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교회의 첫 성찬예배를 드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찬식은 세례식과 함께 예수님께서 교회에서 행하라고 정하신 중요한 의식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은 이스라엘의 명절인 유월절과 짝을 이룹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도 유월절이죠.
유월절의 의미를 밝혀주는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성만찬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출애굽사건 중 이집트에 내려진 10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가 죽는 재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요구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말을 들어줄 리가 없죠.
지금도 티벳과 같이 분리 독립을 원하는 나라들의 유혈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리신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장자와 짐승들의 첫 새끼가 다 죽고 나서야 바로왕이 이스라엘을 놓아줍니다.
장자 재앙이 있던 날 유대인들에겐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기둥에 그 피를 바르고 집 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으며 해방을 기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란 죽음의 사자가 우리 집을 건너 뛰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이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명령에 따라 두 번 째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40년 만에 지킨 것이죠.
여호수아 5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한참 지나서 열왕기하 23장 21절에 나옵니다.
요시야왕이 뭇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여리고에서 여호수아가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킨 뒤 한 500년 만에 다시 유월절을 지킨 것이죠.
22절에 보면 그동안은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고 꼭 집어 말씀합니다.
그 다음 유월절을 지킨 성경의 기록은 히스기야왕 때입니다.
해마다 반드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는 데 하나님 말씀을 정말 지독히도 안 듣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 읽지도 않고 아는 것도 잘 안 지키잖아요.
이스라엘이 그러다 망했답니다.
우리에게 성경말씀대로 지키고 구원받으라고 했다면 구원받을 사람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쫄딱 망해서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 등장하는 유월절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시대입니다.
또 한 300년 지나서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생활도 겪고 나니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사람들이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그 후에도 로마와 같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나라가 잘못되는 원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랍비 같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정통 종교인들은 랍비들이 정해놓은 세부적인 전통에 따라 철저히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대인을 감싸고 도는 탓에 첫 유대인 대통령 아니냐고 놀림을 받았던 오바마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정통적인 유월절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었죠.
잘못해서 유월절 기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간 배를 곯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유월절 전통에는 어린 양과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빵집에서 발효시킨 맛있는 빵은 사라지고 딱딱하게 구운 무교병만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마을 곳곳에선 누룩으로 발효시킨 부드러운 빵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누룩이 혹시라도 남아 있을까봐 그릇을 철저히 끓는 물에 소독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이스라엘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누룩이 들어있는 제품들은 통째로 아랍인에게 팔아 넘기는 상징적인 거래가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랍비가 재무장관의 입회 하에 국가 내에 있는 모든 누룩 제품들을 싸잡아 500만원이란 값을 매겨 아랍상인에게 팔아치우는 것입니다.
물론 물건이 오가지는 않습니다.
이 거래로 이스라엘에 있는 누룩제품들은 다 아랍상인 것이 되는거고 유대인들은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맞이하는 것이죠.
대단한 꼼수입니다.
유월절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인 예수님을 갖다 맞추지 못해 지금도 뜻 모를 의식을 되풀이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전 세계가 다 떠들썩하게 지키는 크리스마스가 이 땅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날이란 의미를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죠.
본문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탁 앞에 앉으셔서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갈망하고 갈망했다 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먹으시길 간절히 원하셨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먹길 원하신 것은 우리 말로 헤어지기 전에 밥이나 한끼 같이 먹자란 뜻은 아니실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야 3년 넘게 합숙 생활을 해 온 사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간절히 갈망한 것은 이 식탁을 통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던 그 유월절의 주인공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유월절엔 이스라엘 각 처에서 수도 없이 많은 양이 죽어야 합니다.
앞 7절에도 보면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십만 명으로 추산하고 명절을 맞아 두 배인 20만명 정도가 유월절에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열 명 당 한 마리의 양을 잡았어도 예루살렘에서만도 2만 마리의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한 밤 중 까지 옛 선조들의 고역의 노예생활을 기억하며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고 양고기를 구워 먹는 이 유월절의 의식은 하나하나가 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유월절 식탁에서 주님이 하신 특별한 행동이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찬식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며 너희를 위해 흘리는 주님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의식 중에 반드시 죽어야 하는 양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죽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온 민족이 지키는 이 유월절이 바로 주님의 대속을 상징한 다는 것을 꿈엔 들 알았겠습니까?
