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하나님의 기쁨 (스바냐3장14절-17절)

남수연 2012. 11. 14. 15:13

 

부모의 소원이라면 나보다 자식이 더 잘되고 행복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모습보다 더 부모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없죠.

하나님아버지도 다르시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파이퍼목사님이 최근 제시하는 신학사상을 크리스천 헤도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크리스천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하면 오히려 금욕주의가 떠오르기 쉽죠.

평생을  말씀과 씨름한 백발이 성성한 노신학자가 깨달은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별해 쾌락주의라는 강도 높은 말을 붙인 것이죠.

성경에 흐르는 관심사는 기쁨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으로 시작되고 요한계시록은 천국의 영원한 기쁨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머리를 싸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 우리 환경과 우리의 무능함을 들여다보는 것을 안쓰러워 하십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 내라’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속성인 기적의 기쁨을 심어주신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모든 비참함 속에서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의 모든 비참이 다 사라질 때 까지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수고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시는 이런 기쁨을 날마다 조금씩 부어주셔서 우리로 즐거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14절에서 우리 스스로도 믿음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새 마음이 어두워지고 낙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데 어떻게 기뻐해야 할 지 참 막막하죠.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마음이 굳어지고 전혀 기뻐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쁘고 즐겁게 살고 싶어도 마음이 그렇게 쉽지 않죠.

우리가 기뻐하며 살 수 있는 데는 사실 근거가 있습니다.

15절 말씀인데요.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했고, 네 원수를 쫒아냈고, 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매일 상기하고 믿음으로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회복하고 하나님 또한 우리를 향해 기뻐하시는 모습을 마음으로 느끼는 은혜를 충만히 부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먼저 본문을 기록한 스바냐선지자와 본문을 기록한 배경에 대해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스바냐선지자는 유명한 히스기야 왕의 현손입니다.

주전 600년 경 사람이고 스바냐서가 기록 된 시대는 요시야왕 시대입니다.

스바냐선지자의 사역은 1장에서부터 다짜고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퍼붓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잔인하게 침략한 주변국에 대한 심판도 빼놓지 않습니다.

본문엔 하나님의 심판 뒤 소수만 남은 연약한 백성들에게 영원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예언하고 3장으로 간결하게 끝을 맺습니다.

이 예언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되며 역사적으로 이미 이루어졌죠.

그러나 스바냐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이 예언은 또 다른 미래의 예언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 전체에서 지목하는 이 여호와의 날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성취 될 더 먼 미래의 날을 예언하는 이중 예언인 셈이죠.

그 날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오랜 숙제를 다 푸신 날이고 그 날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린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날이 왔으니 시온의 딸아, 하나님의 자녀들아 이제 마음껏 기뻐하고 노래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 날이 임하고 구원이 성취된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매일 간직하고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세가지 일을 자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 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벌을 제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없던 것으로 만드셨다는 것이죠.

이게 우리가 매일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영적인 세계나 자연세계나 형벌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언제 하나님께 무슨 벌 받을 일을 했냐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왜 인간을 죄인이라 하는지, 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지 하나님 쪽에서 하시는 말씀을 좀 들어야 합니다.

죄를 간단히 한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당연히 목적이 있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목적을 망쳐놓는 게 한마디로 말하면 죄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납니다.

‘자,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화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존귀함을 가진 하나님 을 닮은 모습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겠어요?

우리가 사람끼리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교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아버지로서 사람의 공경을 받으며 사람끼리는 형제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십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망쳐 놓았기에 그게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버리고 사람도 하나님도 다 나를 성취하는 데 이용하려 했던 것이 인간의 타락의 동기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자기인생을 마음껏 행복하게 살 줄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죠.

하나님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졌던 이 땅의 축복은 다 사라지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인생의 밭을 갈며 이마에 소금 땀을 흘리는 고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뒤에 하나님 앞에 그의 일생을 결산해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 증인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느끼도록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행복하다면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난 사람들의 죄는 그렇게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죄는 사소한 도덕적인 죄부터 조직적인 범죄와 전쟁과 격렬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 등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지구촌에 일어나는 갖가지 두려운 일들이 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의 결과입니다.

멕시코의 마약조직들의 잔인한 살인행위를 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나 탐욕대로 살아 온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정확히 계산해서 엄밀하게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속담에 가을 빚에 소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죠.

