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사순절기와 고난주간엔 기독교방송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영상을 자주 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영상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실체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잔인한 사이코페스 영화의 살인 장면보다 더 오금이 저리게 하는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 형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살이 찢기고 헤쳐지고 몸에 한 방울의 피 조차 남지 않고 다 흘러나오도록 6시간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대속해야 할 인류의 죄가 그런 처절한 댓가를 치러야 할 만큼 무겁고 막중하다는 뜻입니다.
대속 받지 못한 인간이 각자 치러야 할 영원한 고통이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에서 우리는 한없는 사랑을 보지만 영원한 심판과 지옥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괴롭고 전쟁의 참상과 질병과 굶주림이 있다 해도 사람들은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어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천지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기에 이 세상은 살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차단되고 하나님과 단절 된 지옥은 더 이상 죽을 수가 없지만 죽고 싶은 곳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뒤 세상에 임했던 암흑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세상에 임했던 어둠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신 예수님을 심판하실 때 이 땅에 대한 무한하신 시혜가 멈추었던 것이죠.
세상이 살만한 것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택과 영광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큰 하나님의 혜택을 그냥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티끌만한 자비도 없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잘 살라고 으름장 놓기 위한 것이 아니고 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과연 심판이 있을까, 과연 지옥이 있을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주님의 고통을 깊이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감상적인 눈물만 흘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를 오르실 때 주님을 따라오며 통곡하던 수많은 여인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제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고 제발 회개하고 나의 속죄의 죽음을 믿어라.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확증되신 것입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을 때 법0스님의 글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 한마디에 죄인의 본색이 다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지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지옥에 던져 넣는 하나님이라면 난 믿지 않겠다. 차라리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하러 지옥에 가겠다.’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인간의 착각입니까?
지옥에 빠진 인간이 감히 누구를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랑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인간이 다 이렇게 똑같습니다.
인간의 본질에 달라붙은 끈덕진 죄를 정직하게 대면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하죠.
정말 가죽과 살을 다 벗겨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게 인간에 깊이 뿌리내린 악의 본성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할 수록 이 말에 점점 공감해 갈 수 밖에 없어집니다.
제가 믿음이 없을 때는 나름대로 참 죄를 많이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죄라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무슨 도덕적인 큰 죄를 짓겠습니까?
그런데 죄인이란 생각이 더 드는겁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낄 때 주눅이 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가 넘치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평안이 진짜 임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며 내 죄를 속죄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게 해주신 은혜를 마음 깊이 진심으로 감사하길 원합니다.
우리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이 유일한 생명의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붙드는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 과정 중에 일어난 너무나 유명한 베드로의 배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에는 육체적인 처절한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배반당하고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주님의 정신적인 형벌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정신적인 고통 때문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형벌에서 철저히 버려지는 심령의 형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만큼 사랑했던 모든 것과 자신의 소유였던 모든 것으로 부터 철저히 버려지는 아픔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의 배반, 자기백성을 구하러 왔지만 모두에게 버려지고 멸시당한 주님은 최후의 순간에는 하나님아버지께도 버림받은 고통으로 절규하시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격리되지 않았던 삼위일체 되신 아버지와 성령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가장 큰 고통을 맛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이별과 격리의 아픔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사별과 이별의 고통도 당하고 관계 단절의 아픔도 당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인간의 가장 끔찍한 불행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적인 단절의 형벌은 죄로 끊어진 모든 관계의 회복을 위함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아버지와의 끊어졌던 관계가 영광스럽게 회복되었고 형제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고독 속에 혼자 남은 그 두려움과 먹먹함을 주님께서 다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속과 새로운 형제와의 연합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철저히 버려지실 것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레위기 16장에 미리 숨겨놓으신 예표의 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일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 날 염소 두 마리를 가져와 제비를 뽑는 데 제비 뽑힌 염소를 아사셀염소라고 부릅니다.
한 마리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쳐지고 아사셀 염소는 광야로 내쫒깁니다.
제사장은 그 염소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고 영문 밖으로 끌려가는 아사셀염소를 향해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수염을 뽑고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끊긴 위험한 광야까지 끌려간 염소는 그곳에 혼자 버려집니다.
사나운 들짐승이 노리는 광야에 홀로 버려져서 여기저기 유리하다 결국 죽는 것이죠.
모두에게 저주받고 버려진 아사셀염소는 바로 모두에게 버려진 주님의 형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버려지심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받아드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를 신으로 삼았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철저히 버려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버려질 우리를 대신해서 버림을 받고 죽으셨기에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영광스러운 가족으로 환대받고 사랑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 어디서도 가질 수 없었던 가장 따뜻하고 완전한 사랑의 결속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버려지고 홀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아버지께 완벽하게 결속된 자녀들입니다.
