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불의한 재판관 비유(누가복음18장1절-8절)

남수연 2010. 9. 27. 18:15

 

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해주어야 할까요?

몇 달 전 동행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가시고기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위암으로 위를 완전히 절제한 아버지는 가난으로 인해 후속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그만 간암으로 전이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력장애와 뇌병변으로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보다 남겨질 가족 걱정으로 애를 태우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저 남겨질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어느날 그는 두 아들 이름의 저금통장을 아내에게 건냅니다.

봉투를 접어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가 생활비를 조금씩 떼어 만든 통장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빠는 12살 아들에게 쌀을 씻고 밥을 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도마 위에 파를 올리고 써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서툰 아들의 칼질에 마음이 조마 조마해 연신 주의를 줍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 준 것은 먹고 살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초라한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숭고한 사랑에 숙연해 지고 눈물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끔찍한 고통을 이미 느끼고 계셨고 사랑하는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 갈 것도 아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극심한 두려움의 상황이었음에도 주님은 자신의 고통보다 두고 가는 연약한 제자들만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은 항상 연민과 안쓰러움이 우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전도하러 가는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하고 걱정스런 심경을 비치셨습니다.

게다가 이제 그들은 스스로 당면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박해를 무릎 쓴 복음전파의 가시밭 길도 가야합니다.

걱정과 근심에 쌓여있는 연약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오늘 당부하시고 또 당부하십니다.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방법은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항상 기도하고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충분히 가르치셨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쳤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귀에 딱지가 않도록 또 기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콱 각인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나쁜재판관을 비유로 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한 가련한 여인과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항상 기도해야 할 우리들을 가련한 과부로, 응답하실 하나님을 재판관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결국은 누구나 이렇게 힘없이 약하고 아무 의지할 곳 없는 가련한 여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남겨질 제자들도 우리들도 실상은 여인과 다름없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본문에 보니 억울한 일 까지 당하였습니다.

팍팍하고 살아가기도 힘들고 누구하나 의지할 곳도 없는 데 설상가상 억울한 일까지 당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이 억울한 여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 이 억울함을 풀고 보상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도시의 재판관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힘없는 인간은 무시하는 속물이라고 합니다.

4절에 보면 스스로 자신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진짜 못된 재판관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라면 하나님 무서워서 올바른 판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인정머리라도 좀 있으면 힘없고 가련한 여인을 불쌍히 보고 억울함을 풀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여인은 딱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주저앉고 싶었을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터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만만치 않은 삶이 우리들의 앞에 항상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원치 않지만 크고 작은 문제로 근심이 떠날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만 잘 넘어가면 좀 살 수 있을 것 같았는 데 겨우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덜컥 앞을 가로막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련한 여인 처럼 숨 돌릴 틈 없이 우환이 겹쳐 오기도 합니다.

정말 단 하루인들 근심 걱정 염려 없이 마냥 좋기만 한 날이 있었나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약한 우리는 이 세상의 염려에 짓눌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빼앗기고 곤고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뒤흔들고 요동케 하는 세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환란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기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기도해라, 내가 들어주겠다!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약속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 여인을 보십시오.

이제는 포기하고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여인은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재판관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상대방은 이미 이 불의하고 속물스런 재판관에게 뒷 돈이라도 건네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오직 이 못 된 재판관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기에 자나 깨나 여인의 생각은 이 재판관에게 향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여인에게 있는 간절함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입니다.

정말 우리의 기도에 간절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문제들은 우리가 동원하는 방법으로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에게 있는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주실 유일한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님만 바라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대신 맡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간절한 강청은 결국 이 불의한 재판관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는 아마 돈이 되는 재판을 우선 순위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찾아와서 피켓 시위를 하는 이 여인을 그냥 두었다가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성가신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것 같았습니다.

