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제목이 변화산인데 이스라엘에 변화산이란 산은 없습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신 산에서 용모가 변화되셨기에 그 산 이름을 변화산이라고 보통 부릅니다.
제자들이 산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서 그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경의 기록들을 추정해 다볼산이란 곳이 바로 이 변화산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많이 있습니다.
1921년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예수님 변화 교회를 이곳에 세웠지만 정확한 증거가 없어서 성지 순례객들도 이곳을 잘 찾지는 않습니다.
그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다하더라도 오늘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주님의 생애 가운데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며 이 변화산 사건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우리의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은혜를 성령께서 부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 일주일 전후해서 발생한 일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 말하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해서 예수님께 백점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니
유대인들이야 선지자다 랍비다 아니다 이단자다 하며 의견이 분분할 수 밖에 없었죠.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랍비다, 기독교의 교주다, 심지어 전설 속에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인터뷰 내용을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일반적인 상식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기독교인구가 25%라 하는 우리나라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황당한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관객에게 십계명 중 하나를 대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무도 그보다 더 나은 답을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필립 얀시의 책을 보니 미국 성인의 50퍼센트가 첫 성경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창세기라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14퍼센트는 잔다르크가 노아의 아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 하는 사람들도 이런 기본적인 성경 내용도 모르는 데 과연 무엇을 믿고 어떻게 구원받는 지를 제대로 알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긴 했으나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백점짜리 정답을 듣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해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절대 안됩니다. 라고 강하게 항변 했다가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속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사역을 이 땅에서 왕국을 세우는 일로 이해하고 그것만을 원했습니다.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고 오랜 기독교 역사를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그당시 제자들이 정통한 지식을 갖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그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진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해주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과연 누구인지를 제자들이 확실히 알도록 변화산으로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한번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본문은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만을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29절에 보니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그동안 그들이 보아 오던 인간의 몸이 아닌 천상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셨다고 말씀합니다.
같은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 보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라고 말합니다.
또 마가복음에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낡은 옷이 이 세상에서 구경한 적 없는 신비한 흰색으로 바뀐 것이 제자들 눈에 무척 신기했나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런 빛나는 얼굴을 했던 사람이 구약 시대에 한 사람 있었죠?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율법을 받고 40일만에 내려왔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이 그의 얼굴에 투영되어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그 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만 쳐다보는 바람에 결국 모세가 백성들 앞에 나올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왔다고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투영 된 하나님의 광채도 그렇게 대단했으니 지금 주님의 영광의 광채를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겠죠.
이것이 우리 주님의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달라던 빌립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너무 좋았을 뻔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땅의 여느 종교 창시자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인간의 역사는 예수님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죄가 있는 인간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인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죄로 인해 죽을 뿐입니다.
세상은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주님이 행하신 숱한 기적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얘기하던 예수님이 단지 선지자나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한 자리가 바로 변화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믿으라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진정 우리 마음으로부터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주인이십니다 란 고백이 있으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비밀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명확히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상징하는 중요한 두 인물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1위는 여전히 이순신 장군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말하자면 유대인이 가장 숭상하는 구약시대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이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이 두 사람을 변화산에 특사로 파견하셨습니다.
천국은 지금 인류 구속의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발칵 뒤집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에 골아 떨어진 제자들 처럼 죄의 깊은 잠에 빠져 있지만 천국은 인류 구원의 완성을 앞두고 모두 숨을 죽인채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임박해 온 아들의 죽음에 고통스런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은 이들을 내려 보내 주님께 힘을 주고 위로하고 싶으셨겠지요.
수능 시험 전날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참 복잡하고 비장하더군요.
수험장으로 들어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파견 된 두 사람은 예수님이 별세하실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셔야 했을까요?
그들의 사역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보다 확실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추종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기적을 보여줘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며 요한복음9장 2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는 애굽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주인공입니다.