너희는 내것이라.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런 멸시와 버림을 받으시면서도 우리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신 것을 오늘 본문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은 베드로사도 뿐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배신과 주저앉는 믿음을 보시며 가슴으로 울지 않으셨겠습니까?
내가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이 뒤에서 나를 헐뜯는 소리를 들은 것으로도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아픔을 느낍니다.
날 위해 해 준게 뭐가 있냐는 자식들의 원망이 비수가 되는 것을 부모들은 다 경험하게 되죠.
그러나 내 마음의 상처보다 더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엇나가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연민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통보다 제자들이 사탄의 시험에 빠지고 조롱당하는 것이 더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간밤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경계를 시키셨던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6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돌이켜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는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간밤의 경고를 기억하고 마음을 굳게 해라, 절대 자신에 실망하지도 말고 마귀의 참소에 넘어지지도 말라는 주님의 눈빛아니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실망시켜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은혜를 받으면 대단한 헌신을 할 것 같던 마음도 돌아서며 넘어지는 게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입니다.
마귀는 그런 우리를 참소하고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시고 일어날 힘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맞아 배반하는 제자들처럼 시련 앞에 주저앉고 달아나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붙들어 매길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몸과 마음을 다 찢으시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베드로사도의 실패를 살펴보며 영적인 교훈을 얻길 원합니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실패를 우리가 가볍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연약하고 육신의 안일 앞에서 믿음에 실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열두제자 가운데서 수석제자였던 믿음직한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을 몇가지 살펴보며 그런 요인에 우리도 주의를 기울이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에 미끄러지고 나면 영적인 회복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육적인 현실에도 만만찮은 타격이 오기 때문입니다.
삶이 혼란해지고 관계가 깨지고 평안과 축복이 멀어지는 현실의 문제들은 대개 영적인 실패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신 뒤 가룟 유다가 몰고 온 성전수비대에 체포되어 끌려가신 다음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이 체포되는 순간 함께 마지막 만찬을 먹고 최초의 성만찬을 하고 주님이 발을 씻어주셨던 제자들은 혼비백산 달아나 버립니다.
우리 역시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아픔이죠.
54절을 보면 예수님을 포박하여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고 갈 때 도망치지 않은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고 기록합니다.
‘멀찍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심장함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을 부인하진 못하지만 더 이상 가까이 하지도 않는 이 멀찍한 신앙은 결국 어느 시험의 순간 주님을 부인하고 돌아서는 위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가 또 한 명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사도가 주님을 따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던 요한사도가 베드로를 안 뜰까지 들어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추궁을 당할 때 요한은 주님이 심문당하는 현장에 가까이 있었지만 멀찍이 따라온 베드로는 이번에도 뜰 가운데 피워놓은 불 옆에 멀찍이 앉아 불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베드로의 행동에서 의도가 엿보입니다.
재판결과가 나쁠 땐 그래도 자기는 주님의 곁을 지켰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고 마지막에 혹시 주님이 이변을 일으켜 상황을 반전시키시면 가까이 있다가 바라던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죠.
베드로의 이런 마음을 비열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세속적인 이득에 짐이 될 때 슬그머니 감추었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세상도 취하고 영생도 얻으려는 이런 속셈이 남의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일은 베드로의 뜻대로 되 주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애매한 신앙의 태도는 딱 마귀의 시험 대상으로 찍히기 십상입니다.
불을 쪼이던 여종 하나가 그를 뚫어지게 보다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렁이는 불빛에 드러난 베드로의 행색을 훑어보기 시작합니다.
집요한 그들의 탐색은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란 것을 확증하고 너도 그 도당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는 점점 강경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마지막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다고 마태복음은 기록합니다.
그의 대단한 것 같던 믿음이 정말 처절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한번 주님을 부인하고 믿음에 실패하면 사탄은 철저히 망하도록 점점 집요하게 시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실 때 그는 뛰쳐나가 통곡을 했던 것입니다.
억센 뱃사람의 통곡소리엔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삼년 반을 모시고 따랐던 스승을 배반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울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실망할 때 만큼 절망적인 기분이 들 때가 없지 않습니까?
성공적인 끝을 확신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왔던 세월들이 다 무너져 버리고 끝났다고 생각할 때 밀려오는 허탈감에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투박한 손등으로 닦아냈을 것입니다.
그런 약한 자기을 다 아시면서도 기도해주시고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변함없는 신임에 미안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실패할 때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의 현장을 거부했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당하는 고통은 내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죠.
그런 고통은 외면하고 싶고 피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함께 하는 것이 또 사랑입니다.
저는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잘 못보는 편입니다.
본래 겁도 좀 많고 잔인한 장면을 보는 것은 좀 거북하죠.
건강검진할 때 피 뽑는 것도 끝까지 못보고 결국 고개를 돌리는 데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들이 제겐 신기하더군요.
