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상 차리고 설거지만 하다 오신 집사님들은 오늘 본문 읽으시며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바쁜 언니를 도와줄 생각도 않고 예수님 곁에서 말씀의 호사를 누리는 동생이 좀 얄밉다는 생각이 드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의 섭섭함에 오히려 예수님은 마리아편이 좋다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은 각 교회의 마르다회 여성도들에게 불만스러운 내용일 것 같습니다.
이런 본문은 설교하기도 좀 난처합니다.
말씀에 너무 은혜를 받고 봉사 그만하고 성경공부만 하겠다고 하실까봐 걱정입니다.
오늘 말씀은 봉사와 섬김을 소홀히 평가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교회가 잘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손이 필요합니까?
자기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며 수고하는 분들을 통해 교회가 안정되게 세워져가는 것이죠.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당연히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르다가 옳으냐 마리아가 옳으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봉사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본문입니다.
우리 봉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에게도 축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통해 지금도 힘써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더욱 귀하고 복된 헌신을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한 마르다의 가정에 대해서 먼저 살펴봅니다.
오늘 말씀이 단지 한 가정에서 귀한 손님을 접대하다 생긴 갈등이라고 보기에는 이 가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38절에 보면 예수님 일행이 길을 가시다 한 마을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다른 성경을 종합해서 보면 이곳은 베다니라는 마을이었고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마르다의 가족인 동생 마리아와 남자 형제인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마르다의 가정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짐작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사역 중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적이 다섯 번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인근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가족에 관련 된 특별난 이야기들이 요한복음에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다시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종교지도자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베다니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때 마리아가 일 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버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이렇게 자주 사건의 무대가 된 가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중 있는 큰 사건들이 한 가정에 이렇게 집중 된 적도 없습니다.
분명히 이 가족이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 이 마르다의 가족들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하신 사랑이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요한복음에 나사로가 병으로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얼마나 친밀한 표현입니까?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리고 마르다 자신의 입으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해 하는 가족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예수님이 당시 가난과 무지와 절망스런 환경에 시달리던 자기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 가족에 대해서는 특히 각별한 사랑을 성경 여기저기에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마르다와 나사로와 마리아는 사랑하는 자요, 친구요, 가족과 같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그렇게 따뜻한 환대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유대 지도층의 강력한 반발과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이래봤자 병고치고 귀신 쫒아달라고 몰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주님의 사역에 인간적인 정을 나눌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 여유가 없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중 마르다의 가족이야말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모셔 들였던 따뜻한 가족과 같은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세상에서 환대받지 못하십니다.
마르다의 가족처럼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은 성도들과 교회일 뿐입니다.
마르다의 가족은 예수님을 사랑하며 환대하고 섬기는 믿음의 가족,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가족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밀한 사랑의 표현도 지금 우리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 가족과 따뜻한 사랑의 교감을 나누셨던 것처럼 지금도 이런 포근한 감정으로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가족들의 아픔을 주님께서도 똑같이 느끼고 눈물을 흘리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 세상 누구보다 나를 염려해주시고 어떤 일에도 나를 공감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마음이 다치고 삶에 지친 모두를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사랑처럼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고 우리 가정을 그렇게 돌보신다는 것을 이런데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진실하신 인격자이니까요.
마르다 가족들에 일어난 사건도 보면 단지 한 가족에게 일어날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약속하시는 증표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부활 선언을 하시잖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마리아의 향유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의 섬김도 함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어떻게 섬겨야할지 마리아가 먼저 본을 보였다는 것이죠.
그러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며 마르다와 마리아의 섬김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르다의 봉사를 통해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르다의 봉사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고쳐야 할 것이 분명히 있었음을 전제로 하고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마르다는 예루살렘 인근지역을 순회하시며 사역하시던 예수님 일행이 마을로 들어오셨을 때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모셔 들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봉사입니다.
항상 몰려드는 병자와 무리들 틈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기 일쑤였던 예수님을 잘 좀 대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집 밥을 맛있게 지어드리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도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집에서 밥 먹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친한 사이는 밥 먹는 사이이고 더 친하면 집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친하다고 하면서 아직 한번도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없다면 그건 친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매주 교회 밥을 같이 먹는 게 얼마나 더 친밀하고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밥 한번 먹으려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르다는 시장하실 예수님을 위해 여러가지 음식을 잘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마리아가 도와줄 생각을 안 하고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혼자 일하는 사람 충분히 화가 날 수도 있는 일이죠.
