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 (누가복음13장10절-17절)

남수연 2012. 1. 17. 14:05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항상 받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하시던 예수님께서 허리가 꾸부러져 고개도 똑바로 들지 못한 묘한 자세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여인을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설교를 멈추고 여인을 부르시더니 네 병이 나았다고 하고 여인의 몸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 순간 십 팔년간 굽어 있던 여인의 허리가 쭉 펴지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감격한 여인은 소리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죠.

동네 사람들은 오랫동안 꼬부라진 채 앓고 있던 여인을 너무 잘 알기에 함성을 질렀고 회당 안은 일시에 떠들썩해집니다.

율법의 형식대로 엄숙하게 안식일 순서를 지키려던 회당장이 발끈해집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예수라는 선지자를 저 자리에 세우는 게 아닌 데

그리고 앞을 다투어 안수를 받으려고 술렁이는 병자들을 향해 볼멘 소리로 야단을 칩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병 고칠 생각 말고 치료 받으려면 다른 날들 나오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맑고 침착한 눈 빛으로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안식일에 사탄에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이것이 바로 안식일에 참 뜻이다.

그러자 반대파 사람들은 창피해서 얼굴이 벌개져 부끄러워하고 병든 자 약한 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이 영광스런 일들을 보고 모처럼 모든 근심을 벗고 기뻐합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 속 현장으로 들어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안식일의 의미와 예배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성령께서 깨닫는 은혜와 기쁨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병든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스케쥴엔 오늘 사탄에 매인 이 여인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일정이 이미 잡혀 있었다고 믿습니다.

16절에 보면 주님은 여인이 십 팔년 동안이나 병마에 눌려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주님이 삼년 반의 사역기간을 정말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향인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요즘 투어버스로 6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꽤 먼 길입니다.

주님은 그 먼 거리를 여러 차례 걸어 다니며 사역하셨고 동서로 남북으로 정말 분주하게 다니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시고, 하루 종일 병자들을 만나 치료하시고 귀신을 쫒아 내십니다.

가는 곳마다 마이크도 없는 육성으로 수많은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쉴 새 없이 비난하고 대적하는 반대파들의 도전에 응대하셔야 했습니다.

밤이 되면 수시로 산에 올라가셔서 또 철야기도를 하셨지요.

제 때 식사할 겨를도 없이 주님은 정말 부지런히 유대 땅을 다니시며 사람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공생애 사역기간 중 할 수만 있다면 한 명의 죄인이라도 더 만나고 병자 한 명이라도 더 고쳐주려 하셨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분주한 사역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동일하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가만히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관망하고 계신 게 아닙니다.

성도들의 형편을 살피시고 환경을 진두지휘하시고 때에 맞는 도움을 준비하시고 불 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며 부지런히 일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그냥 흐뭇하게 바라만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잠자리를 봐주고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 시작해 교육을 시키고 진로를 걱정하고 장래까지를 위해 쉬임 없이 수고하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요?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그렇게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의 쉼 없는 사역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멀리 계시고 내 형편을 몰라주신다는 생각이들 때 오늘 구석진 시골 마을 까지 찾아가 여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의 시련과 문제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11절에 여인은 심한 통증으로 허리가 꼬부라져 펴기도 힘든 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병명도 알 수 없는 여인의 고통이 사탄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예수님은 먼저 밝히십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다 마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사역당시 주님께서 많은 병자들의 귀신을 쫒아내시며 병을 고치셨다고 기록합니다.

귀신이 병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해 질병이 들어왔지만 사탄도 우리 몸 여기저기를 꼬아놓아 악한 질병에 걸리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도 귀신이 붙어 척추 신경 어딘가를 누르던지 혈관을 막고 있던지 몸의 정상적인 흐름을 막고 있는 것이죠.

치유사역의 권위자 피터 호르빈은 「축사와 치유」란 책에서 귀신들려 아픈 증상들을 분별하여 제시합니다.

첫째는 지속적인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고쳐도 자꾸 재발하고 여기저기가 돌아가며 계속 아픈 것입니다.

둘째는 마약이나 도박, 알코올중독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낙심, 절망,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을 일으킵니다.

넷째는 자살, 폭행, 살인 등 극단적인 행동을 일으킵니다.

다섯째는 대대로 이어지는 유전병을 일으킵니다.

귀신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가 꼭 알고 대처해야만 합니다.

이 여인의 질병은 단지 과로나 사고나 전염성 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억압하고 있는 질병이라는 것이죠.

이런 질병은 의학적인 조치로는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여인도 여러 의원을 찾았었고 모든 좋다는 처방을 해보았을 것이나 꼼짝없이 병에 눌려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암이나 자연적인 병이라면 이미 죽었겠죠.

단지 귀신이 여인을 괴롭히는 목적으로 붙어있기에 죽지는 않고 고통 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아픔이 있을 때 다 자연적인 병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무조건 악한 영이 붙었다고도 해서도 안됩니다.

구별이 안 될 때는 그냥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하시면 됩니다.

