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6일 도쿄에서는 한 젊은이의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10년 전 열차를 기다리던 한국인 유학생이 선로에 떨어진 술 취한 일본인을 구하려 선로에 뛰어들었으나 열차에 치여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고려대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에 어학연수를 떠났던 이수0씨였습니다.
장기 불황에 지쳤던 일본인들은 한 청년의 의로운 죽음에 크게 술렁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뜨거운 열기가 일본 열도를 덮었고 2006년에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은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제작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기리는 장학재단에 지난 한 해만 1억4천만원이 넘는 장학금을 일본인들이 기탁했고 이 재단을 통해 그동안 485명의 한국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10년을 이어온 이번 추모행사가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추모식이라고 합니다.
이0박대통령도 주일대사를 보내 그의 죽음을 추모했고 영화배우 배0준씨의 화환도 있었습니다.
도쿄신문은 이 날 기사에서 한 젊은이의 값진 희생이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을 바꾸게 했고 한류 열풍이 시작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한 청년의 숭고한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가져왔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른 많은 의로운 죽음이 그랬듯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서 차츰 잊혀져 갈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쉼 없이 역사를 움직이고 인생을 뒤바꾸는 죽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바로 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려 합니다.
현대 기독교에 축복과 은혜와 사랑은 넘치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인을 구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대부흥사 무디가 어느날 부흥회를 마치고 많은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의 동역자가 오늘 설교에 주님의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무디의 설교는 주님의 십자가였고 셀 수 없는 영혼들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참혹한 십자가 형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것인지 묵상하며 우리의 믿는 도리인 십자가의 대속을 견고하게 붙드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먼저 주님이 선고 받은 십자가형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란 영화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잔혹함과 처절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사실성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간혹 영화의 장면이 TV에 비쳐질 때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주님의 상한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보다 덜하면 덜했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고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십자가형의 잔인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지를 뻗고서 처벌을 받을 때 그들은 가장 뼈 아픈 고통을 받으며 못 박힌다. 그들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개들은 모질게 씹어 먹는다’
십자가형은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게 한 인류의 가장 잔혹한 사형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 팽형이란 사형법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광화문우체국 북쪽에 혜정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리 위에서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를 벌주는 팽형이 거행됐습니다.
끓는 가마솥 속에 죄인을 담아 삶는 공개처형입니다.
먼저 혜정교 한 가운데에 임시로 높다란 부뚜막을 만들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큰 가마솥을 겁니다.
솥에는 물을 붓고 아궁이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장작을 넣습니다.
그 앞쪽에 천막을 치고, 포도대장이 앉으면 팽형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진짜 팽형을 집행 하는 건 아닙니다.
죄인을 가마솥에 담고 솥뚜껑을 닫은 다음 구령에 따라 장작불을 지피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불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솥 속에 든 죄인은 그 순간부터 삶아져서 죽는 시늉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살아있는 시체"를 꺼내 식구들에게 넘기면 식구들은 미리 준비해간 들 것에 이 "살아있는 시체"를 뉘여 집으로 데리고 가 격식대로 장례를 치릅니다.
이렇게 장례가 끝나면 호적이나 족보에 죽은 사람으로 오르는 것이지요.
물론 먹고사는 일은 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지만 "살아있는 시체"의 아이는 태어나도 아비 없는 사생아가 됩니다.
요샛말로 생매장시키는 셈이지요.
살아있으되 산 사람이 아닌 팽형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에게는 죽음과 같은 벌이었다지만 팽형에는 죄인에 대한 일말의 인정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형벌에는 눈꼽 만큼의 자비도 없었습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끔찍한지 아무리 극악한 죄를 저질렀다 해도 로마인에게 십자가형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이 있던 사도바울이 다른 제자들과 달리 십자가형이 아닌 참수형으로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로마의 네로황제 때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십자가형의 참혹함을 이렇게 고증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숨을 거두기보다 방울방울 피를 흘리며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며, 고통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밖혀 오랜 고통에 시달리고, 몰골은 흉악해졌고, 채찍을 맞은 자국이 어깨와 가슴에 부풀어 오르고 단말마의 고통 가운데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살려달라고 수없이 애원했을 것이다”
사형을 언도받고 어차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사람에게 날카로운 도구가 붙은 채찍을 수십 대 씩 휘두르는 야만적인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곧 교수형을 당할 사람에게 담배를 한 대 피게 하는 온정은 그에 비하면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십자가 형의 참혹한 모습을 목도했던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교회에서 십자가 형태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후 3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꿈에 십자가 환상을 보게 되죠.
그는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어 전쟁에 승리한 이후부터 십자가 형을 폐지했습니다.
