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나인성의 과부 (누가복음7장11절-17절)

남수연 2011. 9. 30. 12:19

로마의 버질이란 시인은 그의 불후의 시의 한 구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물에는 눈물이 있도다

우리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 뿐 아니라 때로는 슬픔으로 눈물까지 흘려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인생 구석구석에 숨어 있지만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 보다 더 한 슬픔이 있겠습니까?

자식을 앞세우고 통곡하다 혼절하는 모습을 방송에서 볼 때 우리 마음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지난 주 청소년들의 영혼을 치료하고 싶다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9년 전에 자기 아이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나서 이 소원을 갖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순간 그 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았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 까 생각하니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감당키 힘든 슬픔을 당한 나인성의 한 여인을 봅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의 비극 속에 찾아오셨고 고통은 극적인 구원의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으신 줄 믿습니다.

지난 한 주 무엇으로 슬퍼하셨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낙심하게 하고 풀이 죽게 했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주님을 의지하러 나온 우리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해답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의 눈물을 씻기시고 새 소망을 주시는 시간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은 나인이란 성입니다.

지금은 네인이라고 부르는 이 아랍인 마을엔 나인성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고 성지 순례객들이 찾고 있습니다.

본문11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님이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고 제자 뿐 아니라 많은 무리가 동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사건 바로 직전에 예수님이 병들어 죽게 된 한 로마장군의 종을 고쳐주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적으로 질병이 치유되는 현장에 있어 보셨습니까?

초자연적인 세계를 맛볼 때 사람들은 이 땅에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인간에게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생업도 잊은 채 주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살려 준 가버나움에서 이 곳 나인 성 까지는 40킬로 정도로 걸어서 꼬박 하룻 길이 되는 거리입니다.

병든 사람이 치료되는 기적과 예수님의 설교로 영적 세계를 체험한 군중들이 기적의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맛이 세상적인 것에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늘 사로잡고 있는 것이 당장 필요한 돈이고 해결해야 할 세상의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깨달음과 영적 체험은 우리의 의식주의 관심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고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깨닫게 해주실 때 진짜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 영원한 삶에 대한 눈이 열리고 깨닫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 볼 것은 죽음의 행렬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예수님을 따르는 수 많은 무리들이 나인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기쁨과 감격에 들떠있는 무리들이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주친 것은 한 무리의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고 피리를 부는 죽음의 행렬과 주님의 행렬이 마주 친 이 묘한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무리들이 장례 행렬을 보는 순간 고요한 긴장이 흘렀을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말 해석에서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보라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장례의 행렬을 예상하고 이 곳에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죠.

어떤 죽음이든 장례의 행렬은 애절하고 숙연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어머니가 이미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라고 기록합니다.

죽은 아들은 가장 아름다운 청년의 나이입니다.

결코 위로 받을 수 없는 장례식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얼마 전 미국 언론이 죽은 사람의 오른 손을 이식 받는 데 성공한 에밀리 페넬에 대한 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5년 전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잃은 이 20대 엄마는 수술에 성공했지만 평생 면역 억제제를 먹어야만 합니다.

왜 이런 위험한 수술을 받게 되었냐는 질문에 페널은 그냥 내 딸을 양손으로 안고 돌보고 싶어서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왼쪽 눈 밑에 눈물 모양의 문신을 했다는 보도도 있었죠.

어떤 일을 하든 울고 있을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을 앞세운 아버지는 아마 평생을 마음으로 울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망의 비극이 한 여인의 문제만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나인성의 많은 무리들이 이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함께 성에서 나오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이렇게 항상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은 이웃의 아들의 죽음에 직면했지만 내일은 내 부모님의 죽음을 직면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직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정해진 순서도 없이 우리 또한 이 땅의 인생살이를 끝내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곤경이 바로 이 죽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인도의 시위성에 고다미라는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인에게 외동아들은 유일한 삶의 보람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동아들이 하루 밤 아파 눕더니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아이를 살려 줄 사람 없냐고 미친듯이 돌아다녔습니다.

보다 못한 석가의 제자가 석가모니를 찾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아이를 안고 석가를 찾아가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생각하던 석가는 아이를 살리려면 마을에 가서 겨자씨 너댓 알을 얻어오라고 말했습니다.

단, 아직까지 한 번도 죽어나간 사람이 없는 집 것이란 조건입니다.

어머니는 희망을 갖고 즉시 마을로 내려가 겨자씨를 구하러 다녔지만 아직까지 죽음을 당해보지 않은 집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결국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깨닫고 힘없이 되돌아왔습니다.

석가는 허허 웃으며 말했습니다.

