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누가복음19장1절-10절)

남수연 2011. 10. 26. 12:11

본문은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설교시간부터 들어 알고 있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걸 보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옛 성경엔 뽕나무라고 번역되어 있었죠.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부르시더니 그의 집에서 묵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분이 좋아진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했다는 내용입니다.

세무서장 지위 쯤 되는 사람이 한 선지자를 보기 위해 체면을 구기며 나무 위로 기어 올라 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잇속이 빤한 세무서장이 자기 피보다 귀하게 여기고 벌벌 떨었을 재산을 절 반이나 떼어 나누어주었다는 게 쉽게 공감이 되십니까?

성경에서 부자라고 일컬은 사람이 몇 되지 않습니다.

삭개오가 부자로 불리웠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재벌 쯤 되었을지 모릅니다.

한 500억 쯤 가진 부자라고 해도 반을 떼면 250억이 되는 데 그걸 그 자리에서 당장 가난한 자를 위해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돈 좋아하는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오늘 예배 중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고 즉석에서 재산의 반을 잘라서 헌금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바로 앞 장에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생을 얻을 방법을 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입니다.

율법을 빠짐없이 다 지켰다는 이 청년을 보시고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에 청년은 심각하게 근심어린 얼굴로 돌아가서 다시는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돈과 천국 중에서 돈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삭개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의 뚱딴지 같아 보이는 두 가지 행동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분이 설교 시간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걸 들었습니다.

믿음이 굉장히 좋아지고 있구나 생각해서 놀라왔는 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 넘어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성도님들 정신 잘 차리고 들어셔야 합니다.

말씀 다 끝나고 성령님이 감동하셔서 저금통장 다 털어서 헌금하라고 그러실지도 모릅니다.

 

먼저 삭개오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서 얘기 했듯이 그의 직업은 세리장이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세무서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감정들이 많으십니다.

우리도 월급명세표를 보면 십일조보다 더 많이 띠어가는 소득세에 불쑥 화가 치밀 때가 많지 않습니까?

세금이란 게 국가에선 아무리 거둬도 모자라고 떼이는 사람 쪽에선 항상 억울하기 마련이죠.

프랑스의 루이15세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채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둬 들였는 데 심지어 숨 쉬는 공기에도 세금을 물리려고 했다고 합니다.

17세기 영국에선 창문세를 부과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창문 수가 많으면 부자이기 때문에 창문 수 대로 세금을 부과 한 것입니다.

당연히 집집마다 창문 수를 줄이려고 애를 썼겠죠.

그 덕택에 위층 부터 아래층 까지 하나로 연결 된 영국식 아름다운 창문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수염 깍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수염세를 물렸고 우리나라도 한 때 요정에 출입하는 사람에게 입정세, 개 주인에게 견세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이스라엘도 로마에 혹독한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콜롯세움을 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공중변소에서 수거한 오줌으로 양털 기름을 제거하는 섬유업자들에게 오줌세를 물렸다고하니 로마의 세금 착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죠?

그 유전을 따랐는지 최근에는 로마에서 호텔 등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에게 별도의 여행자 세를 물리고 있다고 하네요.

예수님 당시 세리장은 로마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리를 경매 방식으로 따내고 그 밑에 세리들이 고용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거둔 세금 중에 할당량을 로마에 납부하고 나머지를 자기의 수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소득을 더 많이 챙기려고 공정하지 못한 세금이 부과 될 게 뻔한 상황이죠.

그렇잖아도 혹독한 로마의 과세에 자기 몫까지 얹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원성이 높을 수 밖에요.

로마에 충성하며 착복하는 그들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은 아예 율법을 정해 세리들의 회당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세리는 부정한 짐승 같은 취급을 당했고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었습니다.

돈은 좀 모았을지 모르지만 인간취급은 받지 못하던 게 그 당시 세리들의 처지였습니다.

게다가 1절을 보면 삭개오가 부자라고 꼭 집어서 말씀합니다.

세무서장에다 부자라면 뭔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는 사실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지도 세리의 돈은 안 받는 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무시당하던 직업을 택한 걸 보면 가문도 별 볼일 없고 대책 없이 가난했을 거란 짐작은 갑니다.

삭개오가 멸시받는 세리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도 비슷한 이유일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키가 작았다는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 의하면 난장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력 없는 외모에 가문도 보잘 것 없고 가난에 찌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세금징수원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는 세리가 되었고 열심히 노력해 세리장에 올랐고 원하던 대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이 늘어갈 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습니다.

그가 지나가면 뒤에서 여지없이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이나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멸하는 얼굴로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 사는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모질게 마음을 먹고 눈물을 삼켜도 마음의 상처는 고칠 수 없이 깊어만 가는 것이죠.

네티즌의 독설에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비관 해 자살하기도 하잖습니까?

동네 사람들의 멸시하는 눈길을 느낄 때 마다 삭개오는 자기를 지탱해 줄 돈을 의지했습니다.

돈이 있는 한 더는 무시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더 모으고 모았을 것입니다.

