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정을 주셔서 힘든 세상에서 기쁨과 위로를 나누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평생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고 끝까지 우리 편이 되주실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님들을 건강과 부귀로 축복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한 초등학교에서 어버이날을 맞아 집에서 어머니가 하는 일을 적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밥을 해줘요.
엄마는 청소를 해요. 빨래를 해주세요.
숙제를 도와줘요.
아이들이 다투어 자기가 적은 것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그럼, 엄마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은 무엇이죠?
자기가 적은 것들 중에 엄마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 아이들이 잠시 후 훌쩍 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오직 가족을 위해 일하시는 엄마 생각에 모두 울음을 터뜨린 어버이날이었다고 합니다.
최근 소설가 박범신씨가 신문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소금’이라는 책을 냈죠.평생을 염전에서 일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던 아버지가 한 낮에 소금을 거두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십니다.
아버지의 사인은 염분 부족입니다.
그날 자식의 대학졸업식에 가기위해 너무 많은 땀을 흘렸던 것이죠.
소금밭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소금기 부족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희생 속에서 오늘 우리가 있게 된 것이죠.
지난 번 농구선수 서장훈씨가 은퇴식을 하던 중 아버지 얘기를 하다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들의 은퇴식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그 자리에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아픔을 우리보다 더 진하게 느끼시는 우리의 부모님들, 우리 뒤에 이런 부모님의 사랑이 있어 힘든 인생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죠.
또 우리 자녀들에게도 우리가 이런 울타리가 되 줄 수 있도록 모두가 믿음으로 강건해 지시길 축복드립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오늘은 우리의 가정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가정은 분명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제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정들이 정말 복되고 평안합니까?
세상의 비바람을 가려줘야 할 가정이 역기능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솔직히 어린시절 가정에서 상처를 받지 않고 자라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어른이 되어 내 가정을 꾸렸는데 또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하니 인생이 참 못된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간의 갈등뿐 아니라 시월드, 처월드하며 시가와 처가로부터 받는 시련이 또 혹독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고백에 따르면 목회가 힘들 때도 가정이 사랑으로 뭉쳤을 땐 그래도 이겨낼 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큰 문제가 닥쳤을 때 목회마저 접으려고 했던 심각한 위기가 왔었다고 합니다.
집안이 불화하고 가족관계에 어려움이 있으면 세상을 헤쳐 나갈 힘과 의욕이 다 상실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 인물들의 가정사에도 한숨과 눈물과 죄가 얼룩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정 된 가정이 왜 이런 고통의 산실로 바뀌었습니까?
가정의 파괴는 어이없이도 가장 아름다웠던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정으로 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범죄하는 순간 선하던 인간의 본성은 순식간에 뒤틀리고 즉시 악을 창출하기 시작합니다.
신뢰했던 부부 관계가 깨지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헐뜯으며 시작 된 가정의 파괴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간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사에서 완전한 가정의 행복을 기대한다는 게 환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내면의 죄성이 해결되지 않는 한 가정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죄의 법에서 벗어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새 마음을 받은 우리에게 가정을 가꾸고 풀어나갈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정의 문제들을 이제 못 푸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꼬인 가정의 관계들을 풀지 않으려할 수는 있겠죠.
저는 가정문제 전문가가 아니라 가정에 대한 비법을 드리진 못합니다.
사실 전문가 말 들어봐도 별 시원한 방법도 없더군요.
우리가 건강하고 복된 가정을 가꾸기 위해서는 가정을 처음 제정하신 하나님께 배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제정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들 살아보셔서 알지 않습니까?
내 생각과 계획대로 해봤지만 잘 안됐습니다.
우리에게 가정은 끝까지 지켜야 할 유일한 안식처이고 하나님이 가장이 되신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가정은 이 땅에 우리가 거하는 동안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도 가정이 있었던 것을 보면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정사는 어떠셨을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33년을 사셨는 데 그 중 마지막 3년이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공적인 생애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년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셨을지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적과 능력을 보면 그 전에도 뭔가 비범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죠.
