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엠마오로 가는 길 (누가복음24장13절-35절)

남수연 2014. 3. 18. 21:21

오늘 나눌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은 십자가의 대속신앙과 함께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정말 믿어지십니까?

그렇다고 치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는 것은 순교를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은 매를 맞았고, 옥에 갇혔고, 듣지 않는다고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진짜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결코 나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 안에 녹아서 나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머리로 뜬 구름처럼 믿는 것이 현대 신자들의 가장 큰 병폐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 손에 각각 세상과 천국을 쥐고 있지만, 이 둘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를 놓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 때 엠마오로 돌아갈 것이냐 예루살렘에 머물 것이냐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위기의 순간 엠마오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에 낙심한 제자 둘이 엠마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왜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이 존경받을 성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제자들의 말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따랐는지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성인이신 인간 예수님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로 내 인생의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내 인생의 결과를 영원히 달라지게 합니다.

요한복음6장40절에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나의 부활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이 많은 공상가의 무모한 죽음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런 성인 예수님을 믿는다면 언제고 위기와 시험을 만날 때 이 믿음을 버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믿는다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면 우리의 모든 논쟁과 갈등은 게임 끝 아니겠습니까?

죽어도 믿고 따라야죠.

일찍 이 인생을 직관한 한 시인은 노래하길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영원히 죽는 게 싫어서 부활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죽은 뒤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 안에서 보배로운 영화를 질리도록 누리기 위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상하지 않고 유치해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영생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게 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와 복락을 환호하고 기대하고 날마다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오래지 않아 죽어서 낯선 세계와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무엇이냐에 대한 유일한 정답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기에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영적으로 깨닫게 하셔서 사망과 어둠을 이기고 부활의 참소망을 갖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당시 상황을 볼 수 있는 데 말씀을 주의깊게 읽으신 분은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을 비롯해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처음에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더 깊고 심오한 영적인 진리지만 오늘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부활의 진실성과 부활에 대한 지식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 다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적용할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느냐는 의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배설교에서 흔히 듣던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부활에 대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날만한 내용들을 그냥 난제라고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이 부분에서 공격을 받고 시험에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은 기쁨과 승리의 탄성보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고 다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혼란스럽던 부활에 대한 성경기록들을 읽다보면 우리도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무슨 뜻입니까?

이 두 제자는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혼란에 휩싸여 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앞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사람들이 추종하던 누군가를 기리고 높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스승을 신격화시키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교리화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만든 종교들이 제자들에 의해 각색되고 덧붙여서 경전을 만들고 종교의 창시자를 떠받드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죽었던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믿기 어려운 이 난처한 사실을 너무 불친절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믿으라는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좀 말을 맞추고 정리해서 사람들의 이성으로 납득하기 쉽게 기록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부활에 대해 혼란스럽던 제자들의 당시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도무지 못했던 그 부활을 증거하며 나중엔 목숨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여러 번 사흘 뒤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그 말 뜻 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부활이란 사건은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또에 당첨 될 확률이 8백만분의 일, 벼락을 두 번 맞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하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도 누군가가 당첨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자연세계에 없는 현상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부활을 말씀하셔도 그게 뭔지 몰랐다는 것이죠.

또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도 그들의 지식으로는 이 신비한 현상을 분석하고 정리해서 표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부활에 대해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가 않으실겁니다.

당시 제자들도 도대체 부활이 무엇인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머리 속에 개념도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죠.

영적인 지식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로는 관심도 안생기고 공감도 잘 안됩니다.

영적인 진리와 지식을 깨달으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처럼 믿어지는 단계가 와도 우리 이성과 지식으로 완전하게 해석되고 깨달아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고 사는 문제를 분석하고 해답을 주는 심리상담학적인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장 내가 사는 문제이고 또 문제의 해답이 보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문제의 원인을 몰라서 그게 해결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알아도 해결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게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을 좀 치료한다 해도 본질 속에 문제의 원인이 있기에 다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죠.

요즘처럼 우리 사회에 상담하고 치유하고 힐링하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불행한 가정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내일에 대해 점점 더 두려워하고 현실에 대한 걱정에 시달립니다.

내 문제를 심리학, 사회학적으로 쪼개고 분석할 줄 모르면 어떻습니까?

현실을 이기고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낼 능력이 있는 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영적인 지식과 진리가 당장 내 문제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이 아닐 것 같지만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야말로 문제를 제대로 보게 하고 해결할 능력도 생기게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부활의 예수님을 제대로 깨닫고 만나게 되보십시오.

환경이 달라지지 않아도 맞붙어 싸우고 해결할 자신감이 확실히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세상과 맞붙어 볼만 한 배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지금도 우리 삶을 주목하시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신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못 믿었던 것 보다 더 큰 의혹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처음 반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못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본질 뿐 아니라 얼굴도 달라지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의심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저 분이 도대체 그 예수님이 맞는 거야?’

저는 이래서 성경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아무 것도 은폐하고 포장하지 않습니다.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당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 달라지셨습니다.

심지어 매번 볼 때 마다 달라지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 번째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때 해변에서 주님이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의 아침거리로 생선과 떡 몇 조각을 굽고 계셨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했던 제자들인 데 여기서 또 못 알아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때 그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21장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 날 새벽에 오신 예수님이 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에 못 자국이 있으신 것도 항상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에 ‘나의 주를 손에 못 자국을 보아 알겠네’ 이런 가사가 있죠.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 항상 그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걸으시며 성경을 설명해 주시고 마을에 들어가 함께 식사도 하셨습니다.

만일 손바닥에 상처가 있다면 제자들이 무언가 의아해했을 텐데, 그런 정황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도 얼굴이 해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기록했지 발의 못자국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도마에게 보여주신 못자국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을 확인시키시고 우리에게 확증하시기 위함이지 항상 그렇다고 넘겨짚을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몸은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몸입니다.