계산을 해보니 이 경우엔 얼른 이 소송을 해결해 주는 것이 자기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자타가 공의하는 나쁜 재판장도 목숨을 걸고 강청하는 여인의 그 간구를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겠냐는 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 전쟁의 폐허 가운데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 진 한 힘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6.25의 잿더미 속에 잠긴 포항의 산 기슭의 절간 방 하나를 얻어 일곱 가족이 생활하며 노점상 행상을 시작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새벽4시면 일어나 아이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자신은 교회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라 해도 다 닳은 군용 담요 하나를 뒤집어 쓰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여인의 간절한 기도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녀의 아들들을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기업인으로 키워주셨고 두 딸은 권사와 선교사로 키워주셨습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어머니인 채태원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추석 연휴에 이명박대통령이 아침마당에 출연하였습니다.

대화도중 어머니 채태원집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새 옷 한 벌 사드리려 생각했으나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렇게 못한 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통령은 언제고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것은 어머니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대통령의 성장과정을 보면 아무리 다같이 못 살던 시절이라지만 이런게 고생이구나 싶게 처절한 가난과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그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언제 쫒겨날지 모르는 노점 행상을 하며 언제나 광주리 안에 성경을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었던 그의 어머니에게 사람들은 빈정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책만 읽어 국회위원이 될거냐 대통령이 될거냐

하나님은 그들의 말 그대로 자식들에게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기도한 여인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고 닥친 문제를 위해 또 자녀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고 응답받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젠 이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설명을 많이 하셨습니다.

영적 이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예를 들어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신비합니다.

설교자들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 설교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는 아주 쉬운 내용인 것 같은 데 묵상 하면 할수록 다른 깊은 주님의 의도가 또 숨겨져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도 쉬워 보이지만 사실 난해한 성경 중에 들어갑니다.

오늘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답지 않은 비유 모델을 불러 오신 것 같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과의 설전에서 예수님이 가져오는 비유나 논리가 얼마나 정확하고 절묘한지 언제나 바리새인들은 KO패 당한 것이 성경에 많이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반격을 들으면 우리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 가져오신 모델인 불의한 재판관은 뭔가 꼭 들어맞는 느낌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을 성경을 읽는 맛을 아는 분은 다 느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하필 불의한 재판관을 들고 나오신 걸까요?

물론 극적인 대조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첫 번 째 공통점은 재판관도 하나님도 청하는 자의 원통함을 즉시 풀어주지 않은 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오늘 우리가 읽었다시피 4절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들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웬만큼 다급한 내용이 아닌 이상 얼마동안 아예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이미 암시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게 뭐겠습니까?

즉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 것과 나쁜 재판관이 소송을 즉시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도 우리 기도를 즉시 응답해주시지는 않으실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겁니다.

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라고 하셨는 데 물론 여기서 속히 라는 말은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원어로 보면 즉시 라는 의미보다는 아무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지만 그것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을 미리 알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를 갖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비록 응답이 더디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들려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 째 공통점은 결국 기도에 응답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나쁜 재판관이 여인의 간청을 들어준 이유는 5절에 보면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즉 자기가 괴로워서 그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6절에서 그의 대답을 주의해서 보라고 힌트를 주십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즉 몹쓸 재판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가 계속해서 부르짖을 때 마음이 괴로우셔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울며 하나님 앞에 계속 매달릴 때 하나님의 마음이 점점 괴로워지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 아버지시니까요

자식이 울고 밥도 안 먹고 징징대며 뭐 사달라고 졸라대면 부모 마음이 어떻습니까?

내 능력이 안되도 어떻게 서든지 사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이 너무나 괴로우셔서 응답해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불의한 재판관은 못된 인간이라 늦게 원한을 풀어주었다 치고 하나님은 왜 빨리 응답해주지 않으시고 스스로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기다리다가 응답해주십니까? 어차피 능력도 있으신대요.

그 대답은 바로 마지막 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즉 기도 응답에 대한 문제는 믿음에 관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즉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는 것이죠.

우리의 문제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견고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기도하다 쉬 포기하는 이유도 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에게 있는 그 문제를 왜 간절히 구하질 않느냐.

