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누가복음10장25절-37절)

남수연 2011. 5. 17. 15:01

 

 

오늘 본문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상대로 영생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 율법교사였으니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법입니다.

구약 시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가진 유대인의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율법이 유대인의 모든 생활의 기준이고 잣대가 되어 왔습니다.

몇 년 전 이스라엘 법무장관이 이 율법을 구속력 있는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율법이 이스라엘의 실정법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율법교사는 율법을 통한 구원을 혼란케 하는 예수님과 맞짱을 뜨려고 단단히 벼른 것 같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여느 때와 같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병도 고치고 말씀도 듣는 때 였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일어나더니 영생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주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누구나 영생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니고데모란 사람도 남의 눈을 피해가면서 영생에 대해 주님께 물으러 온 적이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모인 사람들의 귀가 번쩍 뜨일 주제를 던져 놓고 주님의 답변에 반박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순간 회중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았을 겁니다.

오늘 율법교사가 질문을 아주 잘 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영생에 대해 말씀을 나누며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 다음에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찾게 되고 내세를 상상해 보고 천국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막연하게나마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세계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기에 종교를 찾기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한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세는 없으니 차라리 이 한 세상 실컷 즐기며 살자는 부류도 있습니다.

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인생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염세주의도 있죠.

인생의 고통을 참느니 차라리 자살을 선택합니다.

죽음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죽은 다음 영혼의 거취 문제에 대해 인간 내면엔 깊은 두려움과 갈증으로 억눌려 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인간에겐 채울 수 없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프로그램 중에 나는가수다 란 프로가 있죠.

그 중에 가수 이0범씨가 부른 빈 잔이란 노래가 인터넷에서 극찬을 받고 있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불렀나 저도 궁금해서 한 번 들어봤습니다.

그게 옛날 남0씨가 불렀던 노래잖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이 부른 똑같은 노래가 느낌이 많이 다르더군요.

남0의 노래는 우리가 노래방에서 많이 부르던 노래 그대로입니다.

술집에 앉아 상대 여인에게 그대의 남은 술로 나의 빈 잔을 좀 채워서 외로움을 달래 달라는 그 정도 감상적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나가수에서 임모 가수가 부른 빈 잔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그의 깊은 심령에서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을 제발 좀 채워달라는 절규에 가깝습니다.

저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 그 노래를 부르는 그의 퀭한 두 눈과 배 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올리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감동보다는 절규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기들 내면에 있는 알 수 없었던 갈증을 그가 끌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현대인이 물질의 풍요와 감각적인 것을 즐기며 산다 해도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갈증이 사람들의 목을 졸라오니 악을 써서 라도 그 갈증을 끓어 내고 좀 채워달라는 호소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남은 술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이죠.

영적인 것엔 관심도 없고 물질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인 것 같은 곳에 한 번씩 기웃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해하고 경험한 것을 믿지만 영적인 존재이기에 초경험적인 영적인 세계를 대면하면 판단력을 잃고 쉽게 빠져들기도 합니다.

통일교같은 이단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최고의 지식을 자랑하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강의하던 한 교수가 문0명의 원리강론을 읽어보니 허점투성이에 조잡하게 구성 된 이론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문선명씨를 직접 만나 통일교의 원리강론의 허점을 짚어 주려 한 판 붙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지금 문0명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 교수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성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사탄의 세력 하에 있는 초경험적인 세계에 들이 댄 것입니다.

결과는 참담할 뿐이죠.

경험한 것 만을 옳다고 살던 사람이 초경험적인 악한 영의 세계에 도전하는 것은 싸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점을 보고 무당을 찾고 영매에 접촉하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악령은 결코 성령님 같은 온유한 인격으로 인간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재범의 빈 잔은 영생에 대한 인간의 목마름이고 창조주를 만나지 못한 자의 외로움이었습니다.

그의 공허한 두 눈을 바라보며 다윗의 시편 23편이 떠올랐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창조주를 만난 사람의 배부르고 만족한 고백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우리가 죽으면 저 천국이 확실히 있고 내가 거기 가서 하나님 앞에 설 것이 믿어지십니까?

아멘입니다.