십자가 형의 처참한 장면을 직접 목도했던 사람들이 다 죽고 난 4세기 이후부터 십자가가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고 CS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형으로 죽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판결 받은 것은 음모요 억측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형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환대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했으나 백성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던 예수님을 함부로 체포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곳을 알고 있던 유다가 제사장의 군사들을 몰고 와 주님을 체포합니다.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고가 주님을 심문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지배국인 로마제국의 형벌인 십자가 사형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자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율법으로 책잡을 것이 없는 주님을 죽이기 위해 황제를 대적한 반역자라는 죄목을 덮어씌워 로마의 법대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반역자를 살려두면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무리들의 압박에 못 이겨 십자가 판결을 내립니다.
황제를 반역한 사람의 형벌은 당연히 십자가의 처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잡히셔서 9시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런 졸속 재판이 어디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여러 사람의 이해와 암투가 빚어낸 억울한 판결이었으나 이 모든 일은 사실 주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잡히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십자가형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대로 주님은 다른 두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못 박히신 시간이 아침 9시이고 운명하신 시간은 오후 3시입니다.
수 십대의 태형을 맞으셔서 살이 찢기시고 뼈가 드러난 상처의 고통을 안고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신 채 나무에 매달려서 6시간의 처절한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숨막히는 6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류 최대의 사건이 갈보리의 한 언덕에서 일어날 때 천지가 요동했습니다.
44절에 보면 해가 빛을 잃고 세 시간을 온 세상이 어둠 가운데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이 운명하신 순간에 땅이 진동하고 무덤이 터지며 죽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이 십자가 주변에 집결 해 악의 기운이 음험하게 짓누르고
광기어린 군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조롱하며 욕보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사랑하던 제자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서 홀로 묵묵히 혼자 당하시며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셨습니다.
드디어 주님이 운명하실 때 하나님과 사람을 가로막았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45절에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셨을까요?
오늘 35절과 39절에 보면 주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면서 왜 십자가에서 죽느냐 조롱합니다.
그 정답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출애굽 사건 중에서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건너 뛰어간 유월절의 유래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12장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가 뛰어 넘어 가도록 우리를 주님의 피로 덮으시기 위해 죽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온 인류에게 사망이 오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완악한 이 세상의 죄인들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로마서2장5절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범죄 한 인간일지라도 사랑을 멈출 수 없으셨기에 스스로 속죄 할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한 인간 아담으로부터 온 인류가 죄에 빠진 것 같이 한 사람 메시야를 통해 온 인류가 구원받을 것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었던 가죽 옷은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죄 없는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메시야의 죽음을 예표합니다.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지을 때 마다 죽어야 했던 짐승의 제물도 주님의 죽음을 예표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쉬임없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님이 오셔서 이제 단번에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9장 22절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고 죽으신 것은 주님이 보혈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오히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왜 꼭 십자가여야 합니까?
십자가 형의 고통은 우리가 받을 심판의 고통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찢어지는 육체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고 배신과 결별의 아픔을 당해야 했습니다.
죄의 대한 심판은 육체의 영원한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모든 것과 하나님으로의 결별의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황제를 거역한 반역자에게 내리는 형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한 인간이 받을 형벌이죠.
십자가는 노예에게 행해지던 형벌이었습니다.
죄와 사탄의 종이 된 비참한 인간이 받을 형벌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극악 무도한 자가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수많은 죄로 오염 된 인간에게 주어질 형벌입니다.
우리가 받을 것이 이 십자가의 형벌이었기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죄 한 곳이 나무였음을 기억하십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의를 배신하고 나무에 달린 선약과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되려 했습니다.
주님은 나무에 달려 순종하며 죽으심으로 나무에서 범죄한 인간의 모든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선악과를 범한 죄를 떠올립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나무에 달려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던 그 범죄의 나무에 하나님의 아들이 달려 돌아가십니다.
진짜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참으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한 죽음이 아니고야 누가 스스로 이 치욕과 고통의 흉악한 죽음을 선택하겠습니까?
오늘 자기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못을 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은 진정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중국인의 심금을 울린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아기 엄마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사경을 헤메는 중에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사진이었습니다.
어쩌면 죽기 전에 마지막 젖을 아이에게 물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핏기 없는 엄마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눈물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진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피가 마르고 목이 타 죽어가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심으로 죄와 사망에 매여 사탄에 종노릇하는 우리에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성도님들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회복되고 더러운 의심의 영이 일곱 길로 쫒겨 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둘째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인류의 운명은 갈라집니다.
오늘 주님이 처형당하시는 곳에 두 행악자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죄수들을 처형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닙니다.
대개는 명절 전에 대대적인 특별사면을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유월절에 맞춰지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좌우에 두 명의 강도가 덩달아 함께 십자가의 형을 받습니다.
두 강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똑똑히 목격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인류의 운명입니다.
그들처럼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류의 운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사람들 곁에 가까이 서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처럼 심판의 날에 양은 우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심 같이 인간의 운명이 십자가에서 갈라질 것입니다.
우편에 선 사람을 보시겠습니까?