새 대통령이 당선되면 당선인의 과거의 삶을 미리 취재했다 보여주지 않습니까?
박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도 옛날 청와대 시절을 보여주더군요.
어린 여대생이 어머니 대신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던 의젓한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박대통령이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이 승천하신 뒤 주님의 행적을 기록할 필요를 느꼈을 때 당연히 공생애 이전 시절부터 훑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 역시 주님의 30세 이전 모습을 추적했던 것이죠.
아마 당시 생존해 있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이 12세 때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였습니다.
예수님의 30년이 정말 평범한 나사렛의 젊은 목수의 삶이었다는 것이죠.
제 인생 50 중반을 돌이켜보니 별로 내세울만한 일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도 내놓을 만한 다른 비범한 삶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역을 위해 특출나게 준비한 건 사촌이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으며 세속과 일찍이 구별 된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요?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저가 마리아의 아들 목수 요셉이 아니냐?
유대인들이 불신하며 던진 말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목수이며 경건했던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 평생을 마을에 묻혀서 사셨던 것입니다.
공생애 3년을 위해 하나님이 30년을 낭비한 것일까요?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30년을 생각해보면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도 30년을 기다리셨다.’
지금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분들 힘 내십시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이 자연세계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30년을 천천히 다 음미하며 사셨을 만큼 이 땅의 삶은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이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투닥 거리며 살아가게 하신 이 평범한 우리 인생이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 예수님의 가정을 오늘 살펴보며 이런 소중한 우리 가정에 힘을 공급하고 더욱 굳건하게 세우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부어주시길 축복드립니다.
먼저 예수님의 유년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본문의 내용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점점 자라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고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모든 아이들처럼 점점 자라났고 강해져 갔습니다.
어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이렇게 지혜롭게 자라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린 예수님의 비범한 지혜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죠.
열 두 살 때 이미 율법사들과 토론할 만큼 통찰력과 식견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41절에 보면 12살 예수님이 처음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셨다고 합니다.
주님의 유년기 중 유독 이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유월절과 예수님의 관계성을 밝혀주는 복선을 까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너무나 중요하니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꼭 지켜야 할 큰 명절을 직접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3대 명절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해 주실 때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을 내보내주지 않는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음의 심판을 받은 뒤 그제사 이스라엘은 자유민이 되었었죠.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죄인들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할 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 식구대로 어린 양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대문에 발라서 표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온 이집트를 심판할 때 그 양의 피가 있는 집은 뛰어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의 죄가 한 속죄양을 통해 씻겨지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사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표의 사건입니다.
그 유월절이 처음 시작되고 1500년이 지난 지금 이 예표의 실제 인물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 채 해마다 어린 양을 잡았던 것이죠.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 시작부터 전부 다 이 인류의 구속자인 예수님을 제시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나머지 명절도 똑같이 그런 의미가 있는 날들입니다.
첫 열매를 수확하는 오순절 절기에 성령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장절은 모든 추수를 끝낸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영혼을 다 모으신 뒤 재림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12살 나이에 이미 십자가의 대속을 인식하고 있었을 어린 예수님이 정말 연약한 유월절 어린 양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린 예수님이 당돌한 일을 벌이십니다.
유월절 절기가 다 끝나고 가족과 친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아이 예수님께서 일행 중에서 빠져 혼자 예루살렘 성전에서 머물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시골뜨기가 혼자 서울에 떨어진 셈이니 부모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오던 길을 되짚어 예수님을 찾으러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모의 책망에 예수님께서 엉뚱한 답변을 하십니다.
49절에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반문하십니다.
어린 예수님께서 최초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성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50절에 그 부모가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그 뜻을 도대체 왜 이해 못합니까?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 된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부모가 그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그 누구도 구약에서 예언되어 왔던 메시야의 진짜 정체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저 민족을 구할 다윗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예수님의 출생이 특별한 것이지만 성경에는 특별한 출생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촌인 세례요한 역시 생산능력이 다 끊어진 노년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죠. 아브라함 역시 임신가능한 시기가 완전히 지난 백세에 이삭을 낳지 않았습니까?
