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설교 중에는 의외로 돈과 재물에 대한 내용이 참 많습니다.
본장에서 예수님은 재물에 관련 된 비유설교들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에 물들어 갈 것을 염려하며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던 경건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실 좋아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세요, 아니면 돈이 좋으세요?
당장 돈이 필요하니 갈등이 좀 생기시죠?
오늘 말씀은 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부자를 통한 교훈이고 우리에게 이 땅에서 어떻게 돈을 관리해야할 지를 가르쳐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이 땅에서 돈을 사용한 방법에 따라 그의 구원이 결정지어진 것 같이 보인다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돈도 따르고 싶고 구원도 받고 싶으시죠?
돈은 따른다고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셔야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축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움켜 쥔 채 구원을 받으려다보니 율법에 나타난 이웃에게 나누어 줄 책임을 쏙 빼 버리고 손해 안 볼 종교적 행위만 열심히 지킨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종교적인 행위만 열심히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자칫 이렇게 종교화 된 생활을 하며 마음과 행실은 하나님과 떠나있게 되기가 쉬운 것에 항상 주의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부자되면 구원받기 힘들다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실 때 항상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어린 아이와 과부같은 소외 계층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고 해방신학자들 처럼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만 구원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은혜를 구하며 나오는 사람들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곁에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나 관원인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나 유력하고 부유한 여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다만 가난한 자들이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왔고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부자자들이야 부족한 게 없으니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주님께 가까이 왔다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시험에 들어 다 돌아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돈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고 순종할 때 이 땅에서 막강한 위력을 가진 돈도 우리에게 맡겨주신다는 약속이신줄 믿습니다. 아멘.
본문에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인생을 살았던 두 사람이 죽은 후에 완전히 반전 된 결말을 맞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뜻 보면 지옥에 간 부자나 천국에 간 나사로나 그렇게 된 당위성이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자가 큰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사로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을 위해 대단한 헌신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부자의 실패한 삶을 살펴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성공적인 재정관리를 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성령님의 은혜가 임하셔서 깨닫는 지혜의 마음을 주시고 또 말씀대로 잘 실행하여 복받는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첫 째는 실패한 부자의 삶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는 그의 재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재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몰랐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죄의 본성대로 다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살아생전 이 부자가 누렸던 호사스런 생활을 말씀하십니다.
그가 입었다는 보라색 옷은 그가 왕족이나 제사장의 신분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고대에 보라색 옷감은 어떤 색상 보다 값이 비쌌다고 합니다.
보라색은 퇴색되기 쉬워서 염색방법이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평민들이야 비싼 보라색 옷을 입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유례 때문인지 보라색은 지금도 귀족의 색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죠.
상당 수 나라들에서 최고액권 지폐의 색깔을 보라색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부자가 걸치고 있던 옷이 바로 이 자색 옷입니다.
그리고 그가 입었다는 고운 베옷은 당시 애굽에서 가져온 부드러운 고급 수입 원단으로 만든 속옷을 말합니다.
실크를 처음 직조한 나라가 중국이고 마 섬유의 기원은 이집트입니다.
뻣뻣한 마를 가늘게 가공해서 부드러운 고운 베옷을 만들 기술은 이집트를 따라 올 나라가 없었다고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성막과 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 이 가는 베실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시절 상당수의 이스라엘 노예들이 가는 베를 짜는 노동을 하며 그들의 직조술을 습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인 로마시대에도 이집트의 세마포를 능가할 옷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마지막 날에 성도들에게 세마포 옷을 입게 하신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옷을 표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수입산 천을 몸에 두르고 날마다 호사스럽고 세속적인 삶을 즐기는 것이 부자의 삶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매일 럭셔리하게 살았다고 표현되었는 데 이 단어가 가슴에 확 와 닿죠?