보이지 않고 가보지 못했지만 그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세와 영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3장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느낌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체험을 듣고서도 아닙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우리 모두 영생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름 마음에 평안을 얻고 뭔가 믿는 구석이 생긴 것은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뭔가 확실치는 않아도 초경험적인 세계에 우리가 들어왔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아버지와의 친분이 생겼다는 것이 작게나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생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 율법사는 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까요?

이 율법사는 유대인이라면 다 그렇듯이 율법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고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할 일은 당연히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명기27장26절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격 박탈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부지런히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말씀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자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과 모세가 오경에 기록한 세부 조항과 종교인들이 덧붙인 것 까지 실로 방대한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 관련 된 것만도 613개의 율법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 법대로 다 지키며 살겠습니까?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이나 율법을 지키지 평범한 유대인들은 아예 율법을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죄인과 세리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백성들의 혈세를 가로채먹는 세리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에게는 황당한 일이죠.

법도 지키지 않는 그들에게 무죄 선고가 말이 됩니까?

오늘 그는 예수님을 향해 도대체 당신의 구원관은 무엇입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구원받을 다른 길은 뭐냐는 겁니다.

착한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가기독교와 다른 인간의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절대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사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속셈을 품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걸 보면 참 재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언제고 상대의 꿍꿍이를 아시고 옴짝달싹 못할 답변을 하시죠.

잘난 척 하는 인간의 죄와 허점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철없이 들이대는 인간의 도전을 가차 없이 징벌하고 혼내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그들이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오늘 율법사는 만일 예수님이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율법대로 행하지 않은 예수님을 정죄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금식도 안하고 죄인과 어울려 밥을 함께 먹는 그런 율법 위반 항목을 철저히 뒷조사 해 두었을테죠.

만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는 죄인으로 정죄할 것입니다.

그는 어쨌든 이 논쟁에서 자기가 이길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께 도전장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빙긋이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되묻습니다.

네가 전공 한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러자 그는 전공자답게 사람들 앞에서 한껏 자신 있게 율법 전체의 뜻을 요약합니다.

27절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행하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율법을 가리키기만 하는 율법사는 행하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예상치 못했던 쪽으로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돼 버립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율법의 본질인 행동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이야 말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가르치고 실천하시니 율법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율법교사는 끝까지 자기를 옳게 보이려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아니,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는 회심의 미소가 있습니다.

율법대로 라면 이웃이라면 유대인이요, 하나님을 믿는 자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이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냐는 것이죠.

그들과 어울리며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자란 뜻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협곡이 많아 그 당시 강도떼가 많이 나타나던 곳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뺏기고 만신창이가 되게 얻어 맞아 방치하면 죽게 될 지경에 이릅니다.

그 때 행인 1이 지나갑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가 제사장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같은 유대인에다 율법의 집행자이니 당연히 이웃이겠죠.

그런데 그는 율법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항목을 알지 못하는 척 그냥 지나쳐갑니다.

다음 행인2는 레위인이었습니다.

율법을 맡아 가르치고 보존하는 그 역시 이웃을 죽게 버려두고 지나쳐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인3은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이 경멸하고 상종도 않는 혼혈 유대인이죠.

율법대로 하면 그는 이웃의 범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쓰러져 있는 유대인에게 자비의 손을 내밀어 죽을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주님이 물으십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 잘 지킨다고 큰 소리치던 제사장, 레위인을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율법 없이 망할 자들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사마리아인도 죽을 나를 살려주면 이웃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자기 입으로 시인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8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라며 주님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비유의 주인공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을 구해주는 유일한 이웃이란 것을 그가 깨달았다면 참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뜹뜨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한 마디 던지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해라.

이 말씀은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정말 행동으로 이웃을 사랑해라 라는 말씀이겠죠.

그러나 그 말씀 속에는 어디 할 수 있으면 힘껏 해 보아라.

그리고 되지 않을테니 나를 찾아오너라 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느껴집니다.

율법교사는 돌아가서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힘써 사랑하고 이웃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계명은 인간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고 나서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까?

우리가 남을 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까?

그게 안되는 게 죄인의 한계입니다.

간혹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큰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죠.

남을 돕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의사상자라고 하는 데 한결 같이 좋은 일 한 걸 후회한다고 합니다.

