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필요한 것들이 없을 때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부족한 것들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도 돈이든, 건강이든, 사랑이든, 무언가 부족한 것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처럼 모든 게 바닥났다면 문제는 더 심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과 소가 없는 데도 마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외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 기쁘게 살아가지만 무언가 떨어졌을 때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박국선지자는 도대체 무슨 믿음이기에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을까요?
본문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지금 하박국선지자의 상황은 단지 의식주가 불편한 정도가 아닙니다.
곧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멸망당할 것을 듣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더 더욱 제정신이 아닌 것이죠.
전쟁이 확정된 상황, 그리고 패전이 결정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박국선지자도 처음부터 이런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박국서를 통해 깨닫고 습득해야 할 믿음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는 고통당하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과 난리가 나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져 너나 없이 다 고통당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전쟁과 기근과 각종 질병으로 그런 고통의 소용돌이 가운데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일상적인 편안함이 예사로운 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 우리 민족 앞에, 우리 개인사에 무슨 일을 만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흡족한 환경에 있을 때만 평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면 고통당하는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불행하게 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얇팍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지 내가 누리던 작은 것 하나를 잃어도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저도 이사하고 나니 중앙난방이라 마음대로 난방조절이 안됩니다.
추워도 더 땔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지 아직도 적응하는 데 좀 어렵습니다.
참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잘 살았다고 조금만 불편하면 불평이 터져나오는지요.
다 채워져야 만족하겠다,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야 행복하겠다 정하셨다면 나날이 불행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박국선지자의 반전의 신앙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볼 때 하나님의 큰 은혜로 모두가 환경을 뛰어넘고 기뻐하는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라고 시작됩니다.
하박국이 이 묵시를 받았을 때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다고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들이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의 두렵고 엄청난 일이 비밀스럽게 담겨있는 묵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의 묵시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에 다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그 묵시들은 끝난 것이 아니고 은밀하게 점차 드러나도록 감춰진 인간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하박국서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가 세 장밖에 되지 않는 소선지서입니다.
내용은 짧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장엄한 계시를 엿볼 수 있는 성경입니다.
또 의문투성이인 인간 역사에 대한 하박국의 질문과 하나님의 좀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선지자의 정확한 활동시기를 밝히지 않았지만 본서의 내용을 통해 대강 남유다의 멸망이 임박했던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압축하면 요시아왕이 죽고 여호야김왕이 즉위한 시점 정도로 봅니다.
성도님들은 이런 시기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하박국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박국 같은 옛날 유대인이 나와 큰 상관도 없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기록자와 대면하듯 말씀을 통해 지금 현재 우리와 대면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방법이 없습니다.
로마서15장4절을 보면 분명히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모든 성경은 다 지금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그렇게 말씀을 들으실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다짜고짜 하나님께 따지는 하박국선지자의 불만으로 시작됩니다.
하박국선지자는 1장에서 하나님께 당돌한 첫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죄악을 보고만 계십니까?
의인들이 악인들에게 에워 쌓여 고난을 받고 있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방관하시겠냐는 것이죠.
하박국의 불만의 폭발은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관련이 깊습니다.
당시 요시야왕은 보기 드물게 하나님을 신앙했던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성경 자체에서 요시야왕을 평가한 말씀이 열왕기하23장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대단한 평가 아닙니까?
선조의 우상숭배를 완전히 걷어 낸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열정적인 신앙은 열왕기와 역대서에 아주 세세하게 여러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백성들이 다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하34장에 보면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런데 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요시야왕이 너무나 황당하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 본 후에 죽인지라
애굽왕이 앗수르왕을 치러 올라가는 데 위협을 느낀 요시야가 방비하러 나갔다가 거기서 너무나 싱겁게 전사한 것입니다.
아직 젊은 나이이고, 유대민족을 신앙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너무나 할 일이 많은 데 갑자기 전사하고 만 것입니다.
요시야의 선한 업적과 신앙을 생각할 때 정말 의문의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온 마음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백성들을 바로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요시야왕을 그렇게 불의한 자의 손에 죽게 버려두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요시야왕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장수하다 평안히 돌아가니라.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야 우리 믿음에도 좀 축복을 보장받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뒤에 즉위한 여호야김왕은 더할나위 없는 악인이요 어리석은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요시야의 피땀 흘린 개혁을 순식간에 뒤엎어 버렸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들을 오히려 죽이고 박해하였습니다.
바벨론 심판을 예고했던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실제 우리야라는 선지자는 심판을 예언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애굽으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왕이 애굽까지 사람을 쫒아 보내 잡아와서 칼로 죽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불의한 자가 권력을 잡고 의인를 박해하고 악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박국이 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냐는 것이죠.