그가 변화산에 온 것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 처럼 예수님께서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 했다고 번역되었지만
원문에 쓰인 단어는 모세의 출애굽을 말하는 엑소더스란 단어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전 인류의 영적 출애굽사건 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한 또 한사람 엘리야가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을 혼자 대항했던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최고의 선지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많은 기적에 놀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이 사람이 혹시 엘리야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예언을 믿었습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라는 예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엘리야라는 인물은 그리스도의 출현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이 두 위대한 인물을 보내신 이유를 종합해 보면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전 인류를 죄에서 탈출 시킬 메시야로서의 사역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그 십자가의 사역이 바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 것임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영적원리를 하나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본문의 두 사람이 영입니까 아니면 몸을 갖고 있습니까?
그들을 보고 베드로가 초막을 짓고 같이 살자고 한 것을 보면 영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모습으로 내려왔다는 걸 알 수 있죠.
이 둘의 공통점은 이 세상에 무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열왕기하2장11절에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지라.
모세는 가나안 땅을 코 앞에 두고 느보산에서 죽었지만 그의 무덤이 없습니다.
유다서 1장 9절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시신을 천사가 취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는 영이 아닙니다.
육체를 떠난 영은 절대로 이 땅에 내려올 수 없는 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오늘 하늘과 땅을 오갈 수 있도록 오래 전에 하나님은 두 사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강신술로 불러내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둘 중 하나죠.
사기거나 아니면 강신술자가 악령에 붙들려 악령의 의도대로 속아서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고정00 양의 어머니가 자식을 한번 보고 싶은 애끓는 모정으로 00양의 혼을 불러달라고 무당을 찾아간 이야기가 케이블 채널에 방송되어 논란이 되었었죠.
이날 모 방송에서 정00양의 원혼과 무당이 접신되었다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습니다.
죽기 전 마셨다는 레몬소주를 가져오라더니 무당은 마치 고인이 된 듯이 거침없는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내용은 술좌석에서 후배들과 한 이야기와 연인과의 불화설 같은 것이었습니다.
평소 엄마와 나누었던 얘기들도 들먹이고 동생 걱정도 했습니다.
사실 그런 내용쯤이야 이미 보도 된 사실이고 당시 고인의 가정사가 인터넷에 많이 떠돌았으니 크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죠.
여성민우회는 이 프로그램을 이달의 나쁜 프로그램으로 선정했습니다.
고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실과 무관한 얘기를 무당의 입으로 내 뱉음으로 고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흥미위주의 상업주의적 방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이라면 정00양에 대한 친근했던 과거의 추억보다 무당의 입을 통해 원망을 쏟아 붓던 무서운 모습만 생각났을 겁니다.
악령들은 또 얼마든지 사람들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류역사와 함께 했고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온 존재들이기에 우리와 가문의 과거사를 속속히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로든, 인간의 형상으로든 죽은 자를 가장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려합니다.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사후 세계에 대한 본질을 흐리려는 것입니다.
절대로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은 영혼은 이 땅에 배회할 수 도 없고 부른다고 내려올 수도 없습니다.
주안에서 죽음을 맞는 성도들은 천국으로 인도를 받고 주님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이제 곧 설 명절을 맞아 가정마다 제사를 많이 지내게 되는 데 돌아가신 부모님, 조상님들 절대로 내려오시지 못합니다.
술 붓고 제사하며 절 할 때 그 자리에서 주인 행세하는 건 타락한 악령 마귀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린도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래서 믿음 안에서 우리는 추도예배를 드리며 부모님을 추모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과의 교제와 접촉은 절대적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정00 양의 방송을 보고도 무서워서 잠을 못자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며칠 전에도 무당에게 속고 그 저주가 두려워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회사돈을 횡령해 177억이나 갖다 바친 이해불가의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점을 보고 무당을 찾고 무속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은 영혼을 유린당하고 물질을 잃고 몰락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5장 1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우리의 모든 길을 오직 하나님께 물으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세 번째로 본문을 통해 우리도 변화산의 체험을 사모하길 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주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깊이 졸았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참 잠이 많은 걸 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자고 산에 데려가시면 결국엔 항상 잠이 들어버립니다.