귀족 신분에 재산도 많아 명품 수입 옷을 걸치고 날마다 사람을 초대해서 값비싼 음식을 먹고 즐기며 사는 그의 모습이 세상 사람의 로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을 가진 부자들의 물질관이 오늘 주인공과는 완전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지난13일 한국의 카네기라고 불리우는 철강왕 000포스코회장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총리직을 역임하고 포스코의 회장이었던 분이 무주택에 포스코 주식 한장이없다는게 알려지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2000년도에 박회장은 40년간 살았던 아현동 집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물질관을 가진 경영인이었다는 것이 이미 알려졌고 마지막 삶에서도 그것을 보여준 분입니다.
원조 철강왕인 카네기란 사람 역시 1902년에 그 당시 돈으로 2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해 카네기 재단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사와 방적공을 거쳐 철강재벌이 된 그는 탁월한 경영능력과 믿음의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산을 안고 죽은 사람은 천국에서 명패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 돈을 잠시 위탁받았다는 믿는 이들과 오늘 본문에서 가진 것을 흥청망청 자신만을 위해 써버린 부자와 얼마나 다릅니까?
물론 그는 나름대로 비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사족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거지 나사로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부자의 문 앞에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얼마든지 나사로를 다른 곳에 내칠수도 있었지만 자기 상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주었습니다.
부자는 아마도 거지를 거두어 준다는 칭송까지 받으며 완벽하게 성공한 인생을 누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부자가 진짜 나사로를 긍휼히 여겼다면 치료받지 못해 곪아터진 피부병 상처를 개들이 와서 핥게 내버려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자선이 단지 사람들 평판을 생각한 의도였다고 밖에 불 수 없습니다.
그가 알량한 자기의 자선행위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나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 자신에게 물을 먹이라고 요청합니다.
자기가 생전에 나사로를 돌봤으니 그 정도는 나사로도 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톨스토이의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죽자 천사가 그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난처한 표정입니다.
천사는 직접 사람의 손을 잡을 수는 없고 그가 살아생전 자선을 베푼 것을 매개로 해서 하늘로 데리고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살아생전 남에게 베푼 물건이 아무 것도 없으니 천사의 손과 연결해 줄 것이 없는 것이죠.
천사는 잘 생각해 보라고 부자를 재촉했습니다.
그 때 부자의 머리 속에 오래 전 썩은 양파 하나를 이웃의 가난한 여인에게 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거라도 되었다며 그 양파를 가져왔습니다.
부자와 천사가 함께 그 양파를 잡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며 부자는 안도의 한 숨을 쉬었겠죠.
그런데 그 순간 비명 소리와 함께 부자가 지옥을 향해 떨어지고 맙니다.
썩은 양파의 껍질이 훌러덩 벗겨지며 그만 천사의 손을 놓쳐버린 것이죠.
돈 많은 사람들의 인색함은 구원받지 못할 사유가 된다는 동화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돈벌고 부자가 될 것을 기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는 하늘이 낸 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 물질에 복을 충만히 부어주셔서 모두 부자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감리교의 창설자인 존 웨슬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라. 그리고 돈을 열심히 저축해라. 그 다음 모은 돈을 선한 일에 써라
일제 강점기 중에 황해도 지역에 큰 부자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안악 지방의 부자였는 데 그는 자기만 위해서 돈을 쓰고 남에게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꿀돼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자손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모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재령 지역의 부자로 정찬유 장로란 분입니다.
그는 성수주일과 십일조는 물론 교회학교 교사들과 찬양대원들을 늘 가정에 초대하여 대접했습니다.
또 교회에 오시는 손님과 나그네들은 으레 그 장로님 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는 예배당도 건축하고 자선사업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후손들이 다 복을 받았는데 장로님의 아들이 과거 우리 구들장을 뜨듯하게 해주었던 ‘삼표연탄’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국무총리를 역임하시던 0원식씨 입니다.
살아가는 데 돈 많이 필요하시죠?