이런 의구심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작년에 캄보디아의 방효원선교사 일가족이 현지에서 선교 훈련을 끝내고 첫 선교지로 떠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선교사 부부와 두 아이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다은이라는 열살 정도 된 큰 딸과 네살 정도 되는 막내 다정이만 생존해 한국으로 실려와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은이는 결국 한 쪽 팔을 절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팔이 없는 다은이를 보는 데 마음이 그렇게 짠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아빠 엄마가 죽은 것을 안 다정이가 부모가 안치 된 납골당을 찾아간 영상을 보았습니다.
부모사진을 보고 있던 다정이가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엄마 보고 싶다 그러는 데 정말 눈물이 저절로 나더군요.
누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다 선뜻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성도가 암으로 죽어갈 때,
기도로 매달렸건만 일이 실패했을 때,
평생 믿어도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도 하박국선지자 같이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왜 악한 자는 잘되고 선량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성도들이 고난과 시련을 당해야 합니까?
하박국선지자의 이런 항의성 질문에 하나님은 너무나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상상치도 못하게 포악한 갈대아 사람들이 몰려 와 패역한 이스라엘을 응징하고 포로로 끌고 갈 것이다.’
하박국선지자가 원했던 답변이 이게 아니잖습니까?
바벨론 군사들이 몰려와 유대민족을 멸망시키는 이 시나리오는 절대 하박국이 원하던 응답이 아닙니다.
그러면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같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을 겪어야 하지 않습니까?
악인만 징벌받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게 하박국의 바램이었습니다.
당황한 하박국선지자가 다급하게 두 번째 질문을 하나님께 던집니다.
더 악한 자를 데려다 덜 악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 말이 되십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찌 이렇게 일하십니까?
그러면서 2장1절을 보면 하박국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나님이 이 부당한 심판방식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는 지 성루에 고고하게 서서 질문의 답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틀렸다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변론을 들어야겠다는 것이죠.
바벨론제국을 통한 멸망 계획을 철회하시라는 말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또 하박국에게 답변하십니다.
‘자기의 힘만 믿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을 약탈하고 살륙하는 잔인한 바벨론제국도 다른 나라를 시켜 심판할 것이다.’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멸망하고 바벨론제국은 불과 칠십여년 만에 페르시아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 역시 이해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악으로 악을 처단하시고 죄의 수렁에 허우적거리는 잔혹한 인간역사를 통해 뜻을 이루시냐는 것이죠.
하박국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인간사를 섭리하시냐며 질문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하박국서 어디를 봐도 하나님의 답변이 여전히 별로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답답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조급증이 생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우리 인생에 많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으실 때가 더 많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적어도 우리가 계획한 길보다 낫습니다.
이사야 55장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인류의 역사에 대한 계획도, 우리 인생에 대한 계획도 하나님은 가장 바르고 정당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판단 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2장에서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2장13절에서 이렇게 하박국의 항변에 시인하십니다.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인간역사가 먹고 먹히고 죄악으로 고통 받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적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인간의 죄악과 환란의 역사를 통해 고통 중에 그들이 창조주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인간은 교만한 목을 꺾고 창조주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것이죠.
개인의 삶에서도 자신을 보호하던 안전장치들이 파괴되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부딪힐 때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다고 창세기에 기록합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자연환경이 만만하게 소득을 주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죄를 지었으니 지지리 고생하며 살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죄인들에게 안락한 환경과 풍부한 재물이야말로 영원히 창조주를 멀리하는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이런 부조리한 인간사에서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애매한 고난이건, 우리 죄의 결과로 인한 고난이건, 분명히 우리를 더 믿음으로 단련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잠언 16장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전쟁과 고통이라는 인간의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도를 벗어나 멸망의 길을 따르려 할 때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인간막대기와 환경의 채찍으로 연단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스스로 지긋지긋한 자기의 죄를 미워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을 스스로 따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세상을 섬기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오직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괴로운 사건도 힘든 환경도 의미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하박국선지자처럼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지금 환경과 처지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답답한 상황 중에 있더라도 옳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릴 때 반드시 복된 결말을 주실 줄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이런 하박국의 신앙이 3장에서 급반전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트집을 잡던 하박국선지자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하박국이 지구 종말의 묵시를 듣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모든 죄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묵시를 본 것입니다.
신약의 요한과 사도들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묵시를 받았듯이 구약시대 선지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미래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묵시를 받았습니다.
스가랴나 다니엘, 에스겔선지자들이 상세하게 묵시를 기록했고 하박국선지자도 그렇습니다.
본문 앞 부분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광경이 두렵고 엄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역사를 종결하고 심판하러 세상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채가 햇빛 같이 비추고 땅이 진동하고 산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 전능자의 심판 앞에 온 몸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는 것입니다.
악이 악을 벌하고 먹고 먹히는 인간세상의 심판이 아닌 궁극적이고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심판을 하박국이 묵시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죠.