연약한 우리 모습과 많이 비슷합니다.
중언부언 기도하다 결국은 잠들어 버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 이미 다 보셨기에 우리를 다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나태하고 무기력한 신앙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질 때 잠에서 순식간에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떠 보니 천상의 공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땅에서 본 적이 없는 황홀함에 빠져 들어갑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있으니 제자들이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립니다.
자기의 이성으로 감당 못하는 천상의 사건을 대하자 베드로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지성과 사고력이 제 기능을 못합니다.
떠나려는 모세와 엘리야를 붙들려고 합니다.
초막을 셋 지을 테니 아예 여기서 눌러 사시라는 겁니다.
그들은 정신을 놓을 정도의 충격과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장소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있더라도 한번 맛보면 절대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입니다.
이런 영광을 맛 본 사람은 이 세상의 빛이 거기에 비해 얼마나 누추하고 맥 빠지는 것인지를 알기에 좀 더 깊이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자꾸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변화 된 삶을 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자신이 목격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목격자인 베드로는 나중에 베드로후서1장16절에 오늘 본 사건을 기록합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한 명의 목격자인 요한은 변화산의 체험을 요한복음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밧모라는 섬에서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인류 종말의 시나리오를 환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 완벽한 영광 중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요한계시록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또 한명의 증인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12장1절에 보면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그는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체험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함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팔레스타인의 저격수였다’라는 책을 쓰고 영화 용서에 출연한 타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그는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폭력성에 회의를 갖게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예수가 실제로는 누구인지 성경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를 향해 한줄기 빛이 다가오더니 그 빛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라는 말씀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제 삶에 들어 오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죽기를 작정한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내걸고 팔레스타인 여리고에서 지금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라파트가 죽기 6개월 전에 그에게도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변화산의 주님, 영광의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철학과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길 원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을 드러내시고 함께 살길 원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본 사람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에 되는 게 없고 가진 게 없어도 왠지 당당한 것을 봅니다.
아무 이유 없는 데 근심으로 억눌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짜증과 화로 격동하는 삶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변화산의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기도의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영광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할 뿐만 아니라 또 예수님과 만나기를 간절히 구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벌떡 일어나지 마시고 조용히 하나님을 향해 기다리십시오.
무언가 하나님의 응답을 맛보기 전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 것도 느끼지도 체험하지도 못하는 메마른 기도를 반복하다보면 오히려 기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만 가질 수 도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든, 잔잔한 기쁨이든, 어떤 깨달음이든, 지혜로운 해결 방법이든, 말씀 한 구절이든,
주실 때까지 하나님께 구하며 기다리다 보면 점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맛보고 체험해야 우리 믿음이 담대해지고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경 속의 예수님 뿐 아니라 변화산의 주님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요즘 교회에서 조차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잃어가고 있는 심각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자상한 사랑에 위로 받고 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능하신 영광의 주님 앞에 거룩한 경외심을 갖고 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시려고 기다리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기도의 변화산에 올라가 살아계신 영광의 주님을 만나시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 앞에서든 당당하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고 김0중 대통령은 1973년 동경 납치사건 당시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일본 동경에서 납치돼 현해탄 바닷물에 던져지기 바로 직전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밧줄을 끊을 수가 없을까 손에 힘도 줘봤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오셔서 옆에 서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소매를 붙잡고 예수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 때 펑하는 소리가 나며 조명탄이 터지고 깜깜했던 주변이 대낮 같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묶었던 정보부원들이 '비행기다'하면서 그를 던지려던 손을 멈추고 도망가더라는 것입니다.
김0중대통령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 거기서 예수님을 실제로 뵈었는데 그 순간이 내가 살아난 순간이었어요.
그 때 조금만 늦었으면 바다에 던져져 죽었을 겁니다. 나는 확실히 예수님을 만났고 믿어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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