결국 참다 못한 마르다가 기분이 상해 불평을 터뜨리게 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서 이렇게 볼멘 소리를 낸 것이죠.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 부분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저를 혼자서 시중들도록 내 버려둔 것이 당신께 걱정되지 않습니까?
분명히 기쁨으로 봉사를 시작했을텐 데 이 말 속에는 어느새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한편 주님에 대해 오해가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노는 데 나만 혼자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힘들여 수고하는 나를 걱정도 않으시고 모른체 하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사람 저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더니 그 다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도 명령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지만 이런 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 시작했지만 결국은 내가 모든 일에 주관자가 되고 나중엔 하나님보다 봉사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예수님도 이용하고 다른 사람도 다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르다는 인간적으로 정말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의 본성을 만만하게 보시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과 동기가 한 순간에 내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변질되기가 너무 쉽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나 조직을 중심으로 봉사를 하다보면 남는 것은 실망이고 배신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모인데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결국 봉사하다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떠나면서 그동안 냈던 십일조, 기부금 반환 소송하잖아요?
하나님께 드린 게 아니고 그 단체나 사람에게 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게 진정한 봉사가 되고 우리에게도 안전하고 축복이 되는 봉사입니다.
내 힘으로 뭐든 하려다보면 나와 다른 사람이 다 상처받고 시험이 들기가 쉬운 것이 봉사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마르다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격앙된 마르다를 달래시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자상한 마음이 너무나 잘 느껴지지 않습니까?
분명히 마르다의 봉사가 헛점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왜 모르셨겠어요?
그러나 죄인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는 것을 주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의 일이라고 열심히 하다 상처받고 기분이 상한 우리의 감정까지 다 헤아리신다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다 해도 일단 예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잘못 된 것에 대한 바른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41절입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말씀을 나누면서도 마르다가 지금 지나치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들이 너무 많고 번잡하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도 간추릴 수 있으면 간단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쓸데없는 많은 일들 때문에 염려가 많고 근심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번잡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사람이 괜히 머리를 복잡하게 쓰고 문제를 만들고 확대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그렇게 염려하고 근심해야 되도록 일을 만들어 놓지 않으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염려하고 근심하며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염려와 근심이 있는 문제에는 다 내가 주인이 되어있고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상황을 무한한 능력으로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벌써 망각했다는 것이죠.
어느 새 내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멋지게 성취해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렇게 복잡해지고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다의 마음엔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솜씨를 내 상을 차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 마르다는 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에서만은 항상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잖습니까?
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으니 마리아와 예수님을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재능과 형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상을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저도 설교를 잘하고 싶고 성가대와 찬양팀은 찬양을 더 잘하고 싶을 것입니다.
봉사와 기도도 잘하고 싶고, 주방당번이 되면 국도 맛있게 끓이고 싶은 게 당연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봉사하다 마음을 다치고 섭섭한 마음이 들고,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좀 부족해도 내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다면 되는 것이지 내가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은 자꾸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생활도 봉사도 항상 즐겁게 할 수 있고 오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봉사도 충분히 기뻐하시고 부족한 재능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의 봉사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욥기 41장11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어차피 우리가 드리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고 하나님이 주신 건강이고, 하나님이 주신 명석한 두뇌이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우리 마음에도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찬양으로 봉사로 예배로 섬기며 기쁨이 충만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즐거이 받으신다는 증표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섬김을 꼭 기억하시고 좋은 것들로 우리 삶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바른 봉사와 헌신이 귀한 것은 주님이 기억하고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주기철목사님의 후손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충성되게 섬기는 성도들의 자손을 어떻게 축복하시는 지 살아있는 교과서입니다.
주기철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오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때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심방하고 위로하고 기도하신 분이 오정모사모님이십니다.
가족이 굶주리고 핍절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사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처음 화폐를 찍어냈을 때인 데 공산당원들이 붉은 인민화폐를 한 보자기 싸고 선물을 한아름 들고 집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주기철목사님의 항일 순국정신을 정치에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사모님이 어디서 힘이 나셨는 지 일어나서 선물과 돈 다발을 다 마당에 내동댕이 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순교를 공산당 정권을 위한 항일운동이라니 말도 안되는 것이죠.