41절에 보면 우편의 강도는 예수님의 행한 일이 모두 옳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강도는 잡히기 전에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거나 수천명 씩 모인 집회의 한 구석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는 자신의 죄가 죽어 마땅함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나라는 주님의 나라이고 주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난하는 한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주님께 나갑니다.
좌편에 선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비방합니다.
구하지도 못하면서 왜 그리스도 행세를 했냐며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처참한 십자가 위에서 이를 갈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인류는 피할 수 없이 둘 중 한편에 서야합니다.
좌편이냐 우편이냐.
구원 받은 우편의 강도가 쓴 시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의 마음이 되어 쓴 것이죠.
제목은 슬프게 행복한 고백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제가 그토록 찾아 헤메였던
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신분으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만나다니요.
나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여 저는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저주받은 운명의 마지막 축복임을 알기에
제 운명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은 이제 제 시한부 인생의 최고 행복이 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펼치지 못할 정도로 펼쳐진 저의 팔은
오직 주님을 향한 것입니다.
제 가혹한 운명으로 하여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발은
그러나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펼쳐진 팔로 인해 드러난 주님의 가슴은
제 영혼이 달려가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제 다리가 부러질 지라도 달려가
주님의 붉은 발에 감격의 눈물로 입 맞추고 싶지만
저의 피만 헛되이 말라 갈 뿐입니다.
지금 주님의 펼쳐진 팔이 만든 공간이
저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주님의 못 오시는 두 발의 고통이
저 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가 가까이 이렇게 있어 슬프게 행복하지만
신분과 격이 다른 주님과의 사랑은
곧 제가 주님으로부터 함께 할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야 하는 절망감에 떨게 합니다.
그러나 이 현기증 속에서라도
제 인생의 마지막 소원으로 감히 주님에게 말할 수 있다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생각하여 주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나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의 이 말씀이 허세고 거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허세는 없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는 그 순간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만 출입하던 성소와 지성소를 가려 놓은 휘장이 찢어져 두 조각이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히브리서 10장 20에 정답이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주님은 천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갈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구원이 있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국립0주대학교 음악교육과에 백0현 교수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음대를 나와 오스트리아 비인국립음대 성악학과에서 공부했고 한국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유럽 오페라무대에 진출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50년간을 곱사등으로 살았습니다.
천부적 소질을 알아 본 음악선생의 권유로 서울음대에 입학했으나 지병인 척추 질환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척추 마디마디에 화농균이 고여 있고 전신의 신경을 누르고 있어 24시간에 걸친 대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십 병의 수혈을 받다가 B형과 C형 간염바이러스로 간염질환에 걸려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고난이 더해졌습니다.
평생 곱사등과 간염으로 고생하던 그는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아내와 함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마룻바닥에 시선을 깔고 앉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도 평소와 같이 “하나님 빚이나 좀 갚아 주세요”하며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앞을 보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았다”고 외치세요.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누르는 느낌이 왔습니다.
누군가 점점 더 세게 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팔, 다리, 고개, 어깨, 허리, 등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꺾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50년 동안 시리고 저리고 고통스럽던 등줄기가 시원해 지는걸 느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주님이 다시 임하셨습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굽은 등을 다시 편다”
그를 반듯이 뉘여 놓고 팔과 다리의 각도를 변화시키시면서 성령의 힘으로 계속해서 등을 펴주셨습니다.
그가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자 그의 아픔은 모두 사라셨습니다.
“네가 50년 동안 너무도 마음이 아팠구나, 이제 내가 너를 위로하노라”
“이제 나를 찬양하라 나를 널리 알려라”
새벽 6시, 눈물 콧물로,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서 보니 정말로 굽었던 등이 쫙 펴져 있었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그의 간염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50년의 곱사등에서 치유함을 받고 음악의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하실 뿐 아니라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능력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는 주님이 그 몸을 찢으셔서 열어놓은 길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십자가형에 대한 여러 가지 고증을 읽으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부러 하는 소리가 아니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내가 죄 좀 짓는다고, 하나님의 뜻 대로 살지 않는다고 그게 그렇게 큰 형벌을 받을 일인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헛 된 일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 지옥의 형벌에서 구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우리가 얼마나 축복 된 삶으로 바뀌었습니까?
때로 마음의 고통과 환경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라도 마지막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시고 내 죄를 완전히 씻으신 주님의 사랑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모든 것을 주시며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내 인생에 주인으로 모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심판의 두려움도 인생의 두려움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음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지적으로만 동의하신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매일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느날 주님의 십자가 아래 우리를 인도하시고 주님의 못 박힌 손과 발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실 것입니다.
2011년 고난 주일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끝나지 않길 원합니다.
이런 큰 사랑을 받은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만민에게 알리길 원하십니다.
듣는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십자가의 좌 우에 구분해서 설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아름다운 십자가의 구원을 전하는 충성되고 착한 주님의 자녀가 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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