보시오. 죽음은 부인 아들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찾아오는 걸 나인들 어떻게 하겠소.

죽음이 내게도 닥쳐온다는 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그것을 깨닫고 사는 것 만해도 선각자 석가모니처럼 큰 깨달음이란 것이죠.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죽음은 의식도 않고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년 정도가 아니라 이 땅에서 아주 영원히 살 것 처럼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 두고 어느 날 덜컥 떠나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정해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분이 오늘 나인성에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석가는 인간의 소관 밖인 인생의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을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 오늘 이 곳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마라톤 거리만큼이나 먼 길을 걸어 사망에 직면한 여인과 그의 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이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인성의 죽음의 장례 행렬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인생의 두렵고도 필연적인 죽음의 공포를 거두어 가신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죽음 뒤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저 천국의 진짜 삶이 있음을 확신하고 두려움 없는 소망을 갖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죽음의 행렬을 막아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3절을 보면 쓰러질 듯 비탄에 잠긴 과부여인을 보시고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헬라어 원문의 해석은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말합니다.

어느 누가 남의 슬픔을 자기의 고통과 똑같이 아파하겠습니까?

부모님 외에는 이 땅에서 내 슬픔을 같이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느끼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사망의 슬픔을 겪어야만 하는 인간의 고통에 창조주의 마음이 똑같이 고통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씻기시고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줄 믿습니다.

누군가는 주님이 우리를 구하러 이 땅에 오실 때 마치 다이빙을 하듯 뛰어들어오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망을 해결 할 유일한 주님의 방법은 자신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을 대신하기 위해 주님이 죽으심이 필요했습니다.

14절에 보면 주님이 가까이 가서 아들의 관에 손을 대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죽은 시신이나 무덤을 만지면 죽은 자의 죄가 옮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신에 대해 엄숙한 경고를 내리십니다.

레위기 21장 11절을 보면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9장 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청년의 죽음에 손을 대심으로 청년의 죄는 주님의 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지셨고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심판 받고 청년도 우리도 구원을 받게 된 줄 믿습니다.

오늘 울고 있는 과부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한 과부 어머니의 비통함을 보게 됩니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가 24세에 조각한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죠.

이 비극적인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었는지 찬탄이 절로 나오는 작품입니다.

자신도 자기 작품에 스스로 감동해 성모 마리아의 어깨 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하죠.

그런데 밖으로 나오다 노을이 지는 석양을 보고 크게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어디에도 하나님은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셨는 다는 걸 깨닫고 그 후에는 어느 작품에도 자신의 사인을 남기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위에서 볼 때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자기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직 하나님만 보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에서 죽은 예수님을 무릎에 눕히고 바라보는 마리아의 얼굴에는 비탄의 표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죽은 몸은 대리석의 매끄러운 질감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바라보는 그 작품에는 당연히 있어야 참혹한 예수님의 고통과 울부짖는 모정이 없습니다.

89세의 미켈란젤로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또 하나의 피에타 상을 조각하고 있었습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란 조각입니다.

그가 죽을 때 까지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한 이 투박하고 거친 조각은 마치 깨어진 질그릇 같습니다.

거칠게 깎인 돌 표면은 채찍에 맞아 찢어진 주님의 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미완성인 마리아의 얼굴은 일그러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뒤에서 힘겹게 예수님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데 어떻게 보면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 같은 신비한 모습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미켈란젤로에게 외적인 아름다움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꺼져가는 마지막 호흡을 다하여 자기를 구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표현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죽음의 행렬을 막으시려 오셨기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흐느끼는 과부를 보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가 눈물 흘릴 때 울지 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눈에서 눈물을 거둬 줄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눈물을 거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그저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우리 눈물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기에 눈물을 거두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우리 마음에 고통이 있을 때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하나님 앞으로 나가시길 원합니다.

 

세 번째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주검은 태초의 죄로 인해 오게 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판결이 내린 심판의 증거인 주검에 감히 손을 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내려진 영원한 판결인 죽음을 다루 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향해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자가 생명이 돌아와 즉시 일어나 앉았다고 기록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관은 뚜껑이 없는 들 것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리들은 너무 놀라 충격을 받고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시체가 벌떡 일어나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16절에 보니 그들이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만일 주님이 네게 말하노니를 생략하셨더라면 죽었던 청년들이 모두 다 일어났을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죽어 혼이 떠난 청년을 살아나게 하신 게 믿어지십니까?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직업이 의사입니다.

죽어서 장사를 지낸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는 것을 무턱대고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믿으라고 누가복음을 써 보낼 만큼 우둔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의사 누가는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십니다.