옆에서 그걸 보던 배고픈 아들이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그런 어머니께 볼멘 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어머님이 너에게는 줄 것이 있다.
시편 37장25절의 말씀을 찾아 읽어보아라 하셨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때는 몰랐는데 만일 김일성화폐 받고 거기 눌러 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 아들이 무일푼으로 남쪽으로 넘어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결국 그 아들 주광0장로님이 극동기업사장으로 큰 돈을 벌고 극동방송을 지원하는 큰 일을 했습니다.
그 손주들이 다 목사 되고 교수되고 잘 풀리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이 간증을 주기철목사님의 손주이신 주승0목사님께 들었습니다.
장신대교수였다 지금은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자신은 너무나 쉽게 선조들의 헌신의 열매를 따먹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런 큰 헌신이나 봉사가 아니라 해도 지금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정성껏 작은 일에 충성하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축복하시고 우리 자식들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인간적인 생각으로 봉사하다 시험 들고 지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오직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이 보호자 되심을 믿고 끝까지 충성된 마음으로 따르고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음은 마리아의 봉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주님 발 아래 앉아 제자가 되어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본문에서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봉사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리아의 섬김은 요한복음에 가서 나타납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심령이 소생하고 영안이 열리며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그 영혼을 만족스럽게 해주셨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거실에 모셔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녁밥을 짓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시겠습니까?
물론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 주님께 대접하고 싶겠죠.
그러나 예수님이 집에 오셨다면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고 주님의 인격과 사랑을 좀 느껴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염치불구하고 상차림이 좀 늦어도 천국에 대해 물어보고 영생에 대해 물어보고 싶지 않겠습니가?
하나님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심판과 지옥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좀 듣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찾아오시고 우리 가정을 방문하실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에 대해 내게 들어라.’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에 대해 듣고 깨달아라.’
‘의와 심판과 천국에 대해 먼저 내게 와서 들어라.’
예수님께는 마르다가 입으로 불평했던 것처럼 시중들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는 시중들 천사들이 넘쳐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이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죄를 속죄하셨다는 확신이 없고, 내가 하나님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하는 모든 봉사와 수고가 헛헛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말씀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듣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음식 장만 하느라고 구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저런 봉사로 뛰어다니는 분들이 정작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영혼을 담그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이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내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 미래에 대한 소망도 말씀을 통해 깨달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능력으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선되지 않으면 곧 봉사도 교회생활도 원동력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깨닫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진정한 봉사와 헌신이 요한복음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은 마리아가 어떻게 했는지를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꼭 함께 증거하라고 하신 그 사건, 이 마리아가 이천만원 상당의 나드향유를 주님 발에 아낌없이 부은 일입니다.
가룟유다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비싼 것을 그렇게 낭비하다니, 팔아서 좋은 일에 써야지.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냥 두어라, 마리아가 내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기에 십자가에 죽으실 날을 엿새 남겨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발아래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 단 한 사람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현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바로 자기의 죄를 속죄하고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리를 듣고 깨달을 때, 마리아는 주저 없이 백퍼센트 헌신합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 가장 좋은 것을 드려서 진짜 헌신과 봉사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깨달아야 헌신이 아깝지 않습니다.
봉사가 영광이라는 것을 알고 받은 은혜가 거기에 비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마르다의 헌신과 마리아의 헌신이 다른 점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마르다는 그 날 그 잔치에서 여전히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고 요한사도는 기록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경청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를 먼저 갈망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예배와 말씀묵상과 기도가 우리 삶에서 최우선이 되는 것이 예수님이 오늘 마리아를 칭찬하신 좋은 선택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두시길 축복드립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진정한 봉사와 헌신을 드리는 축복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년2월2일 주일예배설교 남수연목사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누가복음22장54절-62절) (0) | 2014.04.11 |
---|---|
엠마오로 가는 길 (누가복음24장13절-35절) (0) | 2014.03.18 |
시므온의 찬송(2013성탄절 설교) (0) | 2013.12.30 |
목자들의 성탄(2013성탄전야예배) (0) | 2013.12.30 |
어리석은 부자(누가복음12장13절-24절-수련회 첫째 날)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