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누가복음2장1절-14절)

남수연 2012. 1. 2. 17:28

오늘 성탄절전야 예배에 함께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모두들 어린 시절 성탄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하나 쯤은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먹거리와 볼거리가 다 부족하던 시절 못 이기는 척 친구 손에 이끌려 갔던 교회 안은 참 따뜻했고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에 얼굴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아랫목에 밥상 하나 펴놓고 도화지에 낙엽도 붙이고 크리스마스 카드 만든다고 법석을 떨던 때도 우리 마음이 참 행복했었죠.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인데도 시간이 흘러서인지 그때가 사람 사는 맛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탄의 밤 또한 두고 두고 우리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교회에 오래 다니지 않은 분도 다들 알고 계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살펴보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나누며 그 은혜가 우리 삶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중요한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성경에 350번 예언되어 있는 데 메시야의 탄생이 이곳에서 있을거란 예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한 700년 전에 살았던 미가라는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구약성경 미가서5장2절의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메시야인 예수님께서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어야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죠?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4킬로 미터에 해당되는 거리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만삭의 몸을 하고 있고요.

현실적으로 그 몸으로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이를 출산할 이유도 없고 그랬다간 산모와 아기가 다 위험에 빠질 상황입니다.

미국에 원정 출산 가는 것도 아니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님을 출산할 확률은 제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을 보면 바로 그 때에 역사적인 큰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아우구스투스 혹은 옥타비아누스로 배운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줄리우스 시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라는 말을 남긴 대단한 정복자였지만 부루투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뒤를 이어 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것이죠.

그가 로마의 황제에 즉위하자 산재한 식민지 나라들을 좀 정비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령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집트의 문헌을 보면 당시엔 조상의 본적지에 가서 호적을 신고했다고 합니다.

황제의 명령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던 요셉과 마리아가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들이 다윗 왕의 혈통이었기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로 그 때에 로마황제의 호적등록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 우연의 일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사실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 날을 돌아보면 그 때 왜 하필 그런 일이 일어났는 지 생각할수록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몇 가지는 다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환경을 조성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죠.

별0난 요리교실을 운영하는 스티브 0최란 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SBS골프 해설을 하다 요리연구가로 크게 이름 난 분인 데 그만 갑상선 암에 걸리게 됩니다.

간신히 치유가 되었는 데 이번엔 잘 나가던 사업이 크게 실패를 합니다.

엄청난 술로 스트레스를 풀어서인지 다시 설암에 걸리게 되고 맙니다.

말기암의 항암치료를 받다보니 후유증이 얼마나 큰지 자살 충동이 거의 하루 종일 떠나지 않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날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닷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바다를 향해 권총으로 시험발사를 하는 데 갑자기 딸에게서 전화가 자꾸 걸려왔습니다.

처음엔 받지 않았지만 위기 상황이란게 직감 되어 얼른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빠 우리 갇혔어요 라는 다급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식이 위기에 처했는 데 아버지 눈에 뭐가 보이겠습니까?

자살이고 뭐고 당장 불러주는 주소로 달려갔더니 그곳이 뜻밖에도 교회 안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암 치료를 위해 당시 교회에 다니지 않던 두 딸이 하나님께 기도해 보겠다고 갔다가 밖에서 문을 잠그는 바람에 갇혀버렸던 거죠.

담 안 쪽에 아이들이 있는 걸 확인하고 걸을 힘도 없던 그가 무슨 힘이 났는지 높은 담벼락을 뛰어 넘어갔습니다.

놀란 딸들이 울고 그도 같이 손을 잡고 울며 불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살 것 같은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도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나 설암이 깨끗하게 치유된 것입니다.

의사가 놀란 눈으로 한 말은 오 마이 갓! 이었다고 합니다.