서울대 의대 해부학과에 비타민C박사라고 알려진 이0재교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일찍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교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순탄하고 축복 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40년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지만 늘 주검을 다루다 보니 생명과 죽음의 차이를 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법의학 교수와 함께 한 시신을 부검하게 되었습니다.

흰 가운을 입고 부검대에 시신을 뉘여 놓고 잘드는 칼을 준비했는 데 그날 따라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살아있는 나와 누워있는 이 시신의 차이가 무얼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인 또다시 떠올랐습니다.

시신의 피부를 만지자 자신의 피부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을 절개하려는 순간 시신이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을 애써 억제하고 용기를 내어 날카로운 칼을 댔으나 시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주 망연하게 앞을 바라보았는 데 창세기2장7절의 말씀이 마치 영화의 자막처럼 그의 눈 앞에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기를 주시기에 우리가 살아있는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거두시면 곧 바로 눈 앞에 이 시신 같이 되버리는 게 연약한 인간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편 104장 29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서 삶을 누리게 하시고 또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 아멘.

로마서8장11절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마지막으로 나인성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나인이란 말은 즐거움, 기쁨이란 뜻입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죠.

나인성엔 세상적인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에 직면하면 그 성을 벗어나 장례행렬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 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6장17절에 보면 주님을 찾아 온 사람 중에는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인 성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였던 갈릴리 지역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주님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성을 빠져 나와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의 현장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복음을 외쳐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마치 고치 안에 틀어 박히듯 안주하며 세상의 것들을 탐닉할 때 우리가 사랑하던 것의 죽음과 직면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안주하던 죄악의 나인성을 등지고 나오도록 우리의 고통을 잠시 묵인할 때가 있으십니다.

오늘 장례행렬과 마주친 그들 중 그 누구도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 죽은 아들의 어머니조차 주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 성의 그 누구도 자신의 죄를 속해 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던 그 무엇과의 결별을 통해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구하0교회를 개척한 김인0 목사님이 계십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던 목사님은 세상친구들과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 교회는 뒷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도 확실치 않고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논리는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좋은 언니가 이러다 큰일난다 교회나가라고 간청했지만 귀찮은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러다 원인도 모르고 온 몸이 마비되는 병으로 꼼짝을 못하고 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다니던 교회 권사님과 언니가 떼매고 한얼산 기도원으로 올라가 강대상 앞에 목사님을 눕혀 놓았는 데 온 몸이 마비되었으니 싫어도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 온 모두가 다 미친 사람들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이천석 목사님이 안수기도를 해주시는 데 머리 끝부터 뜨거운 기운이 임하더니 온 몸에 마비가 순식간에 풀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치유를 경험하고도 또 다시 세상의 즐거움만 쫒아 또 교회를 떠난 김목사님에게 더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찾아왔는 데 너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네 아들 데려가신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첫 딸 뒤에 둘째 아들을 낳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세 살 난 아들이 아무 병 없이 잘 크고 걱정 근심하나 없었습니다.

난데 없는 언니의 말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조카에게 할 소리냐며 화를 내자 언니도 미안하다며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아들의 머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뇌수종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는 새 하나님 도와주세요란 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은 자기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을 줘?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을거야라는 강팍한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수술 후 아들은 회복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김목사님은 통곡을 하며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다면 우리 아들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관예배를 드리는 데 사모님이 툭 치면 저기 좀 봐!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천사들에게 안긴 아들이 자기에게 손을 흔들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환상으로 보였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이 아들을 좋은 천국에 인도하신 걸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또 교회를 벗어나 하나님을 등진 목사님은 결국 큰 재산을 다 잃고 반지하 단칸방에 나 앉아서야 완전히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정말 얼마나 질긴 게 인간의 죄성이고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지 이 분 간증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큰 아픔들을 통해 겨우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아서 채워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나니 너무 너무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쩌면 오늘 본문의 해피엔딩과 달리 죽은 아들을 돌려 받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대신 김목사님은 전도해서 얻은 수만명의 영적 아들을 갖는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세찬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고난 조차도 반드시 축복으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후의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눈물과 통곡은 놀라움과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행과 함께 다시 나인성으로 들어가 축제를 벌이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한 나인성은 그 성의 뜻대로 진정한 기쁨의 성이 된 것이죠.

주님과 함께 할 때 비로서 이 세상도 기쁨의 성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해결 받지 못한 문제, 고통당하는 문제의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 속에는 우리를 세상의 기쁨의 성 나인으로부터 끌어내시고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둥지가 우리를 아프게 하면 주님 앞으로 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시험을 감당할 믿음을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기쁨의 성 나인으로 우리와 동행하실 줄을 확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