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고 합니다.
요즘 TV광고에서 보셨죠?
그런 것처럼 되는 것이죠.
이 종말 시대에 또 어떤 사건이 나를, 혹은 이 사회를 급습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위해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더 훈련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습니다.
기근은 굶주림입니다.
우리나라는 기근 위기 국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현재 3억 명 이상이 먹지 못해 죽을 위기에 있습니다.
전세계 물자를 놓고 볼 때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식료품을 구매할 여력이 없는 것이죠.
지금은 세계적으로 식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빵 한 개에 이삼천 원, 사과 한 개에도 삼천 원 꼴입니다.
쉽게 집었던 달걀값도 계속 오르고 있죠.
식품 인플레이션까지 덮여 지금도 음식을 제대로 구매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26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음식 부족한 걸 모르고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밀가루나 국수로 겨우 끼니를 때우던 때가 있던 걸 생각하면 기적 같은 풍요죠.
기후 문제로 인한 작황 부진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할 것입니다.
또 큰 규모의 강진이 잦아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최근 ‘불의 고리’라고 알고 있는 큰 지진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죠.
얼마 전 이 지진대에 해당하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진도7이 넘는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다음으로 지목된 곳이 일본입니다.
지금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점점 마지막 종말을 향해 지구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재앙이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입니까?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전쟁도, 기후변화로 인한 지진과 기근도, 사회 문제도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이잖아요.
3. 이런 일들이 있음으로 우리에게도 시련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잘 대처해야 하는 것이죠.
1) 성도로서 당하는 시련이 있다고 하십니다.
9절,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복음이 전파된 이래 언제든 성도들은 이런 위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북한만 보아도 이 말씀은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북한에서 압록강 건너로 중국 단둥이라는 도시가 보입니다.
단둥에는 중국 공산당의 승인을 받은 삼자교회가 있고, 한인교회도 있습니다.
거기 한인교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주일마다 압록강 건너 북한 지역에 한 할머니가 나와 앉아 있다고 합니다.
항상 예배 시간에 나와서 한 두어 시간 앉아 있다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가 단둥 쪽 교회를 보며 속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젠 비밀리에 모일 수도 없기에 멀리 십자가를 바라보며 속으로 예배를 드린다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가 너무 널려있어 간절함이 없죠.
이렇게 박해받는 성도들과 비교할 수 없지만 성도들은 세상에서 신앙으로 인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합니다.
디모데후서3장12절은 말씀하죠.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참기독교인의 신앙이 밖으로 드러날 때 세상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라마에 절에서 불공드리는 걸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당에서 결혼식 하는 것 까진 봐줍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거 나오면 종교 색채가 짙다고 지적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연상시키기에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잘 모르면서도 왠지 무시할 수 없고 불편한 것입니다.
내 신앙 때문에 누군가와 어색함이 전혀 없다면 마냥 좋은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려면 남에게만 박해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려면 내 스스로 육신을 괴롭게 해야 하는 것도 있죠.
오늘 우리가 소파에 늘어져 있을 나를 일으켜 예배에 나온 것이잖아요?
우리가 구원을 위해 치를 것은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안팎의 불편과 희생 없이는 될 수 없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불법이 성해지고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십니다.
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은 부도덕한 사회현상을 말합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잘 살면 사람들의 준법정신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실험결과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미국의 한 사회과학교수가 한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미국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사람의 발이 도로에 들어섰으면 무조건 서야 합니다.
이 교수가 자기 발을 도로에 한발 내딛고, 지나가는 차들을 상대로 어느 차종이 정지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작은 차들은 백 프로 멈춰 섰습니다.
그런데 고급차량의 경우는 47%만 정지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경제적인 수준이 높아질수록 공감세포가 둔해진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부자될 걸 추구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법에서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럼 가난하면 법을 잘 지키냐, 그것도 아니죠.
여행 유튜버들이 인도나 아프리카의 빈민국을 여행할 때 진저리를 치는 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그냥 돈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많이 가졌으니까 못 가진 우리에게 나눠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계층 갈등이나 이해관계 충돌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적대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언제고 안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가난은 실직, 노숙, 마약, 폭력, 범죄로 이어집니다.
중산층이 모여 살던 미국과 캐나다의 대도시를 노숙자와 마약 중독자들이 점령한 경우가 꽤 되잖아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점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불법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법은 사랑입니다.
마지막 때 이렇게 사람들의 사랑은 점점 식어가지만 우리는 더욱 힘써 주님의 법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3)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해결 방법을 주십니까?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견디는 것입니다.
만일 견뎌야 할 문제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 인격은 근감소증에 걸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세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연단되지 않은 인격은 지나가는 미풍도 칼바람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시험을 피하게 하십니다.
기도해도 다가온 시험이라면 우리를 견디고 강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시험은 우리를 믿음직하고 아름다운 성도로 다듬어 갈 것입니다.
이 땅의 삶에는 갈수록 견뎌야 할 일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끝까지 견뎌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중에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은 마지막 끝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증거될 것입니다.
아무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구원 역사가 끝나지 않는 것이죠.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다지도 꺼려하는 복음 전파가 세상 끝까지 이뤄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평생 복음을 전하려는 부담을 갖고만 살아도 귀합니다.
내 평생 복음 전하며 살겠다고 다짐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의 종말은 우리에겐 복된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성도들은 종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선민시대, 성전시대가 끝났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성전되시고,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성전입니다.
앞으로 종말의 사인인 전쟁과 기근과 환난은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재앙에 직격탄을 맞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셨죠.
그러면 이런 종말의 위기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법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랑이 식지 않도록 성령님의 감화를 구하고 힘써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열심히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견디고 인내하며 주님 볼 날을 기다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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