가을에 가면 갚아야 되는 게 뻔한 데 그걸 생각하지 않고 당장 쾌락을 위해 빚을 내서 소를 잡아먹는 걸 말합니다.

내일 반드시 돌아올 일에 대해 몰지각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것이죠.

우리가 반드시 죽고 창조주 앞에 서게 될 것임을 망각한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런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비서였던 구익균선생이라고 계십니다.

작년에 이 분이 연류되었던 통일사회당 사건이 고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오래전 혁명정부 때 부당하게 반국가세력으로 몰려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검찰이 재판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대법원에 상고했다고 합니다.

구익균선생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십니까?

103세입니다.

인간법정의 죄의 형벌도 이만큼 집요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형벌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받은 학대로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고생으로 인간의 죄의 값이 청산되는 게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반역의 값은 너무 중차대해서 인간의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49장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오늘 말씀은 이 값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들의 형벌이 스스로의 힘으로 제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그 형벌을 제거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심판을 당할 인간을 대신해 하나님이 값을 대신 치르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너희의 모든 형벌이 제거되었으니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스가랴 13장1절에도 예언되었죠.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뻐해야 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제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변함없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은 단 한 가지에서 나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을 얻고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과 행복을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잠깐 있는 고난을 이길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양심은 좀 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내가 아무 한 일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니 실감이 안 나는 것입니다.

나는 값없이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게 어디 심상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죽음과 맞바꿀 만큼 엄청난 영광과 값어치가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 값을 치르신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의 은혜를 느낄 수도 없고 기뻐할 수도 없는 것이 구원의 비밀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려면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깨닫기를 늘 기도할 때 우리 속에 기적 같은 주님의 기쁨이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형벌을 제거하셨고 영원한 축복의 나라를 상속받았다는 기쁨이 날마다 샘솟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여호와가 네 원수를 쫒아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가 있다는 뜻이죠.

스바냐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엔 나라를 위협하던 강대국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자이고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죄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은 타락한 영적 존재인 사탄의 놀음에 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활한 인격체를 어떻게 대항하고 무슨 능력으로 감당합니까?

마귀는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숨어서 역사하고 영적인 존재를 맹신하는 사람들에겐 보이는 존재로도 역사합니다.

탤런트 하희0씨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귀신의 형상이 그렇게 눈에 보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디 상가집에 다녀오면 영락없이 집에 그 죽은 사람의 모습을 한 귀신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명이 사고로 죽은 현장을 지나친 날은 밤에 단체로 귀신들이 들이닥쳐 괴롭혔다고 합니다.

마귀는 얼마든지 죽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희0씨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자 눈에 보이던 악령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내 원수를 쫒아내셨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사탄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치러야 할 형벌의 댓가를 예수님이 완불하신 사실입니다.

더 이상 원수가 우리를 질질 끌고 가 무서운 심판의 자리로 데려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3장8절은 말씀하시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의 흉계를 분별 못하고 우리 스스로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의 본성과도 싸우지 못합니다.

오직 내 영혼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마귀의 끈질긴 청구를 주님의 보혈로 기각하신 예수님의 소유가 되는 것만이 원수를 이길 능력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만지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마귀는 이미 진 싸움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기에 영적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싸움에서 이겼지만 우리는 매일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원수를 쫒고 승리하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우울감을 심어 믿음의 힘을 잃게 합니다.

사소한 죄로 유혹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는 죄를 볼 때 고개를 돌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를 죄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하게 사랑하시고 돌보시지만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무심코 다른 사람 마음에 상처가 될 말을 뱉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거만하게 사람들을 무시하면 하나님은 잠시 고개를 돌리십니다.

죄가 되는 행동을 하면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죄로 우리 마음이 오염되면 하나님은 축복 대신 징계를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기 때문이죠.

마귀에 져 실패할 것이 아니라 축복받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면 축복을 주시겠다는 확고한 기도응답에 대한 말씀을 하신 뒤 이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7장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의 우리 왕 되심을 인정하고 대접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왕자와 공주로 대접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축복을 받으려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서 친절히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사랑으로 겸손히 행한다면 마귀의 덫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죠.

오늘도 우리는 사탄이 득세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살핌이 없이 살지 못합니다.