왜 하필 그 시각에 딸들은 교회 안에 갇혀졌고 아버지에게 긴급 전화를 걸게 된 것입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 같지만 실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중에 믿음의 눈을 갖고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축복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아버지께서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언 된 장소에서 태어나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며 절묘하게 구원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막힌 반전과 절묘한 타이밍을 통해서 우리의 삶도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극적인 체험들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정하고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이나 성인일지라도 예수님처럼 출생이 예언되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도 없이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고 또 역사를 움직이시며 주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인류를 구원 할 그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보길 원하고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묵을 여관이 없었다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브뤼겔이란 화가의 그림을 보면 베들레헴의 호적등록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 중에 바벨탑 그림을 아마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북구 유럽의 눈 덮힌 마을을 배경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화면 가득히 들어차있습니다.

돈을 받고 있는 어떤 집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가 있고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북적이는 화면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찾는 것은 마치 윌리를 찾아라 같습니다.

그런데 잘 찾아보면 그 중 나귀에 앉은 여인이 섞여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배가 불쑥 나와있는 것을 알 수 있죠.

나귀를 잡고 있는 남자는 어깨에 큰 톱을 하나 메고 있는 걸로 봐서 목수 요셉인게 분명합니다.

그림에서 처럼 작은 베들레헴 마을은 도시에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호적등록을 하러 모여 들며 꽉 찼고 한 두 개 있었을 여관 방이 동난 건 뻔한 일입니다.

마리아가 만삭의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방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를 만드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태어나기로 정해진 곳으로 인도하셨으면 방 한 칸은 마련해 두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생각대로라면 꽉 찬 여관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예약을 취소해서 극적으로 방이 마련되었다 이게 하나님의 인도죠.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부족해도 다 좋아라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들어갈 방이 끝까지 생기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잘 풀리는 것만 인도하심이 아니라 당장 안 풀리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인도라는 것입니다.

바람을 막아줄 안락한 방과 포근한 이부자리 속에 오시는 게 이 땅에 주님이 오시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스스로 내려 놓고 죄와 사망에 어둠이 짙게 깔린 인생들 틈에 내려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이 탄생의 고난은 주님의 인생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죽기위해 오신 목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걷느라 고단한 것은 마리아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뱃 속에 있던 아기 예수님께 더 위험하고 고단한 길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 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인생이 가난하고 곤고한 것은 하나님을 멀리한 죄의 결과입니다.

그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 죄 값을 치르실 주님은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불면의 밤을 벗어나 따뜻한 이불 속에서 평안한 잠을 잘 수 있게 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은 마굿간의 엉성한 벽 사이로 밀려드는 세찬 바람 속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일생동안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스런 인생을 겪지 않은 것이 단 한개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가난과 저주를 담당하셨음을 믿는 우리가 이렇게 부요한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장 낮고 가난한 자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임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의 모든 짐은 벗겨지고 문제도 역경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축복으로 바뀌게 될 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구원의 소식을 처음 듣게 된 목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 모두가 잠든 밤에 예수님께서 그 누구도 상상 못할 모습으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십니다.

인간의 운명과 인류의 역사를 뒤바꿀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속보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해산한 순간 천사들은 이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려고 서둘러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줍니까?

마을 밖 야산에서 양들을 치며 노숙을 하던 양치기 목동들에게 입니다.

기왕 주님의 탄생을 알리실 바에야 좀 영향력 있고 발이 좀 넓은 사람에게 알려주면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빨리 주님을 알아볼 수도 있었을텐데요.

그런데 이 엄청난 소식을 전달받은 것은 하필 당시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목동들입니다.

허황 돼 보이는 그들의 이 증언을 그 누가 믿겠습니까?

거짓말 하는 양치는 늑대 소년의 동화 다 아시죠?

예수님 당시에도 목동들은 죄인 취급 받고 공신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8절에 보면 그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단지 놀랍게 여겼을 뿐이라고 기록합니다.

메시야가 나셨다는 소식을 마을 사람들이 믿었다면 동네가 발칵 뒤집혀야 정상 아닙니까?

그저 그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희한한 일이 있긴 있었나보다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우리 생각과 다르게 일하신다는 것을 또 느끼게 됩니다.

