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7장1절-10절)

남수연 2013. 1. 16. 16:40

오늘 본문은 예수님도 놀라셨던 한 로마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한 로마 장교의 믿음에 예수님께서 경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우리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길 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이 사건이 단지 개인의 구원과 치유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장차 복음이 이스라엘을 떠나 세계의 모든 나라로 퍼져갈 것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통계사무국에 따르면 현재 이스라엘의 기독교인구는 전체의 2%라고 합니다.

왜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떠나 우리들에게 전파가 되었는지 그 비밀이 오늘 본문에 등장한 유대인장로들과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개인의 구원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구원의 이치를 담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본문을 간단히 훑어보면 이렇습니다. 1절에 예수님께서 평지수훈을 마치시고 막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수천의 군중들이 예수님 사역에 몰려들었기에 대개는 들판이나 야산이나 해변가에서 설교를 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아직도 무리들이 다 흩어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가버나움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로마의 한 장교가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 죽게 된 자기의 종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백부장과 유대인장로들의 믿음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등장합니다.

오늘은 이 둘을 대조해 보며 구원받을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은혜 안에서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아야하지만 한편 항상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구원받을 자리에 굳건히 서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먼저 본문을 좀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이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의 장교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위 정도 되겠지만 당시 로마 백부장은 그 이상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 사역의 거점 지역이었기 때문에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아주 귀하게 여기는 종이 있었는 데 병들어 막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이 인간적으로도 꽤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와서 간곡하게 청원하고 모셔가야지 얼핏 보면 좀 무례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서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나와 있죠.

종은 사경을 넘나들어 데려올 수 없었고 자신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설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의 장로들을 중재자로 대신 보냈던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그가 생각했던 대로 백부장 자신은 예수님 앞에 나설 자격이 없는 자이고 유대인 장로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을까요?

 

먼저 유대인 장로들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님께 나와 간절히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하죠.

장로라면 꽤 나이도 있고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인데 젊은 선지자 앞에 나와 간청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5절에서 드러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얼핏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죠.

그러나 그들의 관점이 결코 하나님이 아닌 우리 유대민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인 자기들이 예수님의 혜택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 편이 된 백부장도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유대민족이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온 민족 중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명시한 법 조항입니다.

지금도 십계명은 물론이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죄입니다.

십계명을 받지 않은 모든 민족들은 죄가 무엇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하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받지 않은 종족들은 자기들이 만든 우상신과 귀신을 섬기는 걸 절대 죄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저도 십계명을 알지 못할 때 고사상 앞에서 귀신에게 절을 했습니다.

살인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모르는 고대 부족들은 원하는 대로 죽이고 갈취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만물과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사실 죄인들로서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 계명을 진지하게 지키려한다면 결국 인간의 죄성으로 결코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못 지킵니다.

하루 종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죄를 세어보면 수십가지는 되는 데 어떻게 그걸 온전히 계명을 지키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지은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동물 제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도를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절대 지킬 수 없는 한계를 깨달으며 영원히 죄를 속죄할 대속자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와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장차 오실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로서 내가 과거에 하던 일들이 심판을 받을 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애써 지키려고 해도 여전히 죄가 좋고 저항할 수 없이 죄 아래 팔려가는 죄의 본성을 보며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외형만을 지키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신앙의 행동들을 따라 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 장로들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왕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고 자신이 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속죄할 메시야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유대장로들은 이런 율법주의 유대인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믿으십니까?

바로 이 믿음이 자기의 수치스런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차마 나오지 못한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예수님은 주님 앞에 나온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실 때 정말 기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단지 그걸 위해 십자가에 스스로 못박히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 믿음이 모두 백부장과 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원받을 믿음인 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놀라게 했던 백부장의 믿음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장로들의 말에서 먼저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민족을 사랑했고 유대인의 집회장소인 회당도 지었다고 하죠.

백부장이 왜 피지배민족인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그들의 종교를 위해 사재를 털어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했겠습니까?