커가는 아이들 보면 벌어들이는 돈이 항상 부족하고 노후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르게 정립되기 전엔 우리 손에 많은 물질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받은 물질이 독이 되어 성도들의 신앙을 부패시키고 돈의 권세에 도취되어 오만한 자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돈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는 자에게 돈이 얼마나 독이 되는 지를 잘 알고 있던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는 것은 저주를 물려주는 것이다.
또 이런 통찰력있는 말도 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이겨내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비기독인들과 달라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벌고 쓰고 모은다고 결코 풍족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 물질을 나누는 것에 대한 결과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물질은 하나님이 맡겨주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직 우리에게 풍족한 물질이 없을 때 부터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훈련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돈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쓴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뿐 아니라 후히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큰 재산을 물려받거나 로또라도 맞아 벼락부자가 되지 못할지라도 우리 노력해 수고한 물질이 새나가지 않고 알토란 같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돈 문제로 늘 마음이 묶여 자유함이 없으십니까?
돈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재정을 맡기시고 움켜 잡았던 손을 펼칠 때 오히려 풍성한 축복이 부어지는 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으로 부자가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회개하지 않은데서 온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선택 된 민족 유대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부자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가난한 자들은 저주를 받은 죄인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에다 부자이고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그는 당연히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에 올라간 나사로를 가리켜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어서 구원받는 것을 아브라함 품에 안긴다는 관용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도 왜, 죽어서 조상에게 돌아간다 이런 말들을 사용하지않습니까?
그런데 먼저 종기투성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아브라함 품에 갈 줄 알았던 부자는 죽어 불타는 고통의 장소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참 황망한 일이죠.
우리가 죽어서 실제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상황이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찬란한 천국에 내가 구원받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저는 제 눈을 의심할 것 같습니다.
믿어지지 않아 허벅지를 막 꼬집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꽃 가운데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져 남은 영원한 생을 거기서 보내야 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 역시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아무리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맹신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 해도 바리새인들 처럼 형식적인 종교행위만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상반 된 결말을 맞은 두 사람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죽은 뒤에 영원한 삶이 존재하는 것을 목격한 다음에는 구원의 희망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소리쳐 부른 부자는 자신을 거기서 구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혀 끝에 물을 축여 잠시라도 시원하게 해달라고 구할 뿐입니다.
마태복음25장41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날에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아보지 않은 자들을 향해 이렇게 심판하십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영원한 불은 본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서는 안 될 곳에 마귀의 일에 동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 땅에서 자기만을 위해 모든 것을 누리던 자들이 가게된 것입니다.
심판에 던져진 부자는 자신이 왜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30절에서 그는 나사로를 지상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증언하면 형제들이 그 말을 믿고 회개할 거라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자신이 고통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했고 그의 죄를 대속하실 구속자가 필요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미국의 한 목사가 쓴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기꺼해야 일평생 60년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영원히 지옥에 가둘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심지어 그런 하나님은 경찰에 고발 당해 아동 학대 죄로 구속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 자체가 허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지 모르겠습니다.
있지도 않은 심판을 위해 예수님이 괜한 죽음을 죽었다는 뜻일까요?
지난 9월22일 노르웨이 우토야 섬에서 열린 청소년 캠프에서 브레이빅이란 남자가 총기난사를 난사해 93명의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도망가는 아이들을 정조준해서 죽였고 죽은 척 엎드린 아이들은 확인 사살까지 했다고 합니다.
당시 섬 건너편에 있던 한 독일인은 총성을 듣고 해변으로 뛰어갔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수십명의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헤엄쳐 강을 건너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강 건너에선 경찰복을 입은 범인이 헤엄쳐 도망가는 아이들을 향해 한발 한발 조준해서 총을 발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자기의 요트를 몰고 가 총탄을 뚫고 목숨을 걸고 50여명의 청소년을 구해냈습니다.
나중에 체포 된 범인은 뻔뻔하게 미소를 지은 채 총을 조준 해 아이들을 죽이는 모습을 재현 해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실형 기간이 노르웨이 최고형인 21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수감 될 할덴 교도소 내부가 인터넷에 공개되며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할덴 교도소는 호텔식 현대시설을 갖춰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교도소로 뽑힌 곳입니다.