1500년 전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던 예수님은 오늘 20절에서 온 인류를 향해 새 언약을 세우십니다.
주님은 이제 자신의 피를 쏟아 부어 온 인류를 구원하실 새 언약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의 새 언약을 믿고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곧 구원의 증표인 것이죠.
또 주님이 행하라고 하신 성찬식의 의미를 고린도전서11장25절에 이렇게 밝히십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식을 행하며 주의 죽으심을 주님 오실 때 까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성찬의식을 행할 때 마다 모든 세대 모든 이에게 전파하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원하고 원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성찬식은 2천년을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폴로11호를 타고 암스트롱과 함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 올드린은 달에서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는 온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 된 달 착륙 중계방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지금 듣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이 기회를 통해 부탁합니다.
누구든지 어디서든 잠시 멈추시고 이 날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미리 준비해 온 성찬기를 사용하여 성만찬을 들었습니다.
중력이 6분의1인 달에서 포도주가 천천히 휘말리듯 잔 속에 신비하게 부어졌습니다.
우주 밖의 경이로운 창조의 세계를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 그는 주님의 명령대로 인류를 구원 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고 전파한 것입니다.
부시대통령 시절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과 함께 행해진 성만찬이 있습니다.
다이어트 휴유증으로 인한 의료과실로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된 테리 샤이보의 이야기입니다.
15년간 테리는 위에 연결 된 급식관을 통해 음식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으니 급식관을 제거해 달라는 소송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병원 측의 의료과실을 인정받아 20억의 돈을 받았고 다른 여자와 새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크게 부각되며 법정은 남편의 손을 들어주고 테리의 급식관을 제거하란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부시대통령의 공화당 의원들이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지 못하도록 특별법을 제정하고 테리에게 다시 급식관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남편의 항소에 법원은 다시 급식관을 제거하란 판결을 내립니다.
옥신각신하던 사건은 결국 존엄하게 죽을 권리 쪽으로 기울고 테리의 급식관이 다시 제거되었습니다.
급식관을 제거한 테리는 눈을 뜨지 못하고 피부가 바짝 말라가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테리에게 물을 먹이려는 시위대들이 병원에 진입하려다 수십명 씩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부모의 청원에 의해 바짝 마른 그녀의 입술에 마지막으로 허용 된 것은 부활절 성찬 포도주였습니다.
딸의 몸이 죽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새 삶을 살 것을 소망하는 부모의 믿음과 사랑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절망 속에서도 그들은 의식 없이 죽어가는 사랑하는 딸에게 생명의 성찬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까?
그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새 생명을 얻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당부인 줄로 믿습니다.
또 한가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 유월절은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유월절 식탁을 간절히 마음에 두셨던 것은 삼년 반을 함께 지내며 주님의 공생애 사역에 동행했던 제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1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 때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했던 그 유월절 식탁이 자기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신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식탁 앞에서 예수님은 꼼꼼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셨습니다.
더는 제자들을 돌보지 못하시고 떠나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끝까지 제자들을 섬겨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주님의 마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주님의 마음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한다.
주님이 이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기를 갈망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까지 제자들을 위해 쏟아 붓는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제자들의 속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는 것이 24절에 나타납니다.
자기들 중에 누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냐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주님이 고난을 말씀하실 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수도 없이 목격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고난 중에도 능력으로 제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고난은 오히려 고대하던 예수님의 국가가 완성 될 최후의 사건일 뿐이었고 자신들이 권력에 핵심에 서게 될 기회가 드디어 다가 온 것으로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계산할 수 없는 희생과 사랑을 주셨지만 우리는 내가 드린 헌신과 내가 받은 축복이 수지가 맞고 있는 것인지를 얼마나 자주 계산하며 삽니까?