그가 유대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자기 돈을 들여 교회를 지어 바친다면 하나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이 성도들도 섬기는 것이고 교회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교회를 보면 반갑고 교회 십자가만 보아도 왠지 마음에 기쁨이 솟고 뿌듯해지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기 교회가 아닐지라도 어느 교회든 들어갈 때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사람이 어디서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차마 예수님께 나오지도 못한 백부장에게는 유대인 장로들에겐 없었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셨지 않습니까?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구원받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에서도 자신의 죄에 대한 부끄러운 처지와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이 말씀들에서 백부장이 얼마나 예수님을 대면하는 것에 경외심을 느끼고 쩔쩔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장로들을 보내 예수님을 청하긴 했지만 오시는 걸 기다리는 동안도 좌불안석하다 결국 또 다른 유대인 친구들을 보냅니다.

예수님이 누추한 집에 오시는 것도 과분해서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결벽증도 아니고 좀 지나치다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옛날엔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다녔던 것을 기억하시죠?

집도 누추하고 대접할 것도 없는 데 가정방문 오시던 날 정말 도망치고 싶었던 생각이 납니다.

담임선생님 오신다고 가게에서 귀한 사이다를 한 병 사다가 대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먹을 게 귀했던 시골에선 찬 우물물에 설탕을 타서 내놓기도 했죠.

귀한 분을 모실수록 얼마나 집이 누추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백부장이 얼마나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생각했는지가 오늘 본문에서 절절이 느껴집니다.

일년 치 봉급을 털어야 살 수 있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에 부었던 마리아의 마음이 백부장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 마음에 우주의 주권자이신 광대하신 절대자에 대한 두렵고 떨림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런 하나님의 광휘와 영광을 우리 심령에 그대로 느끼게 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예배하러 나오는 우리 마음이 겸비하여 마음에 무릎을 꿇고 나오는 경외심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축복받는 믿음입니다.

주일예배 전에 지금도 목욕을 하고 나오시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아버지를 예배하겠다는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수록 하나님은 경외할 분이시고 우리는 더러운 옷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믿음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이 7절과 8절에 나타납니다.

군인인 자신의 경험으로 상관의 명령이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만물은 창조주 앞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병이건 사람이건 환경이건 모든 피조물이 주님께 복종하니 수고롭게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해주시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이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주님의 실체에 대해 확신이 부족한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사건이 예수님이 나인성에 들어가셔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이 기상천외한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고 모두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도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본장의 16절에 보면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그래도 여전히 주님을 큰 선지자로 여겼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고대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직접 오실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로마의 압박에서 건져내고 다윗왕 때의 부귀와 번영을 이루어줄 새 지도자를 대망했던 것이죠.

사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삼십년을 사시다 가셨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일이고 얼마나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백부장이 오늘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지했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도 본문 다음인 9장에 가서야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이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인간이 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지만 어느 육체도 자기의 지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라는 것은 스스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전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들었을 때 오직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 성령께서 알게 하실 때 그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내 생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머리를 열어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게 된 것 조차도 우리 의지로 결정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감동해 주셨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도 그가 경외했던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고 성령께서 감동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토록 놀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삼천년 역사동안 하나님이 가르치고 보살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의 역사와 메시야를 배척하는 데 이방인들이 순수하게 복음을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선입견과 편견과 하찮은 정보와 얕은 경험을 고집스럽게 신봉합니까?

그래서 처음에 잘못된 습관이 배어있는 것을 고치는 게 더 어렵습니다.

운동도 그래서 어렸을 때 코치에게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폼이 만들어지면 골프나 수영 같은 것도 나중에 더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모차르트가 문하생을 받을 때 다른 데서 음악훈련을 받은 사람에겐 레슨비를 두 배로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죠.

