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잃은양과 목자 비유 (누가복음15장1절-7절)

남수연 2011. 3. 6. 19:30

 

성경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아끼던 양을 잃어버린 목자의 심정을 빗대어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모두들 아끼던 소유물을 잃고 애가 타본 경험이 있으시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를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도 여러 번 생기는 걸 봅니다.

오늘 본문 비유의 주인공은 아끼던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입니다.

그는 혼자서 자기 양 백 마리를 살뜰하게 돌보고 있었습니다.

목축이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에게 양은 가축 이상의 의미를 가진 동물입니다.

사무엘하 12장 3절 말씀에 보면 유대인이 양을 어느 정도로 까지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르는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양과 주인목자의 이런 친밀한 관계를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해합니다. 요즘은 반려동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58%가 애완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가까운 친척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비율 50%보다 더 높습니다.

친척보다는 애완동물을 더 가족에 끼워준다는 것이죠.

말 못하는 가축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다 보면 가족과 같은 깊은 정이 들기도 합니다.

구제역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자식과 같은 소 돼지를 생매장하며 울던 축산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전 국민이 안타까워했습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면 새벽2-3시까지 지켜보며 새끼를 받아주었다는 한 농장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랑하는 우리 돼지를 어떻게 땅에 묻냐며 비통해 하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과 수의사의 마음을 울렸던 어미 소도 있었죠.

안락사 주사를 맞고 30초면 쓰러지는 어미 소가 송아지가 와서 젖을 물자 송아지가 젖을 다 먹을 때까지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었습니다.

어미 소는 새끼가 배불리 젖을 먹고 나서야 쓰러져 죽음을 맞았습니다.

재산이기 전에 가족같이 생각했던 동물들이기에 농민들이 더 큰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양치는 목자는 그만 애지중지하던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에게 신선한 풀을 먹이기 위해 해발 500미터 산까지 양을 몰고 갔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두워지기 전 양 무리를 이끌고 들로 돌아온 목자는 한 마리가 없어진 걸 알고 정신이 아뜩해졌습니다.

목자의 보호를 벗어난 이 양은 산 중에서 맹수의 밥이 될 것이 뻔합니다.

목자는 서둘러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평지에 모아두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가 가파른 산을 뛰어다니며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양의 목숨 뿐 아니라 목자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죠.

잃어버린 아이를 찾듯 헤매던 목자가 드디어 자기 양을 발견합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핑돌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을 얼른 껴안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장면이 우리가 그림에서도 많이 보던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의 깊게 읽다보면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로 오늘 설교를 하셨는지를 좀 깊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를 열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설교하시는 예수님 주변에 언제나 처럼 수많은 사람이 몰려있습니다.

1절에 보면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무시당했던 세리와 죄인에 속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모여들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 항상 시끌벅적합니다.

그러나 그 곁에는 또 항상 비방하는 무리들이 따라다니며 주님을 반박하고 대항하는 팽팽한 분위기가 주님의 사역 현장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상대하고 밥까지 같이 먹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는 걸 주님이 알고 그들을 향해 오늘 이 비유의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잃은 양의 비유가 이들에게 적절한 비유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누구나 수긍하는 생활 속의 사건을 통해서 영적 진리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잘 읽으셨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아흔 아홉 양을 들에 남겨두고 떠난 목자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게다가 주님은 그게 당연한 것 처럼 말씀하십니다.

자기 잇속만 챙기는 계산이 빤한 바리새인들이 이걸 듣고 속으로 비웃지 않았겠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비유는 항상 상대방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직관을 갖고 상대방이 꼼짝 못하게 주님을 인정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 비유도 단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두루뭉실한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꼭 맞는 맞춤식 비유란 것이죠.

주님이 왜 목자의 비유로 그들에게 잃은 양을 어떻게 할 것냐고 물으셨겠습니까?

그것은 그들 속에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너희도 목자가 아니냐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파고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축이 본업인 유대민족을 양으로 지도자를 목자로 말씀하길 좋아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 된 야곱도 목자였고 존경하는 다윗 왕도 목동 출신이었죠.

자신들 또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목자로 인정받길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너희들 중에 누가 양 백마리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다면 반드시 찾으러 다니지 않겠냐고 물으십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떠났다는 다소 과장돼 보이는 설정도 삯군 목자가 아닌 선한 목자라면 의당 그래야 한다는 유대인 정서에 맞는 것입니다.

다윗도 사무엘상17장34절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생각하는 한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입니다.

그러니 꼼짝 못하고 죄인을 사랑하고 상대하는 예수님을 옳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결론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너희들도 이런 목자가 되어야지 왜 길 잃은 양과 같은 죄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냐는 날카로운 찔림이 그들 마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의문이 있죠.

그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목자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가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냐는 것입니다.