부모조차도 예수님이 이들처럼 단지 특별한 출생으로 태어났을 뿐이고 장차 유대민족을 구할 인간 메시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생들도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차라리 독립운동을 하고 다니면 좋으련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며 마찰을 빚는 큰 형님이 창피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3장 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 일러라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비춰주지 않으시면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이게 기적이요 구원 받은 증거입니다.
인간의 이해의 한계는 당시 추종자들도 그랬듯이 덕망 있고 비상한 선지자 정도가 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매일 눈이 휘둥그레지며 번번히 놀라서 수런거리지 않습니까?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저가 뉘기에!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다음이고 더 정확하게는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신 다음입니다.
그제사 예수님의 아우들도 제자들 무리에 합류하게 됩니다.
성경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한 야고보와 유다가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나중에 모두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51절은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서 순종하며 받드시더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섬기기 위해 순종하며 받들었다는 게 참 신비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시작 전까지 예수님의 모든 삶이 단 한 줄로 기록됩니다.
52절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의 평범했던 일생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했고 사람들을 진실 되게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 전부였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도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서로를 사랑하며 산다면 가장 복된 인생 아니겠습니까?
이런 선하고 진실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이뤄지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예수님 가정을 통해 우리 가정에 복이 될 말씀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째는 마리아와 요셉의 신앙입니다.
41절에 보면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유월절은 예루살렘에서만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16장2절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그들이 어느 곳에 거주하든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유월절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죠.
목수인 요셉의 가정은 필시 넉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행경비와 유월절 양을 마련해서 해마다 절기예배에 참석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율법에 따라 아들이 12살이 되었을 때 첫 유월절 예배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데 헌신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정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가장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복을 주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가정에 밀려오는 온갖 시련과 풍파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온 가족의 신실한 믿음뿐입니다.
세상에서 의지하는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붙잡을 게 없었을 때 우리가 무엇을 의지해서 그 환란을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까?
우리 자녀들도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붙잡고 일생을 걸어갈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가족의 구원이 가정을 위한 기도제목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 중 아직 예수님의 보호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있을 때 마귀의 집요한 방해와 나쁜 영향력이 가정을 계속 어지럽게 합니다.
우리 모든 가족들이 다 하나님의 축복의 자녀들이 되고 어둠의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는 견고한 요새와 같은 가정을 이루시길 축복드립니다.
본문에서 또 마리아와 요셉이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출애굽기23장17절을 보면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시켜야 할 대상은 남자면 된다는 것이죠.
여자들은 집에서 자녀들을 돌봐야 할 것이 고려되었고 가장들을 그 집안의 대표로 삼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41절을 보면 마리아가 해마다 유월절 행사에 요셉과 동행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평소 부부사이가 요즘 말로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고대 가부장적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내 자존감이 상처받는 게 가장 괴롭습니다.
그게 남편이고 아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가정에서의 황금률은 어느 누구건 이렇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고 자녀라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 보이는 인간도 참 신비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마치 우주 전체인 것처럼 그 세계가 심오하다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내가 우주의 주인공인 것 같지 않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희미한 잔재입니다.
남에겐 그렇게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가정에서라도 서로를 그렇게 인정해 줄 때 우리가 자신감을 갖게 되고 가정은 든든하며 화평하게 됩니다.
부모가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고 함께 가정을 위해 수고하는 모습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부모가 매일 싸우는 집만큼 자식들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하는 게 더 있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큰 싸움을 하고 나면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온 느낌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부부도 다들 각박한 현실 속에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일에 지치고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 때가 사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서로에게 신뢰받고 존경받지 못할 때 부부를 연결시켜 줄 끈은 없습니다.
부부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잖습니까?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남녀가 서로를 볼 때 도파민이란 호르몬이 분수처럼 분비되어 뇌가 격렬한 에너지와 흥분을 생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활력이 넘치고 기쁨이 최고가 되고 웃음이 많아지고 행복에 도취된다는 것이죠.
마약중독과 아주 유사하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분수처럼 뿜어지는 도파민의 유효기간은 30개월이라고 합니다.