인생을 다루는 많은 책들이 그럴듯한 말로 감성을 자극하고 지성에 호소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 맞지 않습니다.

위기의 인생에 어떤 베스트셀러도 해답이 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책에 써 있는대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티끌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고 마귀의 영향력을 제거해 줄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인생을 풀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를 음습하게 누르려는 마귀를 실제적으로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용0목사님은 지금도 아침과 저녁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에 침입한 마귀를 쫒아낸다고 하십니다.

한번은 귀신을 쫒아냈는 데 앞에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귀신이 앞에 떡 버티고 도망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했는 데 계속 버티고 달아나질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일곱 번을 명령하자 그 때 갑자기 종이가 찢어지듯이 형상이 산산조각이 나며 귀신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지나치게 우울감이 느껴지거나 분노가 끓어오르거나 평안이 없는 불안과 염려가 마음을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원인이 아닌 데도 그런 마음이 들 때는 큰 소리로 엄격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울하게 하는 악한 영을 쫒아내야 합니다.

한 두 번에 되지 않을 때 포기하지 말고 여러 번 쫒아내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해 자신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 마음의 악한 영을 다 몰아내고 평안과 기쁨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도 좋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이미 하나님께서 원수의 궁극적인 세력을 쫒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능력으로 모든 마귀의 계략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하고 마음의 두려움과 우울감을 극복하고 기뻐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기뻐할 이유는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분명 우리가운데 하나님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영광스러움을 우리는 얼마나 실감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 피부로 느끼는 정도가 ‘대통령 존재 효과’ 정도라고 합니다.

매일 뉴스에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대통령이 청와대에 살며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밖에는 하나님의 실체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천국의 보좌뿐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을 오늘 말씀으로 보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짐을 함께 지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하고 같이 가면 어린 자식이 지갑을 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쇼핑카트 안에 그냥 과자며 장난감이며 집어 넣기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의 결재권을 갖고 시행하십니다.

큰 어려움과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 주시지만 때로 정말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작은 문제에 간섭하시고 산뜻하게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럴 때 오히려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가까이 느껴지며 우리 마음에 작은 기쁨이 채워지는 것이죠.

그러니 15절 하반절에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대적할 원수는 쫒겨났고 사람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결코 재앙과 저주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아직 성장을 위한 고난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다소 힘겨운 시간들은 축복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 병실에 보낸 화분에다 ‘축 수술’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고난의 유익을 아는 사람이었나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의 영광을 향해 가고 있는 도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16절은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기억하라.

17절을 한 번 마음 속으로 읽어 보십시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줍니까?

마치 갓난 아이를 강보에 감싸 안고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부모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강보에 싸인 아기가 어찌 부모의 그 깊은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 기이한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성도들아 기뻐하라고 오늘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박찬0 경북대 전 총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경남 산청의 가난한 시골마을에 살던 아버지는 박총장임을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기대하죠.

촌에서 올라 온 박총장은 대구중학교에서 꼴찌를 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은 차마 꼴찌한 성적표를 내밀 자신이 없었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은 아버지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척들이 몰려와 찬석이 공부잘했더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들 잘 뒀다고 친척들은 책거리를 하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던 박총장 집이었습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 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혔고 겁이 난 그는 죽고 싶은 마음에 강가로 뛰어가 물속에 머리를 쳐 박았습니다.

그 충격적인 사건이후 그는 달라졌습니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17년 후 그는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드디어 말을 꺼냈습니다.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말씀 하셨습니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그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못나고 고집스럽고 찌질한 우리를 바라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으시며 지금도 잠잠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이름을 몇 번이고 즐겁게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우리 앞에 왔다 갔다하는 자식을 바라볼 때 저런 것이 어떻게 내게서 나왔나 감탄이 나옵니다.

물론 내가 어쩌다 저런 것을 낳았나 싶을 때도 있죠.

전쟁고아들을 데려다 아무리 잘 먹이고 키워도 잘 발육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을 보고 감탄해주는 부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한없이 감탄하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우리를 너무 만족하게 하지 않습니까?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막연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는 가늠하지만 우리가 지금 알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아버지의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자신에 대해 슬퍼질 때 우리의 신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안으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그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이 사랑을 깊이 체험할수록 세상사의 한숨과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기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으로 연약한 우리 모두를 날마다 위로하시고 능력을 더하시고 승리케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2.11.4 .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