13절에 보면 그 날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악인의 머리를 치시고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본질적인 악의 세력인 사탄의 세력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을 부추겨 인간 역사를 망가뜨리고 세상을 불행에 빠뜨린 사탄의 세력을 영원히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탄의 유혹을 쫒아 불의를 저지르는 모든 악인들도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묵시는 때가 있으니 반드시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세상의 끝과 완전한 심판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박국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를 목격하자 트집 잡던 입을 틀어 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그 날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 앞에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덜덜 떨린 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항변하던 하박국 역시 욥처럼 그 입을 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두려운 심판의 묵시를 영적으로 깨달을 때 비로서 불만과 불평하는 입술을 가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 극한의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신 것은 이 땅에서 좀 더 잘 먹고 잘살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가시고 불편한 일 만나지 않고 무사안일하게 살라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불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을 생각하고 마음에 확신할 때 우리가 잠시 당하는 이 땅의 어려움을 귀찮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직장을 얻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자식이 잘 풀리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중병에 걸려 죽을까봐 조금만 아프면 벌벌 떨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장에 돈이 떨어지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보인다고 해도 다 살아집니다.
옛날 우리 어른 세대가 다 빈 주먹으로 그렇게 자식들 키우고 살아냈습니다.
그런 가난과 질병과 갈등이 무서운 것 보다 그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것이 훨씬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닥치면 다 해냅니다.
때로 이것저것 다 떨어지고, 난처한 일도 당하고, 눈치 밥도 먹고, 슬픈 일도 당하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미리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내 인생을 대면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은 현실을 이길 능력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하박국도 다가오는 바벨론의 말발굽소리를 들으며 온 몸이 떨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전운의 두려움과 어둠이 짙게 깔릴 때 하나님은 한줄기 광선과 같은 소망의 말씀을 2장에서 주셨다는 것을 그가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선지자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벨론의 무서운 날보다 더 크고도 두려운 심판의 날,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날 구원받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날의 묵시를 깨닫고 구원을 확신하니 모든 것이 다 없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당장 바벨론에 의해 모든 것이 다 약탈되고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고 논밭엔 먹을 것이 없겠지만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지옥의 심판을 벗어났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님은 종국적인 구원의 은혜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이생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19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라.
이 말씀이 그렇게 낭만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슴 뒤에는 항상 맹수가 있습니다.
사슴이 뭐하러 높고 위험한 곳을 뛰어다니겠습니까?
뒤에 맹수가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맹수 앞에서 도망치는 사슴처럼 약한 존재들입니다.
내일 앞에서 떨며, 자식들 키우고 먹고사는 문제 앞에 항상 노심초사하는 연약한 존재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맹수가 쫒아올 수 없는 높은 산악지형을 날렵하게 뛰어다니는 사슴의 다리에 놀라운 힘을 주셨습니다.
삶이 우리를 추격하고, 두려움이 우리를 바짝 뒤쫒아 오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슴과 같이 다리에 힘을 주십니다.
모든 환경과 두려움을 따돌리고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며 모든 형편을 유유히 받아들이고 주님을 따르는 강인한 성도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 삶에 모시고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면 어떤 위기에도 망한 적이 없습니다.
광야 같은 시기를 지날 때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습니다.
기기묘묘한 응답으로 손댈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어쩜 그렇게 최상의 것을 만들어서 손에 쥐어주시는 지 감격에 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을 때 현실을 이길 힘과 능력으로 더욱 굳게 서리라 믿습니다.
제가 반쯤 준비한 설교를 컴퓨터 본체에 저장하지 않아 금요일에 다 날려버렸습니다.
메일로 받아 템프러리파일에서 작업하다 닫아버린 것입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이 충격적이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듯이 컴퓨터를 열어 보았더니 설교가 없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데 그래도 정신을 수습하고 설교가 없어져도 하박국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잘 안되더군요.
그러나 역시 말씀대로 순종해야죠.
비록 작성한 설교가 없어져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그리고 또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말씀을 준비했더니 또 되더군요.
우리 힘으로 다시 할 수 있고, 힘들여서 되는 일이라면 문제도 아닙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말라가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으십니까?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는 게 없으십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도우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힘을 내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환경을 이길 능력인줄 믿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영0 목사님이 요즘 교회에 어려운 일이 많잖습니까?
얼굴에 고뇌의 흔적이 있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더군요.
나는 참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의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내게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교인들이 다 감동을 받고 박수를 치더군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저도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위해 애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경외하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연약한 자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겠습니까?
하나님께 자녀들을 맡기고 기도하는 부모들의 자식들 귀하고 유능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능력 있는 인재들로 키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재능도 없고 빽도 없고 실력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아버지께서는 가장 알맞고 아름답고 만족스런 삶을 살도록 계획하셨다고 믿습니다.
진실되게 주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 모두를 그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지옥의 두려움을 이기고 천국의 영원한 영광 속으로 웃으며 기뻐하며 즐겁게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2014년2월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