아니 남은 아흔아홉 마리의 많은 양들을 버려두고 달랑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시는 겁니까?

남은 것들은 죽어도 좋단 말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아흔아홉 마리를 우리에 넣어두고 떠났다는 말을 첨가해서 말씀하셨다면 아무 고민도 없을 텐데 그 말씀을 빼놓으시는 바람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고 비유가 난해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에서 이 질문이 나오길 의도적으로 설정하신 것입니다.주님은 한 마리의 생명을 아흔아홉과 똑같이 여긴다는 걸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남겨진 아흔아홉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가치를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잃은 양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미 구원받은 아흔 아홉이 있다하더라도 한 영혼의 가치는 이미 구원 받은 아흔 아홉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1/100이 아니라 언제든 1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계인구 69억분의 1로 보시지 않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먼저 앞세우는 부모들의 고통을 우리가 많이 보았습니다.

그에게 다른 형제가 있을 때 우리는 쉽게 그래도 남은 자식이 있어 다행이다 생각하지만 과연 부모에게도 그렇습니까?

앞세운 자식을 죽을 때 까지 못 잊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마태복음18장14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가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서라도 생명을 아끼지 않겠다는 주님의 강한 의지를 본문의 비유를 통해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느 산 중을 헤매다 목자의 품에 안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주님이 목숨을 버려 구해 낸 주님의 사랑하는 양인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시는 것은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양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절대적 의존성을 말씀하는 것이죠.

저는 집에서 애견을 한 마리 키우며 깨닫는 것이 참 많습니다.

우리 집 애견의 경우 생사가 완전히 주인에게 달린 절대적 의존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먹이와 물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심장사상충 모기에게 한번 물리면 혈관에 알을 낳아 모기 유충이 심장까지 파고 들어가 죽게 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꼭 약을 먹여야 됩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종합백신도 맞춰야 합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가 이렇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이렇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왜 너희 기독교는 그렇게 자기 힘으로 하려하지 않고 신께 의존하느냐고 묻는 걸 들었습니다.

전 제 힘만으로는 안되던 데 오히려 그 분이 용감해 보였습니다.

쉬지 않고 닥쳐오는 시련도 이겨낼 힘이 없고 내 맘대로 않되는 많은 문제도 그랬습니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갈 건강도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내일도 두려웠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평정심을 잃게 하는 내 마음도 괴로웠고 모든게 편해지면 금방 지루해지는 인생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할 때 마음도 형편도 제자리에 놓이고 모든 게 좋아지는 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의지할 때 비로서 더 강해지는 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편23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이 오늘도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인생의 참 목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성도님들께 부족함이 없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임할 줄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한 기쁨을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오늘 되찾은 양은 우리가 보통 그림에서 보던 것처럼 예수님이 안고 계신 새끼 양이 아닙니다.

성인 양의 무게는 90킬로에서 120킬로나 나가는 꽤 무거운 동물입니다.

그걸 어깨에 들쳐 메고 집으로 돌아올 때 목자가 무거운 줄 모르고 즐거워 나는 듯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목자는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 까지 벌입니다.

비록 잔치 비용이 되 찾은 양의 가격을 훌쩍 뛰어넘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주인은 양을 사랑하기에 이미 모든 계산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사망에 매여 사탄에 종 노릇하고 있는 인간과 하나님의 아들을 맞바꾼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오늘 잃은 양을 되찾고 기쁨이 충만한 목자가 잔치를 베풀고 초대한 벗과 이웃에게 원하는 것은 나와 함께 즐기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을 갖기를 주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학살 된 유대인이 600만 명이상입니다.

실존 인물인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수완 좋은 독일인 사업가였습니다.

붙들려 온 유대인 노동력을 이용해 많은 돈을 벌던 그는 유대인 집단 학살의 현장을 보며 마음이 바뀝니다.

죽음 직전에 처한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1200명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돈을 주고 그들을 빼돌려 자기 고향 체코슬로바키아 공장으로 데려가 그들을 살립니다.

독일 패망 후 나치 당원 신분인 쉰들러가 도피하며 유대인 앞에서 통곡합니다.

가슴에 단 나치 금배지를 팔았더라면 2명을 더 살렸을 텐데 왜 더 많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던가.

1999년 한 낡은 가방과 함께 그 속에 든 1200명의 명단이 적힌 종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쉰들러 리스트이고 그가 살린 유대인들의 명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것 이외에 인간이 구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하라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고 그 명령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것인 줄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영혼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 전에 없던 전도에 부담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평생 전도에 대한 부담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제 한 성도님이 아직 남아있는 교회달력을 모두 들고 나가 교회 주변을 돌며 전도를 했습니다.