어느새 그에게 돈이 최고의 가치였고 자기를 지켜 줄 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염치와 체면 불구하고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세무서장 삭개오의 행동에서 그의 마음의 결핍과 공허가 느껴지는 것을 봅니다.

때로 간절히 바라던 것들을 이루었는 데 이유없는 허무감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등바등 아끼고 살며 자식들 뒷바라지해 대학까지 다 보내면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자식들 때문에 생기는 빈둥지 증후군도 그런 것이죠.

성취의 멜랑코리란 말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추구해 온 목적을 성취했을 때 기쁨과 더불어 이상하게도 어떤 우울한 감정이 함께 생겨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성취의 순간과 더불어 행복의 순간도 함께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취하고 나면 바라던 목표는 없어지고 오히려 행복의 공백이 찾아오는 것이죠.

그 때 허무감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성취하고 나면 곧 이어 성취의 멜랑코리가 반복되기 때문에 또 다른 목표를 계속 설정한다 해도 성취하고 나면 또 허무해 지는 것이 성취의 멜랑코리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일들에서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아무리 원하던 것을 가진다 해도 완전한 만족은 없다는 결론입니다.

무언가 원하던 것을 더 가진다면 행복할 것 같은 것이 허상이란 말씀입니다.

지금 한 귀퉁이가 비어있는 이 문제로 불행한 것 같지만 그게 채워져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죠.

많이 가진다고 목표를 이룬다고 행복해 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경디모데전서 6장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

오히려 작은 것에도 자족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돈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히브리서 13장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 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 않고 매순간 함께 하시기에 결코 돈이 없어서 불행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지 못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헨리 워드 비쳐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두개의 손잡이를 잡고 살아간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은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저는 우리 성도님들 가정이 물질에 부족함이 없어 누가 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란 걸 다 알 수 있게 부요함이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는 자족하는 믿음이 항상 성도님들마음을 견고하게 붙드시길 또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삭개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비밀을 알지 못했기에 성취의 멜랑코리에 갇힌 이 땅의 인생을 대표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게 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진 한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자기와 같은 세리인 마태라는 사람도 끼여 있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그 사람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정보를 듣고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 가지고 눈에 보이는 물질과 돈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았던 삭개오가 영적인 호기심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 좀 있는 사람의 거만함들 겪어 보셨죠?

삭개오는 마음 속으로 쥐 뿔도 없는 것들이 하며 자신 또한 사람들을 비웃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행렬이 지날 때 길 가 나무에 까지 올라가는 돌발적인 행동을 보였는 지 의문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사로잡아 전봇대에 까지 기어 올라가게 한 것일까요?

지금도 여리고 중심지 입구에 수령 2천년이 넘는 커다란 돌무화과나무가 성지순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성경고고학자들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바로 그 나무로 추정합니다.

길 가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간다면 그가 기피하던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릴 게 뻔한 일이죠.

사람들의 야유와 경멸의 눈초리가 쏟아질 텐 데 그는 왜 그런 파격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정답은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입니다.

우리도 그런 말 자주 쓰게 되지 않습니까?

아,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이 주님의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2절의 앞에 그런데 보라! 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나인성의 과부를 만날 때도 원문에 보라! 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기대했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는 뜻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많은 노선 중에 여리고를 지나 통과해 가시려한 이유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와의 만남을 위해 먼저 그의 마음에 작업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만지지 않으시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영적인 일에 기웃댈 사람들이 아닙니다.

몽0국제대학 교수인 홍순0 전도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연대 법학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불교와 무속신앙이 만연한 부산에서 낳고 성장한 그는 자연스레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법학을 공부하다 보니 더욱 자신의 이성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극단의 안티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주변엔 단 한명의 기독교인도 없었습니다.

그의 주변엔 늘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으로 둘러싸였고 자기 주변 반경 10미터 내에 절대로 기독교인을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잠시 TV를 보다 잠이 드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TV앞에 앉았는 데 50개가 넘는 채널 중 재밌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채널을 계속 돌리다 기독교TV가 나와 버렸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른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기독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며 비판하는 게 법학도로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판을 하려면 뭔지는 좀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설교에 푹 빠져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 TV를 끄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데 어제 보았던 그 방송이 자꾸 생각나고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나는 것입니다.

종일 어수선한 마음으로 해가 질 시간을 기다리다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얼른 기독교 방송을 틀었는 데 설교가 점점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집에 돌아오는 귀가 시간을 점점 빨라지고 매일 말씀을 들으며 그의 마음이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 뒤에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며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장면과 십자가를 메고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세 장면이 마음에 확 겹쳐지며 의자에 앉아 보고 있던 그가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버티고 있던 그의 마음이 무너지며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밤새 머리카락이 다 젖도록 울었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고 생전 처음 경험하는 평안과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성령이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왠지 기독교 방송의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을 계속해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 먹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는 것 같죠?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온 것이 우리 자발적인 의지로 나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벌써 단풍 구경하러 나가고 여기 앉아 계실 분 얼마 안되는 것 같네요.