죄수 한 사람이 사용하는 방은 거실과 욕실과 주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실에는 평면 TV가 설치되어 있고 미니 냉장고까지 갖춘 주방은 모델하우스를 연상시킵니다.
침대를 비롯한 모든 가구는 특별 주문 된 디자이너작품처럼 멋스럽고 체육관에는 암벽등반 연습용 벽을 갖추었습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지어진 탓에 숲속 산책길, 조깅코스까지 이용할 수 있고, 자유시간에는 낚시와 승마,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교도소입니다.
타임지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기타나 피아노, 보컬, 뮤지컬 레슨을 받을 수 있고 자기 노래를 손수 음반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게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처절하게 굶주린 북한 주민들 위에 군림해 자기 뱃속을 채우는 김정일이 김일성 처럼 심판도 없이 편안히 죽는 다면요?
유태인 600만을 학살한 히틀러는 어떻습니까?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지옥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어 교회와 하나님께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이런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염려해 줘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초속 600킬로 미터로 달리고 있는 우주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하나님께 훈수를 둘 수 있습니까?
영원한 불꽃 속에서 고통하는 부자가 생각 한 것은 다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기와 같은 곳에 오지 말아야 된다는 것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지옥이라 불리는 한 장소에 관하여 경고합니다.
지옥에 대한 경고는 신약 성경에서만 162군데 이상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중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이중 70군데가 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주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믿고 아직 천국이 준비되지 않은 가족들을 빨리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나사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자란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28절에 부자는 회개한 사람들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고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나사로는 물론 회개했기에 천국에 갔다는 것임을 부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몸에 병이 들었고 달려들어 자기 상처를 핥아대는 개를 쫒을 힘도 없는 가장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사로가 이 땅에 있을 때 고난을 받았기에 천국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뜻은 이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사는 우리를 천국에서 위로하길 간절히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회개한 자만이 주님의 품에서 모든 위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갈수록 고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자신감도 더 떨어지고 성공에 대한 기대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앞이 막막할 때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절망감에 빠질 때도 많습니다.
본문의 나사로의 고난이 주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인생에서 겪는 질고를 지고 병마에 시달리며 그가 한 일은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죄를 회개한 것 뿐일 수있습니다.
그런 그를 긍휼히 보시고 위로하길 원하시며 천국의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일상의 고통과 시련을 또한 알고 계시며 위로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천국을 소망하며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신뢰할 때 주님의 도우심의 손길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한 말씀을 또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다 받았으니 여기서 너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다 받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열 가지 복을 받으셨으면 한 가지는 얼른 가난한 이웃과 복음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만원을 가지셨다면 나를 위해 다 쓰지 마시고 굶주린 우간다의 어린이를 위해 일부를 떼어 기부하십시오.
기뻐할 일이 있으시면 나 혼자 기쁨을 누리지 마시고 하나님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믿음이 보이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통해 확증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살아 생전 주어진 모든 것을 오직 자기만을 위해 다 써 버린 부자는 그것으로 자기의 회개하지 않은 불신앙을 드러내고 심판의 자리에 떨어진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있어 하나님과 가난한 이웃에 대해 인색한 사람들을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인생과 물질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런 불신앙 가운데 있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충분한 물자들을 일부 사람들이 독식하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것을 마음아파 하십니다.
일 년에 800만명이 굶어 죽고 그중에 80%가 어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라고 기독교 국가에 물질을 몰아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아직 많은 돈을 맡겨주시기 전에 돈에 대한 확고한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내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도록 위탁하신 것임을 인정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마음껏 기도하십시오.
제게 안심하고 돈을 맡겨주세요.
이 땅에서 저를 위해 다 사용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저는 그냥 필요한 만큼만 쓰면 족합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마음이 준비 된 우리 성도님과 저와 우리 교회에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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