왜 남친이랑 3년을 못 넘기게 되는 지 아시겠죠?
이 30개월 안에 성숙한 사랑의 관계로 진행되지 않으면 사랑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부부관계가 이 유효기간 30개월인 도파민의 분출만 의지해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도파민이 사라진 채 평생을 유지해야 하는 가정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없죠.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인 데, 남편과 아내가 각각 인터넷 채팅으로 서로인지 모르고 만나다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느 날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로 둘이 나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으로 평생 부부에게 충실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하고, 나를 의지하고 기대려는 가족들의 마음을 좀 너그럽게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힘을 주셔서 가족을 이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길 매일 기도하길 원합니다.
청년들에게 권하는 데 장차 배우자가 나만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많이 기도해두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셔서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우리 오래 된 부부들도 이렇게 기도할 때 놀라운 기도응답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둘째는 예수님에게서 부모에 대한 공경과 가정을 위한 헌신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가정에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경건한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동생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여동생들. 적어도 여섯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며 가장의 역할을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최선을 다해 부모를 사랑과 공경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처럼 모셔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우리를 위해 일생을 수고하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15세부터 24세까지의 청소년 통계를 보면 자식이 부모를 돌봐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3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위해 내 인생을 다 희생하고 키웠으니 자식들이 알아주겠지 하는 부모들 생각과 요즘 자녀들 생각이 이젠 이렇게 다릅니다.
오히려 노인을 학대하는 가해자 중 42%가 다름 아닌 자식이라고 하니 큰일 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예 부모공경을 계명으로 꽉 박아놓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때 하나님께서 부모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좋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써 부모님의 마음을 편히 해드릴 때 우리 마음에도 성령께서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가족은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모두가 짐을 나눠지고 의무감을 갖고 헌신해야 합니다.
자녀들도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노고를 알아야하고 성장하며 그 짐을 나눠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의 경우 하루에 가정을 돌보는 시간은 평균 4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의 경우 60분 정도라고 합니다.
부부도 상대방의 피곤한 짐이 과하다면 서로 나눠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구성원 모두 자기의 의무를 잘 수행해가도록 지도하고 서로를 격려해줘야 할 줄 믿습니다.
리차드 벡스터목사는 말했습니다.
‘만일 가정을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통해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무거운 짐을 기쁨으로 감당하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예수님은 상상이 안가죠.
나무에 대패질을 하고 뽀얀 먼지로 가득 찬 헛간에서 열심히 가구를 짜고 집기들을 만지시는 주님의 눈은 진지하게 재미를 느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별 재미없는 직장 일과 집안 일에 이런 흥미진진함이 생기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머니는 저녁거리를 장만하고 형제들은 기름기 없는 소박한 밥상을 함께 나누었겠죠.
그러고 나면 예수님 수중엔 비상금 한 푼이 없었고 로마당국에 내야 하는 세금 반 세겔이 없었던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필 그렇게 가난하고 낮은 신분을 택해서 내려오셨는지를 생각하면 참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난한 삶을 통해 느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진심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만 보여 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무소유의 법0스님에게 항변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세로 일년에 수 개월씩 휴양지로 여행을 다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비행기타고 네팔 산자락으로 날라가 머리를 식히며 수행하는 삶이 무소유냐는 것이죠.
평생 해외여행 한 번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무소유를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일생은 우리에게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누추한 곳까지 함께 하는 것이죠.
우리의 초라한 가정과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사는 가난한 마음에 주님은 기꺼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착취당하던 식민으로 대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아시고 내일 필요한 것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불안함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리고 매일 생활이 걱정되고 내일이 염려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가정의 날을 맞아 우리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좀 살펴보았습니다.
또 가정을 바로 세울 하나님의 원리를 나누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단 칼에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알고 그 방향을 정해 꾸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눈물을 아시는 예수님께 날마다 우리 마음을 쏟아놓으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꾸 짐을 어깨에 얹지 마시고 날마다 우리 짐을 대신지고 맡아주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고 화창하고 유쾌한 하루 하루를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5.12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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