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 주변엔 언제나 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병으로 업혀 온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 그리고 주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틈을 보고 있는 바리새인들 까지 주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주님을 향해 바리새인들이 쑥덕거리는 걸 보고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한 부자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에게 단지 두 아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아들은 우리가 다 이해하듯이 그 당시 죄인 그룹과 자칭 의인인 종교지도자 그룹을 비유한 것입니다.
내용은 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던 죄인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걸 못 마땅해 하는 큰 아들 너도 집안에 있지만 실은 집나간 탕자나 다름없으니 얼른 주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아닌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이 두 아들의 마음이 다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속에 있는 두 아들을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좋은 부자 아버지 밑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었지만 불행한 삶을 산 두 아들 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안쓰러운 사람은 거지 꼴이 되어 들어 온 막내도 아니고 차별 당하고 상처받은 큰 아들도 아닙니다.
누가 봐도 이 깨어진 가정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둘이 있는 데 하나는 집 나간 애물이고 또 하나는 집 안에 있는 애물입니다.
아이 키워보셨으니 애물단지 다 공감하시죠?
아버지는 사랑해서 모든 재산을 나눠 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또 한 아들에겐 인색하고 편애하는 아버지로 매도당합니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연인이라 해도 그 마음이 떠나고 돌아설 땐 무섭게 남이 되어버립니다.
가족 간에도 언제 사랑했냐는 듯 냉혹한 얼굴로 갈라질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준 좋은 아버지는 아무 잘못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아들들에게 홀대를 당합니다.
인간에게 배신당한 하나님아버지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보다 아들을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이 또한 하나님아버지마음인 줄 믿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신의 아픔보다 더 큰 것은 집을 나간 자식이 죽어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고통인 것입니다.
32절에서 아버지는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난 인간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존재들이란 말씀입니다.
천국은 날마다 잔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아버지를 떠나 돌아오지 않은 영혼들로 인해 날마다 기다리고 애를 태우는 곳입니다.
성경에 기록 된 천국의 모습은 우리 예상과 달리 파티장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사령탑과 같다고 해야 할까요?
이사야서에도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이냐고 지원자를 모으시지 않습니까?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좌 앞도 회의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인류를 구원해 천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삼위하나님은 지금도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삶에 개입하며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지난 세월 참 많은 사람을 동원하시고 많은 사건들을 짜 맞추시며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기뻐하는 때가 언제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15장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리고 스바냐서3장17절에도 구원을 베푸실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죄인을 기다리시는 간절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이야기하시지만 누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신비한 사랑으로 바로 연약한 나를 사랑하셨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비록 내 처지가 지금 곤고하고 궁핍해서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지식으로 설계하고 최선을 다해 만드신 자녀들입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 관심 밖에 있는 자식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탄식과 작은 신음소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들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줄 믿습니다.
0파치과의료선교단의 단장이신 0형순 장로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4대째 예수님을 믿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3,4대 예수님을 잘 믿은 가정들은 여지없이 자손이 다 잘 되고 여러모로 축복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0장로님 역시 좋은 가문에 재능과 지혜까지 주셔서 서울대 의대에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교회를 잘 다녔지만 머리가 커지며 믿음에 의심도 들고 성경대로 살기도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세상에 좀 나갔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교회를 아주 끊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아주 잘 나갔죠.
대학시절엔 조정 경기팀에서 활약할 만큼 건강했고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치과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두 자녀는 명문학교에 1등으로 들어갈 만큼 뛰어났으니 뭐 하나 부러울 게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15살 먹은 아들이 무릎이 아프다고 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악성 골육종이었습니다.
뼈가 썩어 폐와 뇌로 전이되어 죽게 되는 병입니다.
의사지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 왜 하필 나냐는 생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그를 위해 기도해 오던 이웃집 할머니가 교회에 나가 기도하면 아들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46살에 교회를 떠난 지 30여년 만에 그가 했던 말 대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이죠.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과 환경을 갖고 세상 속에 나가 마음껏 자기만을 만족시키며 살다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리자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했던 아들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갔고 그 시련을 겪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된 장로님은 의료선교단을 조직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약 2만명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사역지에서는 정말 성경에 있는 기적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한번은 사할린에서 사역할 때였는데 이를 만드는 치과 재료가 다 떨어져 병에 이 3개 만들 양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방에 수소문해도 재료를 구입할 수가 없는 데 치료해 줄 사람들은 한없이 몰려와 50명이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료가 담긴 병을 가운데 놓고 의료진들이 둘러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병의 재료가 떨어지면 저희는 돌아가야 하는 데 몰려온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바쁘게 진료를 했는 지 삼일 동안 하루 세 시간을 자며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병에 있던 3인분의 재료로 50명을 다 치료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치료가 다 끝나고 기공사가 그 병을 들고 뛰어 들어왔는 데 더욱 놀라운 것은 처음에 있던 그 양이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동안 뭘 가지고 이를 만들었단 말입니까?