제가 한 번도 전도해야한다고 말씀드린 적 없는 데 그런 마음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님도 학창시절 성령충만을 강하게 체험한 뒤 1시간 일찍 등교해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하고 나서 전도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률이 둔화되고 최근 10년간 교인 수는 14만명이 줄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던 비율도 18%로 낮아졌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잃은 양을 산과 사막에 방치하고 있는 사이 악한 세력은 종교의 이름으로 문명의 풍요함과 쾌락 속으로 절망과 자살 속으로 그들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건 다해도 예수님이 당부하신 유언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만 예외로 지키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 복음을 증거 해 본 사람들은 영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알기에 지금도 전도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것을 봅니다.

일산 한소망교회 문0형순 권사님은 한 주에 수십 명의 새 가족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처음에 전도를 시작한 것은 교회에서 나홀로 구역장으로 임명받고 나서였습니다.

구역원을 주지 않고 전도해서 구역 식구를 만들라는 소리입니다.

걱정이 돼서 잠을 이룰 수 없었으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칭찬을 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이 전도인 데 나만 천국 가고 다른 사람 지옥에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세워 교회에 가자고 졸랐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열 집의 벨을 누르면 7,8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에 따라 나오니 놀랍고 신바람이 났습니다.

권사님의 순종이 기쁘셔서 하나님이 준비 된 영혼을 만나게 해주신 것이죠.

이렇게 지난 12년 동안 문형순 권사는 전도 대상자가 교회에 나오기로 결정할 때까지 반찬과 무공해 채소를 배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기쁨과 축복을 맛 본 사람은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왠지 쑥스럽고 거절당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만 죄인이 구원받는 놀라운 기적은 일어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고린도전서1장21절에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도는 하나님과 천국이 기뻐 뛰게 하는 것입니다.

능력 있고 보람있는 생기 넘치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전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우리 영혼이 살고 내 가족이 잘 되는 축복도 임하는 줄 믿습니다.

수많은 전도자들은 말합니다.

전도에 왕도는 없다. 말씀을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혼을 구원한 감격과 기쁨엔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전도할 때 우리 인생에 진정한 축복인 전도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나눌 것은 오늘 잃은 양 비유의 중요한 메시지인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마다 천국에서 큰 기쁨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국 아버지의 집으로 귀환하는 것은 죄를 회개할 때라고 하십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확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진정한 회개를 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한 사람은 자기가 무언가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압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까?

자기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나지 않는 데 내 죄를 위해 죽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도대체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구원 받는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회개가 없기에 복음을 믿는다고 하나 확신도 없고 변화도 없고 은혜의 체험도 없고 기적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성령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몇 가지 도덕적인 죄를 발견하고 고백하는 매일의 회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깊은 회개가 먼저 우리 심령에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야만 우리 근본 된 죄를 깨닫게 되고 그것이 주님의 보혈이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내가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각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 하나와 비교 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무엇을 말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의인 아흔 아홉은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해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회개하지 않는 무리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회개했는지 우리 심령에 물어보는 일이야말로 구원을 위한 가장 긴박한 문제입니다.

한동대 선린병원 이0건오 원장은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던 중 비로서 자기의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자기의 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데 시장에서 물건을 훔쳐 영화관에 드나들던 학창시절의 죄까지 떠올랐습니다.

죄로 생각지 못한 일들이 죄인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몸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이 원장을 적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죄가 용서되고 정결케 되는 체험을 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회개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가던 그 방식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하나 더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까지 가고 있던 길이 사망의 길이었음을 깨닫고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제는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재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결재권자를 하나님아버지로 하고 내 인생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의 영광과 행복을 위한 것이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돌이켜 나의 존재이유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고인이 된 옥0한흠목사님이 성령 강림 100주년 기념 예배의 설교자로 10만 성도 앞에 섰을 때입니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하여 마음에 믿기만 하면 행위가 없어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변질된 복음을 설교해 왔다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아마 그 회개는 옥 목사님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크고 처절한 회개였을 것입니다.

옥목사님은 동료 목사님들에게도 변질 된 복음을 가르친 것을 같이 회개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료 목사들로부터 왜 좋은 날 그런 설교를 했느냐는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듯했다고 합니다.

그 때 모든 목사들이 함께 회개하며 불의한 모든 행위를 뉘우치고 돌이켰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당하는 굴욕과 비참함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기도 가운데 진실 된 회개의 성령이 임하시길 간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를 한 뒤에 비로서 천국의 큰 기쁨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수근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설득하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떠났던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길을 잃고 방황하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피투성이 된 몸으로 덥썩 안고 하나님의 집에 데려오신 줄 믿습니다.

참 된 회개는 버릴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셔서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회개하는 우리에게 천국의 기쁨이 부어질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아직도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 위에 구원에 대한 열정을 주셔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직장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을 위해 마음을 쓰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나와 우리 집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으로 구원받은 영혼의 손을 잡고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