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두 여자의 구원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살 꽃 봉오리 같은 나이에 죽었던 야이로의 딸과 12년간 병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이 두 내용이 좀 특이한 구조로 엮여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에 불쑥 혈루증여인의 사건이 끼어들죠.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드라마의 첫 회를 보면 한 사건이 전개되다 갑자기 중간에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건이 등장하죠.
나중에 점점 이 두 사건의 중요한 관련성이 드러납니다.
성경에도 이런 구조로 되어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들이 샌드위치 구조로 발생하는 것은 두 사건 사이에 뭔가 비밀스런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 사건의 의미를 다른 사건이 좀 더 깊이 있게 설명 해 주는 것이죠.
두 사건을 함께 보며 은혜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물론 본문의 핵심은 죽음도 절망도 해결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 분이 나의 주님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믿음이 우리 삶에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현실의 문제들을 이길 힘을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과 함께 고향 갈릴리 지방을 거점으로 동서남북을 왕래하며 순회사역을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주님은 주로 세 가지 사역을 하셨는 데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의 약한 것을 고쳐주시는 치료사역이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는 군대귀신 들린 거라사지방의 광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로마장교의 하인을 고쳐주신 일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주님의 신적인 능력이 갈릴리 지역에 꽤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절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다 주님을 기다리다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주님께 해결 받을 문제들이 많았다는 것이죠.
41절에 보니 과연 긴박한 문제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급하게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원문에는 보라라는 말이 앞에 들어가 있습니다.
뭔가 주목할 만한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말이죠.
그는 야이로라는 이름의 회당장입니다.
그가 인파로 둘러싸인 주님께 나오더니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절히 도움을 구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많이 간구했다고 기록합니다.
회당장은 매 안식일마다 율법대로 예배를 인도하던 사람입니다.
마을의 대표가 될 만한 유력한 집안에 율법을 잘 지키고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시 이런 유대사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죠.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과 어울리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범법행위를 했다는 것 등등이 이유입니다.
오늘 회당장이 동료 종교인들의 비난과 조소를 개의치 않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외동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누구에게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수치스런 십자가을 지신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주 우리의 자존심을 굽히고 수치심을 참으며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게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축복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지 않을 때 분명 우리 삶엔 자존심을 꺾고 남에게 굽혀야 할 일이 더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당장 발 등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여기 저기 아쉬운 소리를 하며 머리 숙일 때 참 비참한 생각도 들고 자존심도 상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때 우리가 자존심을 굽혀가며 딴 데다 무릎 꿇는 일이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도 하나님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 보이고 열리는 줄 믿습니다.
정말 간절히 필요할 때 누구도 내 힘이 되 주지 못한다는 걸 살면서 이미 절실히 깨닫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두 말도 묻지 않으시고 죽어가는 딸을 살려주려고 야이로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제가 복음서를 읽으며 매번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사람들의 요청을 외면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자식들 키우다보면 다 느끼는 게 커갈수록 상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삐딱하게 굴던 자식들도 돈이 궁해지면 좀 야들 야들하게 나오죠.
그러면 부모들은 언제 마음에 상처 입었냐는 듯이 또 지갑 열기 바쁩니다.
예수님 행동하시는 걸 가만히 보면 영락없이 그런 부모 모습입니다.
단 한 번도 죄인을 경멸하시거나 응답하시는 데 짐짓 뜸을 들이지 않으십니다.
우리 기도하는 문제와 요청들 주님이 절대 뜸들이고 계신 것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시고 가장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 가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야이로의 요청을 들은 예수님 일행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채 거의 떠 밀려서 그의 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많이 모이면 바깥 쪽 사람들은 가운데로 막 밀고 들어오게 마련이죠.
그런데 43절 원문에 또 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새로운 한 사건이 그 순간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틈을 비집고 등장한 사람은 12년 간 혈루증에 걸려 앓고 있는 여인입니다.
12년간이나 부인병으로 하혈이 멎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병이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나이 들면 잘 낫지 않는 지병을 한 두가지는 달고 살게 마련입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도 그 통증이 늘 우리를 괴롭히고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낙심되게 하는지 모릅니다.
여인이 무려 12년간을 이 수치스런 질병으로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유출병은 아주 부정한 질병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이 부정한 사람임은 물론이고 그 사람을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부정탄다는 말 참 많이 썼습니다.
이 여인과 접촉하면 부정탄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5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공동체 밖으로 격리시켜 문둥병자와 똑같이 취급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염성도 없는 유출병을 왜 이렇게 심하게 다루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죠.
성경에 의문이 나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이유도 있습니다.
피는 생명과 관련 된 것이고 하나님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루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의 근원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방법이 아닌 십자가형으로 피를 남김없이 다 흘리고 죽으신 이유가 바로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피가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기에 그런 몸을 시체와 같이 부정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12년간 죽은 시체와 같이 부정한 몸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인에게 인생은 가시 밭 길 그 자체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 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고 기록합니다.