성령께서 우리 맘에 선한 믿음의 동기를 끊임없이 부여하시고 우리 마음을 부추기시고 격려하시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줄 믿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먼저 있지 않고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나올 영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은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왜 그랬는지 모르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부르셔서 오늘 이곳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는 축복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에게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왠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두근 거림을 느끼며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에 둘러 쌓여 그가 올라 간 나무 아래 까지 걸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무 아래 멈춰섰을 때 삭개오는 순간 낭패와 두려움을 느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야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의 인생에 축포가 터지고 누추한 그의 인생이 일순간 환희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보는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전지하신 신적 능력에 마주 친 순간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는 영적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주님은 삭개오를 향해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속히 해결하고 구원하기 위해 삭개오 보다 주님이 더 서두르고 계십니다.

우리 삶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답답하고 조바심이 나시죠?

주님이 이 문제와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 우리 보다 더 서두르는 마음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의 시선이 이 문제를 떠나서 먼저 주님을 향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삭개오를 향해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오직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갈 때 모든 것이 평안하고 분란은 잠잠해지고 어두움과 절망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는 비로서 잘못 된 재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립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 안에 잘못 된 것들이 바르게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가 재산의 반을 드리는 것은 손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움켜쥐고 있었던 맘몬이란 악한 영의 지배에서 비로서 자유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사는 것 보다 우선되고 집착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그걸 통해 나를 지배하는 악한 영의 세력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우리를 미혹하고 혼돈케 하는 악한 세력이 드러나고 우리 안에서 쫒겨 나가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비추시고 말씀이 우리를 조명하실 때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들이 대적해야 할 악한 세력이고 버려야 할 남루한 쓰레기들임을 보게 하십니다.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는 것만 버려야 할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숨겨 둔 슬픔과 연민과 미움과 부정적인 확신들도 다 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카자흐스탄 장애인 국가대표팀 감독은 한국인 이민0 선교사님입니다.

그가 맡고 있던 팀이 2000년 장애인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나라 팀을 이기고 3위에 올라서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본래 원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과 건강하다는 것과 부처를 알게 된 것이 크게 감사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환자들에게 불교를 전하기 위해 소록도로 들어갔습니다.

나환자가 된 것은 전생에 업보가 많아서 그러니 다음 생에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부처를 믿으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럴 때 마다 한센인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아이구, 예수 믿으면 행복하게 살 텐데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정상인이라 자기 말을 안 믿는다 생각하고 자기도 나병환자가 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나병환자 처럼 눈썹도 밀어버리고 열심히 불교를 전했지만 그때 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믿으라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부처를 안 믿으니 죽은 다음에라도 들으라고 화장터에 가서 목탁을 치고 49재를 드려주는 데 이해 할 수 없는 게 그들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고 아무개 집사 환송식이라는 플랜카드를 걸고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경쟁이라도 하듯 죽는 것을 기뻐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가 목탁을 칠 때 옆에서는 한센인들이 희망이 넘치는 목소리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를 부르는 희한한 장례식이 소록도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렇게 7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좌선하고 염불을 외우던 그의 입에서 갑자기 무심결에 들었던 찬송가들이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것이었습니다.

1시간을 통제불능 상태에서 끊임없이 찬송가가 터져 나오는 성령체험을 하고 나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참 된 가치를 발견한 순간 평생 추구하던 종교를 내려놓는 데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삭개오가 그의 평생 쌓았고 모았던 절대적인 가치를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가 애지중지 하던 것들에다 하나를 더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 난 자연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의 가치관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믿음의 길을 방해하는 세상에 속한 가짜 즐거움이 있다면 진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영의 눈을 열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아이러니하게도 의인입니다.

누가 봐도 죄인인 삭개오의 이름 뜻이 의인이라니 그 이름으로 불리울 때 마다 그가 얼마나 창피하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그의 이름의 뜻대로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의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특별히 죄인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그를 구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신다는 것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덧입고 죄 값을 치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폐색이 짙어진 독일 나치군은 수용소의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 자기 가슴에 붙어 있는 수감 번호가 불리워지면 밖으로 나가야 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모녀가 함께 수감 된 방에 군인들이 들이 닥쳐 수감번호들을 불러댔습니다.

딸의 수감번호가 불리우자 엄마는 다급하게 자기의 옷을 벗어 어린 딸에게 주고 딸의 옷을 벗겨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얼마 뒤 전쟁이 끝나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풀려난 딸은 엄마가 왜 옷을 바꿔 입고 나갔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곤고하고 저주받은 인생들을 대신해 죄인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신 줄 믿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여전히 돈의 노예가 되어 단절 된 인생 조롱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다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았을 것입니다.

초대교부였던 클레멘트는 삭개오가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어 가이샤랴 지방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오늘 주님은 예배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인도하시니 우리 인생에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천국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닫고 세상의 가치들을 버릴 때 주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평안과 축복가운데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주시길 확신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