성경에서도 기름을 바르며 즉 약을 써가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스런 병고에 시달리던 여인은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여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씀 어디에도 단서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여인의 믿음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십 팔년 동안 무지막지한 고생과 재산과 인격과 육체가 파탄이 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일방적인 주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16절에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에게 억압받는 믿음의 자녀인 우리를 구하고 풀어주시는 건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하실 일이고 하나님이 제일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값으로 따질 수 없고 갚을 수도 없어 우리는 늘 황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구걸하는 자에게 던져주듯 구원을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나를 대신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감당 못할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선 우리가 반드시 구원해야 할 자녀란 것입니다.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전 인류를 구원하고 싶으신 게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식을 낳은 부모의 마음이고 창조주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앗사리온은 오늘 날 화폐가치로 약6,250원에 해당됩니다.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었고 앗사리온 둘에는 원래 네 마리인데 아마 한 마리를 더 얹어 다섯 마리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렵던 시절 시골에선 참새구이가 단백질 보충에 한 몫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포장마차에도 참새구이라고 써 붙었던 걸 기억합니다.

요즘도 종로 뒷 골목에 가면 참새구이 집이 있다는 데 일인당 한 꼬치 밖에 안판다고 합니다.

참새 잡기가 힘들어서 그런다는 데 앉을 자리가 없이 꽉 찬 손님들이 대부분 옛날 향수를 못 잊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라고 합니다.

먹을 게 마땅찮은 예수님 당시에도 참새가 일반적인 육류로 취급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 덤으로 얹혀진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께서 내 머리카락 수까지 세고 계시다는 게 전 너무 좋습니다.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 기가 막힌 초정밀로 염기서열을 배열하신 그 분이십니다.

아무리 믿음이 부족하고 약해빠진 우리도 하나님이 손에 꼽고 계신 자녀라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산을 다녀오다 차 창을 통해 무심히 앞에 펼쳐진 하늘을 보고 있었는 데 어느 순간 갑자기 좀 특별난 느낌이 왔습니다.

뭔가해서 하늘을 주시해서 보고 있는 데 그때 저를 보고 계신 주님의 시선이 정말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오래 쳐다 보면 뭔가 시선이 느껴져 돌아 볼 때가 있죠.

그것처럼 아주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그 때 멀리 앞에 있는 산으로 막 저녁 해가 넘어가고 있었는 데 붉어진 구름 사이로 빛이 갈라져서 길게 비추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수연아, 참 아름답지? 내가 너를 위해 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차가 우회전을 했더니 반대편 하늘엔 회색 구름이 겹겹이 덮혀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수연아, 저것도 내가 너를 위해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단지 나 하나를 위해 저 아름다운 하늘과 해와 구름을 만드셨다니, 주님의 사랑이 진짜 오감으로 느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일 대 일로 이렇게 완전하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게 깨달아졌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시려고 하나님은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 중에도 하나님의 눈은 항상 우리를 주목하고 자연의 이치 속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을 빼앗은 바쁜 세상 일에서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거기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신 것을 점차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 속에서 애타게 마음 졸일 때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순간 도움의 손길을 베푸실 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병마로 인해 영혼도 육체도 인생도 완전히 꼬부라져 펼 수 없이 되 버린 여인이 주님이 계신 곳에 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있으면 됩니다.

슬프면 주님 앞에서 울고 괴로우면 주님 앞에서 아파하고 억울하면 주님 앞에 하소연하고 두려우면 주님 앞으로 달려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는 더 큰 고통이 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기쁠 때 하나님께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새해엔 더 많이 행복하시고 더 많이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과 문제들은 우리를 주목해 보고 계신 우리 하나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서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이 일이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된 것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으로 장래는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중 안식일에 7번 정도 병을 고치신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더 심한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됩니다.

율법대로 라면 응급상황이 아니면 안식일에 진료를 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엔 병원도 문을 닫고 응급실만 가동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열 여덟해나 병이 오래 된 이 여인을 굳이 안식일에 고칠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하루 더 있다 고친들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죠.

언젠가 춘향전의 이몽룡에 대한 유감있다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간 몽룡이 그 날 즉시 춘향을 구해주지 않고 하루 밤을 넘긴 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재회를 계획했다 한들 사랑하는 여인을 하루 밤 더 더럽고 절망적인 옥에 가둬둔 것은 사랑이 아닌 만용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변합니다.

16절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1절과 16절에 열여덟 해 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둘 다 열여덟 해라고 번역되었죠.

그런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11절은 십 팔년이라고 되어있지만 16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십에 팔년을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년도 긴 데 거기에 팔년이나 더 고통당하는 여인을 단 하루도 더 괴롭게 둘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도 제목이 한 달이 되었습니까?

일년이 되었습니까?

우리의 고통의 날 수를 분명히 하나님이 헤아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세상을 붙든 손을 놓게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때 홀연히 찾아오셔서 고통을 거두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오랜 질병과 문제라도 주님의 때가 되면 한 순간에 술술 풀리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를 환란과 눈물에서 건져주실 분은 오직 주님 뿐임을 믿고 조금 더 인내하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엄청난 기적을 목도한 회당장의 초연함이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왠만한 사람같으면 믿을 수 없는 기적 앞에 이성도 잃을 판입니다.