병을 고쳐보려고 여기저기 소문난 의원은 다 찾아다니며 모든 것을 다 탕진했지만 오히려 병이 더 중해진 여인의 형편이 이해가 되시죠?
아마 남편도 여인을 떠났을 것입니다.
가정도 돈도 희망도 다 잃어버린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어쩌면 여인은 주님이 사역하는 현장을 몰래 따라 다니며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눈여겨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병도 주님이라면 고치실 거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바로 오늘 기회가 여인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감지합니다.
선뜻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는 여인은 잔뜩 몸을 가리고 수많은 사람 틈을 비집고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틈으로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라고 부연 설명이 있습니다.
여인의 믿음대로 주님께 손을 내민 순간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하혈이 즉시 멈추었습니다.
병이 낫는 그 순간, 암세포가 다 사라졌습니다라는 판정을 받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가슴이 벅차겠습니까?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것입니다.
여인은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긴 고난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여인을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두 사건은 모두 12년이란 공통수를 가지고 있죠.
12년이란 긴 세월 헤어날 수 없는 고통으로 여인이 절망 속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야이로의 딸은 12년 간 아버지의 보호와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습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묘한 복선이 무엇입니까?
야이로의 딸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던 12년 동안 실은 그 여인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질 때 이 여인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시는 걸 보십니까?
여인은 병마와 홀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모든 것, 돈도 사람도 다 떠난 이 딸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늘 이 마을을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다가와 그 생명의 능력을 가져가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서 다가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 그 지긋 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나길 여인보다 주님이 더 고대하고 계셨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인파를 헤치고 수치심을 무릎 쓰고 염치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도하셨을 지 생각해 보셨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들 때 제일 안도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이 우리 곁에서 걸어갈 때 옷자락을 꼭 붙잡고 아장 아장 걸으면 마음이 놓이죠.
손을 놓고 위태하게 달리면 넘어지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죠.
참 많이 읽고 들었던 본문인 데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마음이 깊이 느껴져서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의 고통에 대해 피상적이지 않고 함께 탄식하는 분이십니다.
12년이란 고통의 세월을 통해 여인이 주님 앞에 스스로 나오길 기다리고 계신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구원 받은 그 딸을 찾으십니다.
여인은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부끄러운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주님께 손을 댄 이유와 자신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증언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드러나야 하고 사람들 앞에 시인되어야 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은혜는 많은 사람에게 증거 되어 구원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시인할 때 여인의 질병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 수치심을 느낄 여인을 왜 굳이 불러내셨을까요?
만일 주님이 여인을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도둑질해 병이 나았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널 구원했다는 확실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받았겠습니까?
마을 사람들 앞에서 모든 부정함이 깨끗하게 씻겨졌다는 판정도 해주십니다.주님이 여인에게 딸아 라고 불러주실 때 부정한 죄인에서 하나님의 딸로 모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당히 시인하는 믿음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주님 앞에 나와 받은 크고도 많은 은혜를 어떻게 다 열거하겠습니까?
주님의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고 우리 육체와 마음과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건지시고 건강하게 회복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의 괴로운 문제로 늘 주님을 향해 기도하고 도우심을 간절히 기대해도 시원스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도 참 많죠.
때로 또 다른 짐이 얹혀지고 사태는 더 악화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야이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신실하게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회당을 관리하며 살아온 그에게 어렵게 얻은 것은 겨우 외동 딸 하나입니다.
그런데 애지중지 기른 그 귀한 것이 병으로 시름거리더니 차도의 기미도 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절박하게 주님을 모시고 가는 그의 걸음을 가로막는 이 사건은 다 무엇입니까?
자기 딸이 죽어가고 있는 데 예수님은 여인을 불러 세워 긴 간증을 듣고 계십니다.
그의 마음이 타들어가고 입이 바짝 바짝 말랐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49절에 주님이 여인과 아직도 말씀하고 있을 때 종들이 달려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 그의 인생에서 모든 행복은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무거운 철문이 덜커덕 내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셨나요?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무겁고 두터운 소리를 우리 인생에서 들을 때가 있습니다.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이젠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생각 할 때, 중병을 선고받았을 때.
어쩌면 수도 없이 두려운 순간들이 우리 앞을 막아서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직면할 때 인생은 정말 끝장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실종 된 아들을 찾으려 36년째 전단지를 돌리는 어머니의 인생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1973년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4살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날 따라 외출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겠다고 조르던 아들을 달래 도너스를 사줬는 데 밖에 내보내달라고 떼를 써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둘 째 아이 젖을 다 먹였는 데 갑자기 이상한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 이름을 부르며 밖으로 뛰어 나갔는 데 골목 어디에도 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36년을 그 아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어 아들을 찾아 다니는 어머니 머리에 어느덧 하얗게 서리가 내렸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의 어머니는 그 놈이 잊혀지지가 않는 데 어떻게 하냐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모든 자식이 부모들에게 다 이런 존재입니다.