우리의 고난이 불공평하다고 계산 잘하시라고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무정한 제자들 앞에서 그래도 너희를 사랑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이 바닥나고 마음은 요동치고 연민에 빠지거나 세상을 향해 갈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조금 덜 주님을 사랑하고 조금 덜 봉사해도 그것으로 주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가 잘하고 의롭고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셨던 게 아니라고 로마서 5장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욕하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교만하게 행동 하던 그 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고 더 복을 받으려고 이런 저런 종교 활동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한다고 더 사랑을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남김없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자라고 덜 채워진 부분이 눈꼽만큼도 없이 완벽하게 쏟아부어주셨다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만 우리의 예배와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 만큼 점점 더 기쁘게 드리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몇 년 전 풀빵엄마라는 MBC의 휴먼다큐가 방영되어 많은 사람을 울렸습니다.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최0미씨는 풀빵을 구워 혼자 두 아이들을 키웁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병마가 0미씨를 덮칩니다.
위암 판정을 받은 정미씨는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악착같이 두 아이를 키우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치료는 실패하고 암은 난소와 췌장까지 퍼지고 있었습니다.
독한 병마와 싸우다 주저앉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니까요.
일곱 살 윤0와 다섯 살 홍0이의 바람막이가 되어야 할 엄마이기에 0미씨는 꼭 살아야만 했습니다.
항암치료의 고통을 이기면서도 풀빵을 굽는 엄마를 볼 때 마다 어린 딸은 쉴 새 없이 엄마 밥 먹었어?라고 묻습니다.
위의 70프로를 잘라 낸 0미씨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게 어린 딸의 마음에 늘 걸렸던 것이죠.
아직 작은 손으로 항암제 부작용으로 마비되어 가는 발을 꼭꼭 주물러 줍니다.
동생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고 혼자서 모든 일을 척척 해냅니다.
일곱 살배기 딸은 리포터에게 말합니다.
내가 엄마한테 잘 해 준게 있으면 좋겠는 데 잘해준게 없어요 유치원에서 애들 잘 때 나 기도해요. 엄마 아프지말게 해달라고.
그리고 결국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칩니다.
정미씨는 아이들을 위해 절대로 병마에 지지 않겠다고 엄마니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나빠지는 병세에 돌아 누워 울며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내가 끝까지 사랑해 주려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걸 크면 다 알거예요.
결국 엄마는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빈소에서 엄마와 마지막 배웅을 하는 어린 딸은 이모의 손을 잡고 서서 엄마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 보는 모습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미씨는 자신의 죽음 뒤에 홀로 남게 될 자식들이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며 굳세게 살아주기를 바랬습니다.
죽음과 맞서며 끝까지 자식을 사랑한 풀빵엄마의 사랑,
엄마의 힘든 투병에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다고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는 어린 딸의 사랑.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봅니다.
어린아이도 죽으면서도 자기를 사랑해 준 엄마의 사랑을 알아보고 자기의 사랑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만도 못한 주님에 대한 내 사랑을 돌아보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는 무정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서운해 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과 인내로 붙들어 주십니다.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에 대해서도 주님은 사랑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자를 거부한 유다,
이 세상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사랑했던 스승을 죽음에 팔아 넘긴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죄의 무게가 얼마나 그를 짓누를지 오히려 근심하시는 죄인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받아들이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할 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찬식을 통해 주님께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찬을 통해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1859년 영국 웨일즈에 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은 트레베카 대학에서 열린 성찬식 때 학생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며 시작되었습니다.
학교 성찬식에 참석한 학생들이 모두 큰 은혜를 경험했고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찬송과 중보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산악지대 슬레이트 채석장 인부 500명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점심식사 후 모두 산꼭대기로 올라가 흐느끼며 기도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기도로 시작되었던 한 초등학교의 조회시간은 학생들의 회개기도로 인해 오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역사에 남은 웨일즈의 대 부흥이 바로 성찬식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는나의산성교회 첫 성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주의 영을 기쁘게 부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신 보혈과 찢기신 몸이 나를 향한 사랑이심을 깨닫게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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