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시므온의 찬송(2013성탄절 설교)

남수연 2013. 12. 30. 12:26

누가복음2장21절-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넘치는 성탄절 아침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사실과 의미는 우리 믿음의 가장 저변에 든든한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성탄절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시므온이란 사람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밤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기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대로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해주신 율법대로 33일의 정결기간이 지난 뒤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오십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한 10킬로 정도됩니다.

산후의 마리아도 충분히 이동할 만한 거리입니다.

아기를 낳고 마리아의 산후조리와 성전에서 제사를 마치기 위해 가족들이 고향으로 가지 않고 베들레헴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의 첫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 동물을 제물로 바쳐 속죄해야 했습니다.

그 첫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지금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안고 성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기때부 터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에 따라 흠이 없이 따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흠이 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 한개도 없는 제물이 되시기 위해 비둘기를 제사드리며 정결의식을 치르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 아기예수께서 제물로 받쳐져야 할 것을 알지 못한 채 성전에서 속죄제를 치르는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컥해집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흠이 없는 제물로 막 이생의 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대속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사형수라면 어떻게 다른 사형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아무 죄도 안 짓고 사실 수 있었을 지 참 이해가 안되시죠?

예수님께서 흠이 없이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담을 갖고 사셨다면 얼마나 매일 중압감을 느끼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즐거움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의무가 아니고 기쁨이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부모의 심정으로 인간을 보셨기에 모든 완악한 인간들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흠없이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점점 내 인격이 선호하게 되면 우리도 점점 변해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 인격이 하나님을 점점 선호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천국에서 불편하고 어색한 하나님을 모시고 살겠습니까?

우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서서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죄를 피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죠.

물론 본성이 강해서 잘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느새 죄악을 꺼려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점점 덜 넘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죄의 본성도 없으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기에 아무 죄도 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흠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예수님만이 나를 속죄하실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성전으로 갔을 때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란 사람입니다.

25절에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였다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의 고난 중 하나님의 위로인 메시야를 고대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고 합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보자 성령의 감동을 받고 바로 인류를 위한 구원자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지금 무슨 의도로 글을 써내려가는 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후세대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어제 우리가 나눈 목자의 성탄에서는 천사들의 입과 예언되었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증명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명하셨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말씀이 증언하고 성령과 성부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메시야라는 것을 지금 확증하려는 것임을 알 수있죠.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를 확고하게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므온은 경건한 유대인으로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해줄 것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성령께서 머무시며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죽기 전에 네가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계시해주십니까?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입니다.

그의 간절함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까지 생명도 연장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심령에 반드시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

너희의 스승을 숨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하는 진지한 마음을 갖는다면 꼭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추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지 않는다기 보다 내가 알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까봐 두려운 것이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더욱 많이 시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원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어쨌든 사이가 가까와지기 위해서는 다가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게 됩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참 인간에게 이해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또 얼마나 이상한 사건이고 대하기 거북한 사실인지 모릅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지 않으시면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전혀 내가 감각할 수없는 동화 속 장면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시므온의 눈이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알아봅니까?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이 무슨 후광이 나고 영특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 눈에 보기에 비범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주 평범하고 진실한 청년으로 자라셨듯이 아기 예수님 역시 순하고 사랑스런 평범한 아기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셔야 그 아기가 바로 인류의 구속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 죄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 십자가가 즐비하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모두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조명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아주 평범해 보이거나 신화속 인물처럼 아리송한 인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아기를 조명하실 때 시므온이 이 아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놀라운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이 아기야 말로 만민을 위해 예비 된 하나님의 구원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실 때 우리는 비로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어느날 홀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명하실 때 우리가 깜짝 놀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이 대개는 왜 나오는지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의 외적 감동이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별로 없이 교회생활을 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별로 남는 것이 없이 다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심령에 성령이 감동하시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분명히 예수님이 나의 속죄자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 때 비로서 내 모든 삶과 내 행위와 마음이 다 죄로 점철되었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나오고 다시는 죄악 된 과거의 삶을 동경하지도 않고 돌아가지도 않게 됩니다.

그때부터 비로서 서서히라도 점점 확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경건한 시므온에게도 성령께서 내주하지는 않으십니다.

그 위에 계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죠.

성령이 성도 안에 영원히 들어오셔서 함께 내주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이 완성된 다음에야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시므온 당시엔 아무리 경건해도 성령께서 인격적으로 내주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외부에서 감동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우리는 성령이 안에 계시지만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계시니 얼마나 대단하냐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우리 위에 머무는 것이 대단합니까?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것이 대단합니까?

신약시대의 성도들만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축복과 영광을 얻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히 대단하고 굉장히 굉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리석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들어와 계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선교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걸어서 이웃마을로 가던 중 갑자기 폭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를 피할 방법이 없는 데 마침 원주민의 움집이 보였습니다.

그쪽으로 달려가니 마침 안에 있던 사람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말할 수 없이 비좁고 옹색한 데다 참을 수없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원주민 움막은 주로 동물의 배설물로 만들기 때문에 축축한 날씨에 더 심한 냄새가 났던 것이죠,

비가 오니 한쪽에선 빗물이 타고 들어오며 분뇨가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내부에는 화로를 피우느라 연기까지 자욱해 눈이 매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냄새에 연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지만 선교사가 호의를 거절하고 나갈 수도 없고 앉아있자니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 때 불현듯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 지금 이 곳이 불편하니?