얼마 전 노 부부가 대한적십자사에 2억원이란 큰 돈을 기부했습니다.
이 부모의 서른 살 먹은 아들이 입사한지 40일 만에 선로작업을 하다 추락해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후 2년 여간 힘든 소송을 거쳐 보상 위로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한석씨가 살아 생전 꾸준히 헌혈을 한 공로로 적십자사로부터 상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생전이 힘썼던 그 일이 생각나 그의 위로금 전부를 적십자사에 기증한 것입니다.
전달받은 적십자 측 관계자와 함께 찍힌 사진 속 늙고 초라한 행색의 부모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아렸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2억원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걸 내 놓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한 것도 내 줄 수 있는 게 부모마음인 것입니다.
야이로의 눈 앞에 그를 그토록 두렵게 했던 딸의 죽음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눈 앞이 뿌예지며 야이로에 머리로 12년간 사랑스런 딸과 함께 한 순간들이 재빨리 지나쳐 갔겠죠.
저 여인만 없었다면 주님이 집에 도착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망과 분노가 솟구쳤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큰 위기와 시험이 올 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있죠.
왜 쓸데 없는 데 소망을 두냐고 마귀는 비웃습니다.
현실과 이성으로만 판단할 때 우리는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지금 나의 현실만 보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소망을 갖고 믿음을 갖겠습니까?
되지 않을 조건들이 더 확실하고 내일은 분명 오늘과 달라질 변수가 없는 데 당연히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은 엄연한 현실 보다 주님의 말씀을 믿기로 선택합니다.
믿음은 감정도 현실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주님과 함께 가장 두려운 현실을 믿음으로 돌파하며 나갑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기에 인생의 절망 중에도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따라 온 무리들의 접근을 막으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있냐는 회의론자들과 불신앙의 사람들은 죽음을 몰아내시는 영광의 현장을 목격할 수 없습니다.
기적의 현장은 믿는 사람, 증인이 될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12살, 이제 막 인생을 꽃 피우려는 나이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소녀를 그 죽음에서 불러내십니다.
5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시죠.
마치 자고 있는 아이들을 아침에 부모가 깨우듯 주님이 다정스레 소녀를 불러내십니다.
하나님께는 우리의 죽음이 잠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눈을 감고 주님 앞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두 여인의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통의 순간을 견디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 곁을 지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여인이 주님을 구세주로 믿었다 해도 주님을 붙잡지 않았으면 저주받은 질병에서 놓여날 수가 없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겠지만 인생의 무거운 짐은 벗을 수 없었겠죠.
우리의 환경이 바뀌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를 원하시면 기도해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이미 주님을 믿었고 구원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을 때 그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보다 사망의 권세를 더 인정하고 딸을 장사했다면 그의 인생의 모든 재미와 행복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딸은 구원받지 못한 채 죽었을 테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택함과 은혜이지만 구원 이후의 삶은 우리의 의지로 믿음을 선택하며 살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도 그 능력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나 혼자 힘으로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 허덕이는 것은 절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문제와 미래를 위해, 자녀를 위해, 직장과 이웃들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와 중보를 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넓고 깊어지면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위해 예수님께 엎드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직 어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우리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때 50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고 믿기만 해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께 나가 날마다 구하는 기도가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면 낙심하지 말고 더욱 인내하며 기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사람을 통해서나, 의술을 통해서나 어떤 환경을 통해서나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혹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응답을 받았을 때면 이미 그 문제는 더 이상 내게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질병도 가난도 환경도 넉넉히 이기고 주님과 동행하며 이 땅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은 딸을 사랑한 두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야이로가 딸을 사랑하듯 고통 중의 여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야이로에게 꽃같은 딸이 꼭 살려야 할 애타는 존재였듯이 모든 것을 잃고 꺼져가는 이 여인도 주님이 꼭 구원해야 할 사랑하는 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 이렇게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우리 인생도 주님께 나가 도움을 구할 때 놀랍게 풀리는 건 믿음의 선배들의 한결 같은 간증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지금도 동일하게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는 줄 믿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 가정을 위협하는 경제적인 문제와 풍성한 가족들의 사랑과 믿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청년들은 내게 가장 좋은 진로가 무엇인지 그 길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십시오.
얼마나 기도할 게 많습니까?
기도하며 구하는 것을 응답받고 기도시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릴 때 우리 믿음이 점점 실제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렇게 실제적이지 않고 듣기만 한 믿음이면 시험이 올 때 다 의심하며 넘어집니다.
우리와 가정이 축복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이는 견고한 믿음이 되도록 매일 말씀과 기도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7장1절-10절) (0) | 2013.01.16 |
---|---|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누가복음5장1절-11절) (0) | 2012.06.20 |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15장11절-32절) (0) | 2012.02.23 |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 (누가복음13장10절-17절) (0) | 2012.01.17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누가복음2장1절-14절) (0) | 2012.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