치료받으러 모인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한번은 인도에서 사역을 하는 데 9월인 데도 날씨가 40도를 넘는 데다 습도가 너무 높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황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 교회에서 한 환자를 데려 왔는 데 심한 언청이 환자였습니다.
33년 동안 방치 된 남자의 병이 너무 심각해서 잇몸이 완전히 다 드러나 드라큐라 같이 흉측한 얼굴이었습니다.
6시간에 걸친 긴 수술을 끝내니 온 몸은 땀 범벅이고 기진맥진해 쓰러질 지경이 되었죠.
너무 힘이 드니 하나님께 원망 섞인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저 언청이 하나를 고치자고 우리가 이 먼 곳까지와 이 고생을 하게 하시는 건가요?
그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이곳에 부른 것은 그 남자의 아내 때문이다.
깜짝 놀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해서 목사님께 그 아내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결혼한 지 일주일이 된 그의 아내는 지참금에 팔려 온 신부였습니다.
밤에 결혼식을 치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랑 얼굴이 흉하고 무서워서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그 신부가 하나님께 제발 신랑 얼굴을 좀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돈에 팔려 온 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보잘 것 없는 여인도 하나님께는 그 기도를 꼭 들어주고 싶은 존귀한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역시 아버지께서 듣고 계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가 멀리 동네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는 잠시도 동네 어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패륜아라고 눈총이라도 받고 돌이라도 맞을 까봐 아버지의 눈은 누구보다 먼저 아들을 발견하고 뛰어가야 했으니까요.
밖에서 꾸지람 듣는 아이를 얼른 치마 폭에 감싸서 안고 들어오는 어머니의 마음 같이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15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고 엄청난 신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고 낙심하지 말라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이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신뢰하시고 든든한 그 사랑 안에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정서를 봐도 아버지가 살아 계신 데 유산 상속을 빨리 하라는 건 누가 봐도 확실한 불효자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모이면 죽을 때까지 제대로 대우받으려면 절대로 일찍 재산 분배하지 말라고 말씀들 하신다죠.
둘째 아들은 일찍 유산을 받고 분가하길 원했습니다.
훌륭한 인품에 재력을 갖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살았지만 아버지의 간섭이 싫었고 인생을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죠.
밑천만 있으면 아버지 없이도 쉽게 성공하리라 자만했습니다.
아니, 아버지를 떠나면 오히려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스토리죠?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 하나님처럼 되려던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세상을 다 알아낼 것 같지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인생은 영원히 물음표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삶에 비극이 시작됩니다.
어느새 그 많던 재산이 손아귀의 모래 처럼 빠져나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는 우리 재물과 건강과 인생이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좋은 것들이 어느 순간 보니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이죠.
작은 아들의 방탕하고 사치스런 삶을 30절에서 형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의 사치스런 생활에 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대통령궁의 일 년 운영비가 무려 1681억이라고 합니다.
하루 음식비만 자그마치 1760만원이라고 하니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우리의 돈, 건강 순식간에 신기루 처럼 사라져 버릴 허무한 것들입니다.
시편 90장 10절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이 부요해지고 자신감이 생기고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어쩐지 내가 가진 것과 주변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쪼그라들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반경은 좁아지고 아무리 일해도 생활에 필요한 물질은 오히려 부족해지는 것 같고 미래에 대한 꿈도 희미하고 미래가 두렵고 막막하기만 하다면 속히 아버지께 돌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거할 때는 내게 없던 능력도 생기고 긍정적인 자신감도 생기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빌립보서 4장 13절을 외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정말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 때 뼛 속까지 든든한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를 가졌다고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허허롭고 초라하게 보이고 그런 내가 처량해 쉽게 연민에 빠지는 것은 아버지 집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내 생각과 의지대로 살아온 결과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은 17절에 굶어 죽게 될 지경에 이릅니다.
굶주림의 고통은 그리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상하지도 않은 음식물이 쓰레기로 나가는 우리 현실 속에서야 굶주림이란 단어가 다이어트할 때 배고픔 정도로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의 작가 크누트 함순이란 사람의 자서전 굴주림이란 책에서 자신이 겪은 굶주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자그마한 돌 하나를 발견하고 먼지를 털어 이것을 입 속에 넣었다.
혓바닥 위에 무엇이고 놓고 싶어서였다.'
그는 심지어 손가락까지 깨물어 봅니다.