그런데도 종교적인 고집과 율법으로 예수님의 행위가 틀렸다는 불만만 터뜨리고 있습니다.

종교의 영이 그를 묶고 있어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에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안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자비와 사랑은 외면하고 자신의 편견과 아집을 고수하려는 그를 향해 주님은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안식일을 지키려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그 마음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없는 것이 주님 눈에 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일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대로부터 일주일 중 하루는 일을 쉬고 안식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민족은 유대인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이디어죠.

안식일의 유래는 성경 초입인 창세기에서부터 윤곽이 나타납니다.

창세기2장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 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그리고 일곱째 날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란 것을 만민 가운데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이 날에 너희도 일하지 말고 쉬라고 명령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는 두 가지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둘 째는 신명기 5장15절에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탄의 종이던 처지에서 구원하셨다는 고백이란 것이죠.

주일에 세상 일을 하루 쉬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두가지를 선언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럼 안식교처럼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하지 않고 왜 주일을 지킵니까?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가 우리 영혼을 구원하고 안식을 주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본래 의미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더 이상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을 성회로 모이며 여전히 하나님이 엿 새 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일곱 째 날 안식하신 창조주라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신앙고백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문제로 시비를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골로새서 2장 16절에 이렇게 명시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다.

유대인의 절기와 안식일은 다 예수님의 그림자요 상징일 뿐입니다.

지난 해도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정성을 다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줄 믿습니다.

새해에도 예배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둘 때 모든 삶이 조화롭고 형통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주일은 우리의 영혼과 몸이 주님 안에서 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주일 직장생활과 매일의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듭니까?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을 때 그들이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변 어느 나라도 일주일 중 하루를 일 안하고 쉬는 나라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종들을 부리고 열심히 일들을 하다가 결국 안식을 누려야 할 약속의 땅에서 쫒겨나 노예로 전락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도 주일에 쉬지 않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큰 돈 벌 것 같지만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쉰다는 개념 없이 일하는 민족 가운데 잘 사는 나라가 없습니다.

허덕이며 일해 보았자 오히려 더 빈곤해 지는 것이죠.

그렇다고 고단한 몸을 위해 예배도 드리지 않고 쉬면 되냐 그것은 아닙니다.

육신이 아무리 편히 쉰다고 안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분명히 몸은 늘어지게 쉬고 있는 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치 않다는 것이죠.

우리 영혼은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를 받을 때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은혜를 받고 만족하면 정신도 건강해지고 육체도 질병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곤고하고 메마르면 어느 새 정신과 마음도 평안을 잃게 되고 몸도 마음도 병들게 됩니다.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주님을 경외한다는 우리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에릭 리델이란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1924년 올림픽 경기에 스코틀랜드를 대표하여 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선이 있는 날이 주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큰 실의에 빠짐니다.

마침내 그는 출전을 포기했고 다음 날 그의 우승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신문 1면을 장식한 큰 글씨를 보게 됩니다.

주일엔 달릴 수 없다

그가 출전할 수 없다는 소식에 영국 경기위원회는 분개했고 신문들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에릭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400미터 경주가 주일이 아닌 다른 날 열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감독을 찾아가 400미터에서 달리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전례 없이 당장 출전자격을 받게 됩니다.

결승 경기가 시작되기 전 그의 팀 마사지 담당자가 에릭에게 종이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쪽지에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출발선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있었을 때, 에릭의 자리는 좋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날의 날씨는 참기 어려울 정도의 악천후였습니다.

에릭은 달리기 시작했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힘차게 뛰었습니다.

그의 달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마치 하나님을 마주보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마침내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누구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의 날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어떤 것이든 우리 기도 제목이 무엇이든 들고 항상 예배의 자리로 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곳에 있을 때 십팔년 동안 매인 문제들과 사탄의 세력에서 풀려나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과 걱정스런 문제들을 대면하기 전에 먼저 얼른 주님을 대면합니다.

염려와 문제들이 먼저 나를 억누르지 못하게 연약한 나를 힘껏 떨쳐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집중해서 나갑니다.

그러다보면 곧 성령의 만져주심이 내 입가를 미소 짓게 하고 마음에 즐거움과 평안을 주기 시작하십니다.

그 때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생각하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하면 어느새 집 채 만한 짐이 가쁜해져 있습니다.

문제가 좀 만만해 보이고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좀 사라집니다.

잘 해 낼 수 있을 것 같고 긍정적인 희망이 생깁니다.

어느새 내 인생의 짐을 주님께서 약속대로 나누어 지신 것입니다.

아침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짐과 근심에 눌려 하루의 시작부터 인생이 곤고해집니다.

낮에도 마찬가지죠.

바쁜 일에 쫒길 때는 모르지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걱정과 부정적인 생각과 불신앙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다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버지 앞으로 나가야합니다.

거기에는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스바냐3장14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아버지 앞에 심각한 문제도 오래 된 질병도 안타까운 소원도 다 갖고 나갈 때 우리를 묶임에서 반드시 풀어주시고 기쁨과 축복을 주실 줄을 믿으시길 이 시간 다시 한번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