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목자들의 성탄(2013성탄전야예배)

남수연 2013. 12. 30. 12:24

목자들의 성탄(누가2장8절)

올해도 성탄절의 밤을 주나산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성탄절은 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까요?

성탄절에 담긴 아름다운 구원의 메시지가 믿지 않는 분들의 마음에도 따뜻한 무언가를 느껴지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인류를 향한 기쁨의 소식입니다.

오늘은 2천년전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때로 돌아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길 원합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께 빠짐없이 성령의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다보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하필 목자들에게 성탄의 첫 소식을 알렸을까?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알려진 것은 단 두가지 사건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목자들과 또 하나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스라엘 동방에 있는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들이죠.

별을 연구하던 그들은 생소한 별을 발견합니다.

특별한 인물의 탄생을 감지하고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내용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의 기쁜소식이 유일하게 전해진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멀리 이스라엘 너머 모든 나라에 이 구원의 소식이 전해진다는 것이죠.

전 세계가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양치기 목자와 같이 곤고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삶의 비정함과 처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밤의 음습함이 몸에 스며드는 이스라엘 광야에는 칼바람이 붑니다.

몇 마리 안되는 자기 양떼를 돌보느라 밤을 지새야 하는 목자들의 삶에서 인생의 애환을 느끼게 되죠.

포근한 이부자리의 평범한 행복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 목자들의 삶입니다.

유대인들은 황량한 이스라엘 광야에서 목축을 합니다.

척박한 이스라엘 땅엔 집 앞에 푸른 초장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양을 먹이려면 늘 양떼를 이끌고 먹을 만한 풀이 있는 곳으로 멀리까지 순회하며 양을 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의 눈엔 도대체 풀이란 찾아 볼 수가 없고 돌맹이만 굴러다니는 광야에서 목자들이 양을 먹입니다.

목자들의 눈엔 양이 먹을 풀이 보인다고 합니다.

많은 날들을 거친 야영지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 목자들의 고달픈 삶입니다.

지금도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비슷하죠.

배운 것도 없고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재산도 없고,

그래서 부가가치가 없는 1차 산업을 대를 이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타고난 형편이 너무 어려우면 꿈도 갖기가 힘듭니다.

이런 처지에서 현실을 벗어날 가능성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 과연 이 꽉 막힌 현실에서 내가 벗어날 수가 있을까 막막해질 때가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서울시정신건강증진센터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실태조사를 벌였더니 정신적으로 힘들어 도움을 받고 싶다는 비율이 97%였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불안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도 장년도, 노년도 다 각각의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목자들이 추위에 몸을 움추리고 겨우 불려놓은 몇 마리 양떼를 지키는 모습과 우리 모습도 닮은 것 같습니다.

생계가 걸린 직장을 놓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생업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삶이 목자들의 삶에서 느껴집니다.

이런 인생의 한밤중 같은 고난의 시간, 홀연히 천사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제 삶이 칠흙 같을 때 그 때 제게도 예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제 어둠이 밝혀지고 상상도 못했던 다른 삶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전해진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있습니까?

어쩌면 그런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지 오래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 중에 마음이 환해지며 참 살 맛나는 좋은 소식들이 몇 번은 있었습니다.

아이의 합격소식이나 취직이나 승진소식, 월급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던 시절도 참 기쁜 소식들이었죠.

시간이 지나면 큰 기쁨을 주었던 소식도 빛이 바래집니다.

그러나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우리 성도들에게 감동과 은혜와 축복으로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날로 빛이 더해가지 절대 그 가치가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땅의 숨이 끊어질 때 환희에 가득 차 창조주께 돌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바로 우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는 성탄의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2천년 전 천사가 전해준 이 소식은 과연 믿을만한 소식일까요?

우리가 다 증거 없으면 잘 안 믿잖습니까?

천사는 이 기쁜 소식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11절,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자기민족을 구원할 메시야가 올 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줄곧 이야기 해 온 것은 영광스런 메시야왕국이 올 것이라는 것이었죠.

구약성경은 수 천년에 걸쳐 계속 그 메시야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메시야에 대한 중요한 예언 중 하나는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5백년 전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구세주가 다윗의 자손 중에 태어날 것은 무수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백두혈통이 아니라 다윗의 혈통에서 오신 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 역시 친부는 아니지만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는 반드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가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태초에니라

지금 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바로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천사의 계시를 받은 교주가 나선다고 우리가 믿겠습니까?