그리고 흘러나온 핏방울을 자신도 모르게 핥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제정신이 든 그는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자괴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굶주림의 리얼리티입니다.
육신의 굶주림으로만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의 정신과 육체도 병들고 죽어가게 됩니다.
영국의 암전문지 바이오메드 센트럴 캔서에 런던 암 병원에 입원한 유방암과 자궁암 환자 가운데 62%가 암 발생 직전 극심한 정신적 혼란과 고통을 겪었다는 연구결과가 게재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면 정신적인 고통과 질병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언17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떠나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인간은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유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28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우리 심령에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고 마음에 평강이 사라졌다면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바쁜 일과 중에 우리 마음이 아버지로부터 너무 멀어지지 않게 자주 마음을 주님께 향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야 제대로 된 결정을 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죠.
아들이 오는 길이 보일만한 곳에서 날마다 지켜보던 아버지는 20절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기록합니다.
재산을 한 몫 챙겨 아버지를 버리고 뒤도 안보고 떠났을 자식에 대한 섭섭함과 책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쿨 하신지요.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길 결정하면 하나님은 조건 없이 달려오셔서 우리를 안으시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불순종한 죄의 값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시 주님을 떠나고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아버지께 나가면 즉시 용서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 주듯이
이사야 61장3절은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대우한다고 말씀합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아버지께 돌아가 이런 축복의 삶을 누리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끝 부분에서 심통을 부리고 있는 큰 아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큰 아들은 29절에 보니 둘째가 나간 후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명을 거역한 적 없이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집나간 동생에 대한 염려도 아버지에 대한 신뢰도 없었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망할 동생이나 그런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은 아버지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병든 마음입니다.
큰 아들 역시 몸은 아버지의 집에 머물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등진 탕자와 다름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없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교회를 드나드는 교회 안에 탕자도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큰 아들의 완고한 마음을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큰 아들의 쓴 뿌리가 일부 우리 속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큰 아들이 성을 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니 자기는 염소새끼 한 마리 받아 누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아버지께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올 때가 언제입니까?
내 노력한 만큼 내가 기도한 만큼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입니다.
내겐 염소새끼 한 마리 없는 데 자격도 없는 저 집에는 살찐 송아지가 있는 걸 볼 때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는 분도 아니시고 부자 아버지를 두고도 내 통장 잔고는 바닥나 가는 데 내 처지를 못본체 하시는 것 같아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TV에서 일 이층에 꽉 차게 모여 예배드리는 대형교회를 보면 저 귀퉁이만 좀 잘라다 우리 교회에 붙여주시는 게 어렵지도 않으실 텐데 이런 생각이 스치는 것 어쩔 수 없습니다.
분노에 차 집 밖에 서있는 아들을 찾아 이번에도 아버지는 문 밖으로 나옵니다.
아들의 다친 마음을 측은히 여기고 위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는 그가 생각했던 편애는 없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유산으로 남겨두셨다는 말씀이죠.
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돌아온 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아직 염소새끼 한 마리도 얻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아직 누릴 때가 아니고 밭에서 일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정작 아버지와의 관계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 일에 쉬지 않고 일하고 심지어 주님의 사명을 위해 헌신한다 해도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기쁨과 힘을 얻지 못한다면 어느 날 이런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힘든 인생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살기 위해선 날마다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힘을 공급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아야 우리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이 어떤지를 우리가 알 수 있잖습니까?
그리고 기도하며 힘든 세상을 이길 힘을 구하십시오.
큰 아들처럼 나 혼자 애쓰며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감당 못할 문제에 부딪힐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고 좋은 유산을 나를 위해 분배해 두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늘나라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예비하신 줄 믿습니다.
혹시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려 애를 쓰다 실망하셨습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고집을 피우고 문 밖에 서 계실 겁니까?
안타깝게도 본문의 큰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은 오늘 본문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문 밖에 까지 나와서 아들을 설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를 설득하고 계십니다.
내 사정을 몰라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오해를 버리시고 아버지께 나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아버지의 음성을 다시 한번 들려드립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우리 속에도 때로 두 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좋을 때는 모든 걸 꾸려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내 마음대로 살다 모든 게 떨어지면 남루한 차림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막내아들이 됩니다.
집에 돌아 와 있으면 어느새 불만스런 큰 아들 자리에 서게 됩니다.
매일 아침 짐을 싸들고 나갔다가 밤이 되면 실패하고 돌아와 이번엔 큰 아들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벗어버리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주님 곁에서 벗어나면 영적으로 평안이 없고 육신은 한없이 고달픈 것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언제나 견고하게 주님 안에 거하며 풍성한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를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부족함 없이 축복하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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