때로 잘못 배운 성경과 막연한 신앙 지식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배우고 깨닫는 것을 꽉 막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자기 식으로 유권해석한 전통을 만들고 정작 신앙의 주체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배우지 않으면 오늘날도 얼마든지 잘못 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이방인의 바른 믿음을 보며 예수님께서 기독교의 구원이 완악한 유대인을 떠나 세계의 모든 열방으로 넘어갈 것을 예언하십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8장에는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바로 우리가 동서로부터 주님 앞에 나와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때 회개하지 않은 유태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천국 바깥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을 믿음을 점검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마음으로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못하는 연약한 우리의 죄성을 깊이 자각하고 예수님의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모든 피조물과 환경과 질병을 다스리실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날마다 확증하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믿음의 기쁨과 능력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백부장의 기도응답의 측면에서 교훈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갑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은 아직 모든 것을 해결하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깨달음과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응답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의 청을 받자마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구하는 문제에 대해 주님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내가 해결해 주리라

오늘 백부장의 기도를 보면 참 시끌벅적하지 않습니까?

유대인 장로들을 파견하고 또 벗들을 보내고 여러 사람 번거롭게 하며 예수님께 상황을 알리고 응답받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기도의 중대함과 실제적인 능력을 아는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응답받으려고 매달리며 이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냥 형식적으로 읊조리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소원 없이는 거의 임의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것이죠.

다니엘서923절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할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백부장이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하며 예수님께 종의 치료를 간구한 것은 주님이 응답하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백부장이 종의 회복을 위해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종은 죽었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도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고 우리 힘만으로도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 인생이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았던 제 인생을 생각해 보면 산 것이 아니라 죄와 곤고와 악한 영이 무거운 그물처럼 덮고 있는 진흙탕 물 속에서 그냥 발버둥을 친 것 같습니다.

백부장은 기도해서 간절한 문제를 해결 받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기도는 단지 문제해결 뿐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성장과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더 사실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종을 고칠 수 있으시다는 백부장의 이런 믿음의 간구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십니까?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212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아버지는 자녀들이 구하는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식들이 돈이라도 더 타내려면 목소리 톤부터 달라지며 갑자기 나긋나긋하게 우리 곁에 나타납니다.

내게 능력이 있다면 그런 자녀들을 기분 나빠 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자녀에게는 무엇이든 해가 되지 않으면 구하는 데로 다 주고 싶은 게 부모마음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자녀들 진로와 결혼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형편이 더 좋아지고 수입이 더 생기길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저는 요즘 부쩍 기도에 재미가 붙어서 뭐든지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데 잘못 구했다고 뭐하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아버지께서 알아서 응답해 주시겠죠.

며칠 전 차안에서 무거운 짐을 좀 내리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기도회를 하는 데 허리가 심상치 않아서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길 간절히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아무 느낌도 없고 큰 확신도 없었는 데 손을 떼고 나니 감쪽같이 나아 있었습니다.

이럴 때 제가 더 놀라서 어리둥절해집니다.

아파서 혼자 고생하지 말고 손을 얹고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권능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나를 믿는 너희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병원치료를 받을 때도 약을 복용할 때도 효과가 빠르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인의 얼굴을 보지도 않으시고 멀리서도 그의 병을 순식간에 고쳐주신 것 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을 갖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질병을 고쳐주시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시고 그 능력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한 두번 기도해서 낫지 않을 실력이라면 더 끈기를 갖고 기도하면 됩니다.

질병 뿐 아니라 삶의 걱정과 근심도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염려에 빠져들고 점점 마음이 어두워가죠.

그러다 무거운 문제도 혼자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며 고민하면 어느새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도 긍정적이 되는 걸 번번히 체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계속 말씀드리며 고민하면 문제가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삶의 곤고함에 짓눌려 성도의 기쁨과 권세도 누리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나 똑같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더 기도해서 견고한 믿음을 갖고 우리의 모든 문제와 소원을 반드시 응답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마칩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나는 예수님의 속죄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는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 이 믿음을 굳게 가질 때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모든 축복을 풍성히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또 우리 앞의 모든 문제와 시련들을 넉넉히 이겨내고 목적을 성취하도록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아버지께 올해는 더욱 기도에 힘쓰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