내가 너의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어떤지 알 것 같니?

선교사님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온갖 죄가 들락거리고 더러운 생각으로 발디딜 틈 없이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게 우리 마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성령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게 어떤지를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가실 수도 없고 앉아 계실수도 없는 견디기 힘든 내 안에 왜 떠나지 않고 계십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죄의 종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라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이시기에 우리를 떠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탄의 아침, 아기 예수로 오셔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한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안전하게 인도하심에 역시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 아기 예수님을 조명해주셔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랑과 나를 위한 십자가의 사역을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시므온의 찬송시를 살펴보면 그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물론 이 말씀은 몸도 노쇠해서 죽어야 되는 데 성령께서 억지로 못죽게 붙들고 있으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동안 메시야를 볼 것이란 약속을 받고 얼마나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두리번 거렸겠습니까?

민중을 휘어잡는 특출난 인물이 나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설레였을 지 모릅니다.

기대와 실망의 긴 시간이 약속을 받은 자들에겐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가 고백하죠.

주재여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사인을 주시고 표적을 주시면 그것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 아주 작지만 참 신기하게 일이 해결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인이고 표적입니다.

지금 우리 삶을 지켜보고 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시시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대단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미비해 보여 이게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이 신뢰감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므온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날 성령의 감동이 시므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으로 가라, 메시야를 만날 것이다.

시므온이 가슴이 뛰며 기쁨과 두려움 속에 달려갈 때 누구를 상상했겠습니까?

랍비의 복장을 한 다윗같이 빼어난 눈빛의 청년이었을지 모릅니다.

로마를 대적할 위용과 지략을 갖춘 명장을 기대했을 지모릅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목격한 것은 누가 봐도 허름한 젊은 부부의 품에 안긴 힘 없는 작은 아기였습니다.

성령께서 정확하게 그 아기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시시하게 보이는 일과 별 도움이 안될 것 같이 전개되는 상황들도 하나님이 보내주신 문제 해결의 실마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보면 그렇게 대단하지가 않더군요.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아주 평범하고 작은 시작과 보통의 일들이 점점 하나님의 일을 창대하게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남들의 일상처럼 평범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일이 다급해도 응답은 다급하게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 장막 너머에서 은밀히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확실해도 그 뜻이 이뤄지기 까지 예외 없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시기 까지 수천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아기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도 30년이나 성인으로 자라시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한시가 바쁜 데 뭘 그렇게 30년씩이나 성장하셔야 했는 지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지정하고 베푸신 모든 법칙과 순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기적적인 인도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일상 속에서 가장 순리적으로 일하시되 기가 막히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소원하는 모든 것도,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영생도 다 기다림이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너무 비범하고 대박나는 것 좋아하실 것 없습니다.

오늘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예언하는 데 막상 부모들의 반응은 어리둥절하지 않습니까?

설마 이 아기가 그런 사람이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가 눈빛이 번뜩이고 부모를 꿰뚫어 보고 그런 신비한 능력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믿음 좋은 동네 청년이었습니다.

아기예수님도 그냥 순한 갓난 아이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성령으로 잉태되는 장면도 너무 신비주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전혀 인지하지 못하듯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생명이 잉태될 때도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잉태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잉태한 뒤 마리아가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냥 평범한 시골 처녀의 모습 그대로 달라진 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믿음의 교제를 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의 뱃 속에서 생명이 움직이는 태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기는 잉태되었지만 비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기는 태어났지만 아무리 봐도 다른 아기와 달라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청년으로 자라는 예수님도 그저 신실한 유대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가족들조차도 나중엔 예수님의 특별난 출생을 잊어버린 듯이 행동을 합니다.

정작 메시야의 사역에 나서셨을 때 미쳤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데리러 왔었잖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 속에서는 자연인으로 조화롭게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은 오히려 비범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평범하고 사랑스런 보통사람 처럼 보입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 하나님이 무슨 나를 위해 일하실까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한 걸음씩 걷는 걸음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시므온은 의미심장한 예언을 덧붙입니다.

이 아기가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세상 가운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께서 이 땅에 멸망당할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건만 사람들은 외면하고 비방합니다.

올해도 시청 앞에 성탄트리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왜 성탄트리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냐는 것입니다.

별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성탄절을 맞아 이땅에 오신 목적은 별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인 것을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나의 모든 죄와 저주와 사망과 우울과 질병과 어두움을 다 십자가에서 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랑스런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힘은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때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찌르듯이 역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함께 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더 고상하고 거룩한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을 믿고 순종할 때 임마누엘하신 주님과 영원히 동행하리라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체험하길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리고 찾는 자에게 확실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서 오늘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경건에 더욱 힘쓰고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은혜받을 방편인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봉사를 기쁘고 꾸준히 행하면 매일이 즐겁고 생활도 안정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살아계신 주님과 인격으로 교제하는 복스러운 은혜가 부어질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