우리도 다 따져보고 믿을만하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베들레헴에 탄생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셨던 바로 그 분입니다.

천사는 또 하나의 표적을 이야기 합니다.

12절에 보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라고 말씀하죠?

강보에 싸여있는 아이가 무슨 표적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천사나 다른 피조물의 모습이 아닌 아기로 올 것이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예수님탄생 7백년 전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이 이사야 9장6절에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정말 놀라운 예언입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를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 작은 아기의 어깨에 우주적인 구원의 대역사가 얹혀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름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어느 인간에게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까?

그 아기를 지금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아기가 되어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이 오늘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천사가 이렇게 메시야의 탄생의 소식을 알리자 홀연히 천군과 천사가 나타나 장엄한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늘나라 성가대의 찬송이라면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장관이었겠습니까?

누구만 들었을까요?

황량한 벌판에서 양 틈에 누웠던 목자들만 이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들었습니다.

이 천상의 성가대가 단지 비천한 목동들을 위해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격에 맞는 일입니까?

그냥 천사 한명이 나타나 전하고 노래해도 황홀하고 경이로운 일 아닙니까?

천상의 성가대가 동원되어 단지 이 목자 몇 명을 위해 천국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오늘 우리 교회 같은 개척교회에서 성탄행사를 하는 데 싸이가 백댄서들을 대거 데리고 등장했다고나 할까요?

이게 격에 어울리지 않지 않습니까?

만일 싸이가 여기에 성탄행사를 뛰러 왔다면 여기 있는 누구와 혈맹의 관계쯤 되야겠죠.

먹고 사는 게 유일한 관심인 비천한 목자들에게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게 도에 지나친 낭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도 비천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들입니다.

한 영혼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 전해지는 것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는 한 사람이 곧 천하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에서 아버지와 천사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목숨을 주러 오셨는 데 천상의 오케스트라를 동원시키는 게 거기에 비해 무슨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 하늘에서 장엄한 축주가 울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 나 하나를 구하기 위해 독생자의 목숨을 쏟아 붓는 가장 거룩한 낭비를 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의 찬송가의 가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성탄의 사건은 천상의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창조주의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부산에서 화재로 어머니와 세 자녀가 불에 타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엄마가 아기를 보호하려고 아기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불에 탄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에 참 안타까우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깊이 감동되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을 위해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는 그것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영광인 것입니다.

어린 자식들을 다 두고 자기만 살겠다고 뛰쳐나왔다면 경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건지기 위해 죄의 값을 대신 치르려고 영광의 보좌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진짜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워 천사들의 입에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라는 단어는 인간사에서 가장 불가능한 단어 중 하나가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뤄지고 화평이 임할 때 이 땅에도, 우리 심령에도 진정한 평화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성탄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심령과 생애에 영원히 깃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이 천사의 소식을 듣은 목자들은 서둘러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찾아갑니다.

그 곳에는 유대민족의 예상을 벗어난 메시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왕의 후손이었지만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따라와 이스라엘 영내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그 때 동방박사들이 어디로 찾아갑니까?

왕궁으로 찾아갑니다.

당연히 왕의 출생을 알리는 별이니 왕궁에서 누군가 태어났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고 왕이시지만 왕궁이 아닌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심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과 슬픈 자들의 아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의 고통을 온 몸으로 체휼하기 위해 왕궁이 아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0년간 인생의 모든 고생과 저주와 질병과 아픔들을 완전히 체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을 이해하고 의식주의 결핍과 걱정을 낱낱이 이해하십니다.

우리가 다만 큰 환란이 아닌 이런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로 염려하며 기도할 때도 주님의 마음이 긍휼로 움직이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증언했던 구주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게 되는 것은 권능과 위엄을 볼 때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아기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속죄하신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진정한 경배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이 모든 사실을 보고 깨달은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기 예수님 곁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힘든 내 사업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쁨이 가득찬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내게 주신 나의 지경을 비추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제의 그 목자들이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과 밤을 새워 일해야 하는 광야가 신기하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성도들은 오히려 고난 중에 빛을 발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름답게 드러냅니다.

2천년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우리가 왜 이 밤에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를 위해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바로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의 보좌를 떠나 가난한 말구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께 진심으로 경배할 때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소망이 칠흑같은 어둠의 인생을 비춰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나 행복한 양치기가 된 목자들 처럼 하나님이 사랑의 증거인 예수님을 깊이 깨닫고 찬송하며 돌아가 영원히 행복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