그런데 어릴 때 우리 딸이 치과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앞니 하나는 갈았는 데 하나가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대문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니 모양도 그렇고 걱정도 돼서 병원에 갔더니 잇몸 안에 딱딱한 조직이 새로 나올 이를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잇몸을 째고 안에 있는 조직을 다 긁어내는 수술을 받았는 데 부모입장에선 그게 다르더군요.
꽤 오랜 시간 꼼꼼하게 잇몸 조직을 긁어내는 데 진료의자에 누워있는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그걸 다 들여다 보고 있는거예요.
혹시라도 잘못 될 까봐 그리고 딸이 겁이라도 먹을까봐.
아무리 끔찍해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게 사랑이죠.
십자가 형벌의 흉측하고도 처절한 죽음을 한 번 쯤은 목격했을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십자가 밑에 주님의 어머니와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마음이 갈갈이 찢기며 끝까지 그 고통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십자가 아래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똑똑히 목격한 제자가 한 사람 있었죠?
바로 요한사도입니다.
요한이 눈물을 삼키며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지켜보고 마지막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이 자기를 표현한 독특한 수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는 표현입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단지 사역의 동역자로 여기는 게 아니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식탁에 앉은 예수님 곁은 늘 요한의 자리였고 요한은 예수님께 기대 앉아 편안하게 밥을 먹곤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알았고 느꼈기에 요한은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며 십자가 아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목적을 갖고 열정으로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교감이 부족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격과 기질적으로 그게 좀 부족한 사람들이 있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란 영화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뒤이어 예수님은 제사장의 집에서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그리고 다시 헤롯왕 앞으로 끌려다니며 심문을 받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져 채찍질을 당하십니다.
납조각이 달린 가죽 채찍에 살갖이 찢어지고 피가 낭자한 채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시고 십자가 못박혀 돌아가신 그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습니다.
몇 년 전 영화를 보며 눈이 붓도록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처참한 주님의 모습을 그 똑바로 주시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죄에 빠진 소망 없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그 참기 힘든 고통을 견뎌내고 계신 하나님의 굳센 의지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해 고통을 참아내는 부모의 굳셈.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 창조주의 사랑이 주님의 모습에서 느껴졌습니다.
십자가는 끔찍한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견뎌내신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똑바로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감당한 희생은 얼마나 우리에게 힘을 줍니까?
오늘 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거의 다가 그랬듯이 저희 집도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오남매를 키우시느라 어머니께서 부업으로 안해 본 일이 없으셨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철에 어머니께서 함바집에 시원한 콩국을 만들어 내다 파셨습니다.
커다란 양은그릇에 가득 차게 담긴 콩국을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게 얼마나 어린 마음에도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철이 들며 그 장면을 떠올릴 때 마다 자식을 위해 무슨 일도 감내하는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든든하게 나를 지탱해주던지요.
주님의 십자가가 그런 것입니다.
아무도 자청해서는 견딜 수 없는 그 고통의 십자가에 달리셨고 결국 고통 중에 죽음을 맞으셨던 것은 바로 나에 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모님의 희생적인 노동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을 아직 알지 못했기에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십자가의 현장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에 십자가가 두렵다면 이제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 주님께서 그 사랑과 수고에 만족하게 해드리길 원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지만 실패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 데는 지나친 자기과신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화를 내며 그 방법을 저지합니다.
마태복음16장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되는 의미도 알지 못했고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님이 일하시길 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아무리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 해도 내 방법이 아니면 싫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고 가장 축복된 길임을 믿고 모든 길을 주님께 맡기시길 축원드립니다.
주님은 우리 원하는 대로 조정당하지 않으십니다.
괜한 의도를 부리다가 베드로처럼 넘어지고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의 성령을 받고나서야 비로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의 형틀에서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 순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사실 성령님의 감동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가르쳐주시기를 우리는 힘써 기도하고 간절히 바라야 할 줄 믿습니다.
김인0 목사님이 어린 딸과 함께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 연극을 보러 갔을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는 장면이 나오자 어린 딸이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까봐 가만히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어. 저건 연극이야’
그러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아빠, 예수님이 나 때문에 채찍을 맞고 계세요.’
조용한 객석에서 어린 딸은 연극이 끝날 때 까지 혼자 큰 소리로 울어댔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어린 딸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보고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무덤덤해진 자기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의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의 큰 사랑을 절실히 깨닫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지만 부족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두려운 일도 있고 귀찮은 일도 있고 실망할 일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누구에게나 주님을 따르는 데는 희생하고 감내하며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오히려 끝까지 주님을 따르게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 짐을 대신 지시고 기쁜 마음으로 따를 수 있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억지로 내게 얹혀진 십자가일지라도 그걸 지고 주님을 따르다보면 십자가 뒤의 축복의 면류관이 기다리는 줄 믿습니다.
이 고난주간 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나를 위해 참혹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아들을 희생하고 나를 살리신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길 축원드립니다.
구원의 은총을 발견할 때 그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것과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축복과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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