그러나 단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인격, 그 사람의 본질인 인간성 그 자체는 그대로입니다.

가끔 오랜만에 나온 연예인을 보면 진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겠는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까운 사람들은 말 몇 마디 해보면 그 사람인 줄 다 안다는 것이죠.

외모가 어떻게 바뀌든 나라는 본질은 영원히 같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정하게 된 것은 주님의 인격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좀 믿기 쉽게 이전의 얼굴 모습으로 왜 나타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기 바로 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부활한다는 결론이 납니다.

어린이로 죽으면 어린이 모습으로, 늙어서 죽으면 늙은 모습으로, 장애인으로 죽으면 또 어떻겠습니까?

내세에 관련 된 영적 진리들은 우리에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여주신 일부분으로 확대해석하거나 지레 짐작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신앙을 키워갈 때 좋지 않습니다.

부활과 같은 심오한 영적 사실은 그저 이런 의문을 가진 채,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믿음만 가지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반전 이상으로 아름답고 영화롭게 변할 것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갖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두 제자와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길은 부활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의 길을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사람들의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죠.

부활이 없는 죽음, 생각만 해도 두렵고 막막하고 질식할 것 같습니다.

물론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오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엠마오 세상길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여전히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호기심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열띠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는 것은 뭔가 일어나지 않았냐는 기대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절망하면 말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매일 믿음에 낙심하고 실망하여 세상으로 향했다, 다시 하나님을 향했다 하는 것이나 오늘 엠마오의 길이나 사실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하게 만날 때 까지는 이런 갈등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찾아가서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안한 엠마오의 길에도 동일하게 예수님은 찾아오신다는 것이죠.

문화부장관을 지냈던 이어0씨의 간증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몇 년 전 일본 교토에 혼자 묵으며 저술들을 정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쌀이 떨어져서 마트에 갔습니다.

배달비를 좀 절약하려고 무거운 쌀 한 포대를 어깨에 얹고 언덕길을 걸어 연구소로 돌아오는 데 땀에 온 몸이 젖을 만큼 힘이 들었습니다.

연구소의 불빛은 다 꺼져 주위는 깜깜한 데 자기 방에만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혼자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방안에 가득하던 적막감과 허무감이 몰려들었습니다.

인생이 이게 다란 말인가?

이렇게 무겁게 쌀포대를 지고 돌아왔는데 텅 빈 방, 아무것도 없는 이게 결국 인생이란 말인가?

그 때 허탈한 마음속에 생전 의식에도 없던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사건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어령씨가 지은 시가 바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입니다.

일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발 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 손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도

풍금소리를 울리게 하는 한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아직 무신론자라고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그의 곁에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즈음 일본에 있는 어떤 모임에 강연초대를 받았는 데 자기에게 생긴 작은 믿음의 변화를 간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강연장소까지 30분이면 갈 거리라 해서 여유 있게 천천히 밥을 먹고 나오는 데 식당주인이 하는 말이 이 시간엔 길이 워낙 막혀서 빨라도 한 시간은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해서 급히 차를 탔는데 과연 도로는 빼곡히 막혀있고 그 앞에서부터 바로 빨간 불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어령씨가 순간 머리 속에 지나가는 생각이 내가 난생 처음 하나님 이야기를 한다는 데 이러실 수가 있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불이 파란 불로 바뀌게 해주셔야 맞다.

그런데 그 순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더랍니다.

좀 가니 또 빨간 불이 걸리니 그럼 그렇지 역시 하나님이 있는 게 아냐.

그런데 그 즉시 또 파란 불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있다 없다를 반복하다 강연장에 도착했는데 정확히 30분이 걸렸더라는 것입니다.

다들 비슷한 경험들 해보셨죠?

이렇게 하나님이 계셨다 안계셨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우리도 점점 확고한 믿음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분도 조금씩 믿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이 딸의 죽음이란 거대한 인생의 파고가 있었죠.

곧 숨이 곧 멎을 듯, 믿음이 사라져버릴 듯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붙들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에서도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던 삼일이 얼마나 어둡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진 것 같던 그 시간이 얼마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의 아침이 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의 조급함에서 우리의 조급함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그 날 아침 목격자로 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단 하루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귀향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끝까지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영광을 봅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결국 한 일이 무엇입니까?

33절에 보면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 라고 기록합니다.

믿음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성전수비대와 로마군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그 밤에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께서 깊이 감동하시면 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아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하는 환경과 문제들 속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돌파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신 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주님이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부활을 전해 들었고, 제자들은 마리아에게 전해 듣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 들은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길손으로 자신을 가리고 구약성경에서 자신에 대한 말씀을 먼저 풀어서 가르쳐주십니다.

구약성경에 3백 여군데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죠.

그 때 이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이들이 말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통해 먼저 영적인 진리들을 가르치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을 열어 가르쳐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들을 때 주님은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시고 심장이 뛰게 하시며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어떤 설교자도 웅변가도 자신의 말솜씨로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할 순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며 어렴풋이라도 믿음에 대한 무언가 실마리가 보인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셨죠.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혹시 믿음에 대한 확신도 희미해지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우리 곁을 함께 걸으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그 밤에 다시 믿음의 자리로 달려가게 하신 그 확신과 부활의 찬란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성경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길 기도하십시오.

계속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매일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이 우리 마음에 뜨겁게 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내 삶을 대면하고 헤쳐 나갈 최상의 컨디션과 지혜를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 위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들은 내일도 여전히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넉넉히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달려갈 길을 다 마친 마지막 그 날에 이 모든 우리의 괴로움과 약함은 사라지고 이 인생의 초라함은 영화롭게 바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굳게 붙들고 승리하며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4.3.16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