우리를 인도하실 때도 종종 이렇게 행하시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문제를 놓고 애가 타게 기도하고 간절히 매달리면 좀 화려하게 응답해주시면 좋으련만 겨우 겨우 위기를 모면할 정도로 인도하실 때 감질납니다.

아니 때로는 도대체 기도를 듣고 계신가하는 회의가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완벽한 계획을 갖고 일하십니다.

하나님 사전에 즉흥적이거나 과시란 말은 없습니다.

그건 뭔가 부족한 우리 인간들이나 그걸 감추려고 허세를 부릴 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모든 과정을 우리 유익을 위해 꿋꿋이 진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모든 구하는 일들이 좋아지지 않고 상황은 더 악화되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예비 된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을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냄새나는 양떼 틈에서 노숙을 해야만 먹고 사는 고단한 죄인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진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의 삶이나 별 반 다를 것 없는 우리 고단한 인생들에게 주님의 구원이 먼저 임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목자들이 천사가 말한 대로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소망도 없이 양들 틈에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목자들의 환희에 찬 급변한 모습이 느껴지십니까?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오늘 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보고 절망과 근심이 소망과 찬송으로 바뀌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홀연히 하늘을 뒤덮는 천군 천사들의 찬송입니다.

먼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요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천사들이 오늘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새삼스럽게 찬송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직접 내려가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탄과 놀라움 때문인줄 믿습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은 창조신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창조주의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의 본 모습입니다.

연세대 스티븐 호0킹이란 별명의 신0형진씨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생후7개월부터 근위축성이란 근육이 마비되어 가는 희귀질환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가 연세대에서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학교로 데려가고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어머니 0이원옥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교회 권사이신 그의 어머니는 옛날 이화여대를 나온 재원이었습니다.

집안이나 외모나 학력이나 그 어떤 것에서 빠질 것 없는 이권사님의 일생은 그러나 이 아들로 인해 완전히 희생과 질곡의 삶이 되고 맙니다.

젊은 시절 시선을 끌었음직한 미모였을 어머니의 얼굴 구석 구석엔 숨길 수 없는 초조와 근심의 깊은 그늘이 엿보였습니다.

단 1분도 아들의 급작스런 호흡곤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평생을 언제 아들에게 생명의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어머니 얼굴의 근심과 그늘에서 저는 오히려 어머니의 영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진정한 어머니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땅에 우리를 구하러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목격한 하늘의 군사들과 천사들이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의 장엄한 찬양이 그 순간 울려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찬양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이어집니다.

그들은 천상에서 끊임없는 전쟁과 불의와 악덕이 자행되는 인간 세상의 어두움과 불안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인류 전쟁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인류역사 5천년 동안 92%기간이 전쟁 중이었고 평화의 기간은 고작 8%뿐이었다고 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연평균 12회의 전쟁이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되었고 전쟁이 없었던 날은 단지 26일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오늘 천사들이 너무나 알고 있는 평화의 왕이 이 땅에 내려오셨으니 참혹한 이 세상엔 이제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간에게 진정한 평화란 없습니다.

천사들이 분명히 명시하죠.

하나님의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담당하셨음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평화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듣고 그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참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 평화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겐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 걱정하고 머리를 싸맸다가도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찾게 되지 않습니까?

아직도 마음에 창조주의 평안이 없으시다면 마음을 열고 우리를 위해 구유에 오신 평화의 왕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바로 오랫동안 예언되어 왔던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크리스마스 성가 중에 오 거룩한 밤이라고 있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 구유 안에 누워 우리의 친구 되려하시네.

저는 이 부분을 부를 때 마다 마음이 찡해지는 것을 번번이 느끼게 됩니다.

정말 한갓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인간 아기로 오셔서 구유에 누워계실까

하나님을 욕하고 대적하고 온갖 악덕을 범하며 스스로가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나님 마음에 그렇게 그들이 밟히셨을까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이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함께 예배한 모든 분들게 가장 값진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을 만나 평안과 축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