몇 년 전 개인사업을 하던 남영식씨가 퇴근하는 도중에 강도야 하는 소리를 듣고 뛰어가 강도와 싸우다 전치 4주의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남씨는 당시 사건을 맡은 경찰관에게 병원비는 어디서 보상받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경찰은 피의자인 강도에게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했답니다.

나중에 검찰에 가서 의사상자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렵게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사건 당시 다리를 크게 다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져 불행한 삶을 삽니다.

그러니 이런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기피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걸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에 탤런트 김0희씨가 주연한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란 드라마가 있었죠.

거기서 김0희는 파티 도중에 쓰러진 사람을 위해 응급처치를 합니다.

그러나 불법의료행위로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죠.

그 때 선한 사마리아인 법에 따라 무죄가 됩니다.

응급환자를 도와주다 잘못된다 해도 고의가 아닌 경우 도와준 사람을 보호하는 법입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타인의 응급사항이나 위험에 처한 것을 보았을 때 구조해 줄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못 본 척할 경우 3개월에서 5년까지 징역 처벌이 있다니 프랑스에 가시면 조심해야 겠습니다.

이런 사회적 법규들이 모두 위험에 처한 이웃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선한사마리아인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를 주눅 들게 합니다.

남은커녕 내 가족도 제대로 사랑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게 우리 형편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구원받은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젠 성령께서 우리 맘에 오셔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을 성령님의 도움으로 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수 정0희씨가 하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음악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탁월한 노래 실력으로 일찍 가요계에 데뷔합니다.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안개 속에 빠뜨렸던 안개라는 노래를 부른 때가 17살이었습니다.

순식간에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과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더 탐닉한 그는 대마초 사건에 발목이 잡힙니다.

5년을 방송과 가수 활동 금지 상태가 되니 잡은 줄 알았던 모든 것이 모래 처럼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연예인 교회에 나가며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활동이 재계 되어 다시 가수활동을 하다 보니 교회는 뒷 전이고 또 세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가수 김0씨와 결혼을 하고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을 사는 듯했습니다.

또 남편 주변에 항상 둘러싸인 여자들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자기가 남편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인생이 살기 싫어졌습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상실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오직 나만을 좀 사랑해 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이 격동 된 마음으로 교회로 달려가 바닥에 퍼져 앉아 하염없이 울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자 사랑받지 못한 모든 상처가 한 순간에 치유되었습니다.

남편을 보니 그렇게 원망했던 마음이 간데 없고 오히려 측은히 보여 사랑으로 덮어주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이 긴 세월을 부부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남편을 사랑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에서 처절하게 강도에게 빼앗기고 얻어 맞은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이웃이 바로 이런 만신창이가 된 가련한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누구를 떠올려도 너나할 것 없이 강도만난 사람처럼 상하고 깨진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상처받고 기가 죽고 상심한 모습으로 인생의 무게에 눌려 쓰러져 있는 우리 가족도 바로 강도만난 이웃입니다.

인생의 모진 풍파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상처와 고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우리 가족과 이웃의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먼저 우리 가족이 서로의 상처를 싸매주고 안아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강도만난 사람처럼 살 길 막막한 인생의 바닥에 주저앉아 낙심하고 죽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주님이 내 곁에 다가 오셨습니다.

나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나를 업고 쉴 만한 안식처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런 사랑으로 구원받고 치유 받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해라.

왜 주님께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나만 사랑한다고 우리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절대로 내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을 쫓다가는 결국 강도 같은 악한 자에게 강탈 당하고 모든 걸 잃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과 공중 권세 잡은 악의 세력은 한 집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할 때 오히려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세상을 대할 때 마다 매사에 성령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며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면 우리 앞의 세상과 만사를 능히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도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지독히 자기만을 위하고 사랑하는 병이 애정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애정결핍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베풀 때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심판의 날 인간들은 율법에 명시 된 죄목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그들보다 더 나은 의를 준비하셨습니까?

우리가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행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이웃을 내 자신 처럼 사랑하지 못한 죄를 또한 주님이 당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맘에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긴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순종하려할 때 성령님이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힘써 주님이 새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