내가 얼마든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데 내게 대한 믿음이 부족하구나.

기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것이 있습니까?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풍조에 밀려 믿음이 약해져 기도하지 않고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그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미 우리 하나 하나가 오늘 이 말씀을 들을 것을 아셨다고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토미테니라는 영적통찰력을 갖춘 복음전도자의 간절한 매달림이란 책에 보니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뽕나무가 아니라 돌무화과 나무라고 새롭게 번역되었습니다.

이 나무가 사람이 올라가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자라려면 족히 50년은 걸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50년전에 돌무화과나무 씨앗을 그 곳에 심어놓으셨습니다.

당나귀가 그 싹을 밟지 않도록 천사를 통해 지켰습니다.

새가 순을 쪼아 먹지 못하도록 천사가 앉아 쫒았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대가며 나무가 죽지 않고 자라도록 지켰습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그 날 삭개오는 인생에 대한 목마름을 안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행렬을 보려 그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예정 된 시각에 맞추어서 그 곳을 지나가십니다.

그 때 삭개오가 멀리서 다가 오는 모습을 멀리서 보시고 걸음을 다소 늦추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레 눈을 들어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너희 집에 들어가서 거하겠다.

하나님이 바로 그곳에 돌무화과 나무를 심으시고 삭개오와의 만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 이 말씀을 준비해 주신 줄 믿습니다.

얘야, 네가 내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그 기도제목을 들고 나오너라.

믿음이 부족하여 낙심하고 실패한 그 문제를 다시 한번 내게 들고 나와 기도해라. 내가 반드시 응답해주겠다.

이것이 오늘 설교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주님 앞에 이 문제들을 내려놓고 기도하고 응답 받는 축복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가련한 여인의 강청을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이 재판관 앞에 가서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무슨 말로 재판관을 설득하려 했겠습니까?

여인은 단지 졸랐을 것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오죽했으면 악독한 재판관이 질려버렸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 거창하게 연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달인이라고 하는 조용기목사님도 아무리 미사여구를 써 가며 기도해도 10분이면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목사님도 반드시 응답받아야 할 기도제목을 30분 이상 거의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이 들으실 때 까지 간절히 간절히 되풀이 한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7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짧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생각 없이 중얼거리며 경을 외우는 것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려하고 유창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다급한 문제를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고 그냥 앉아 주님을 향해 있기만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우리의 사정을 진실되게 말씀드리는것이 기도입니다.

히브리서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밖에서 어린 자녀들이 뛰놀 때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집안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감당 못할 힘든 문제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 아버지는 황급히 하늘 보좌에서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기쁜 것은 자식의 얼굴을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매일 우리의 얼굴을 보고 싶으시다고 합니다.

와서 울며 보채며 하나님을 괴롭혀 달라고 하십니다.

이사야62장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나의 모습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불행한 여인에게처럼 우리에게 고통과 염려와 슬픔이 다가온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시고 들어주신다고 예수님께서 응답받는 기도의 비법을 슬쩍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와 사고와 문제들이 발 밑에 숨겨져 터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매복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우리에게 있는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에겐 하나님께 기도했는 데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대한 상처가 다 있는 줄 압니다.

어쩌면 좀 더 기도했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기도에 대한 응답과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하나님은 괴로움을 참으시면서 우리의 기도에 외면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제 다시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기도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속히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지나 간 날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가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그 문제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새 우리는 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있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던 것 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받은 것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때 빨리 들어주지 않으신 그 기도로 인해 지금 생각해보니 얼마나 많은 영적 성장이 내게 이루어졌는지 모릅니다.

이사야55장6절의 말씀을 다시한번 기억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예레미야 33장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 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오늘의 말씀은 또 다른 의미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마지막 때에 많으 사람들의 믿음이 식어지는 것을 염려하신 예언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을 통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의 염려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생활이 바쁘고 지치고 힘들더라도 우리의 믿음을 추스르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