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사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죠.
말씀을 읽어보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갈릴리 호수에 아침 해가 비추고 은빛 물결이 반짝이고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머리 위로는 물고기를 얻으려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겠죠.
예수님께서 호숫가 배에 오르셔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은혜롭고 평화로운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예수님과 모여 있는 무리들과 어부들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개념도 없이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전 인생을 걸고 수고와 물질과 마음을 헌신하는 신앙생활에서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잘 모른 채 따른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없습니다.
목석 우상 처럼 섬기고 복을 받으려는 거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오늘날 성도들을 매우 걱정하십니다.
제가 청소년기에 아직 주님을 모를 때 데미안이란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책 중에 데미안이란 신비스런 청년에 대해 헤르만 헷세가 얼마나 언어의 마술을 부렸는 지 제가 거기에 아주 깊이 매료가 된 적이 있습니다.
책 한권을 읽고도 가상의 책 속 인물을 마치 실제처럼 느낄 때가 있는 데 매일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어찌 그렇게 주님을 모르시는지요.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인품을 오늘 깊이 체험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들려주시는 지 성령께서 영적인 귀를 열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무리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만나보겠습니다.
1절에 무리가 몰려와서 란 말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서 말씀을 들으려고 뒤에서 막 밀어댔다는 말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주님을 따라 다닌 것을 보면 참 각자의 인생의 답답함과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없고 건강하고 집안이 다 평안하다면 뭐 하러 아침부터 주님 주변에 이렇게들 모여들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날 아침 게네사렛 호숫가는 아름다운 그림 속에 숨은그림찾기처럼 고달픈 인생의 스토리들이 들러붙어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갈급한 사람들이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베드로에게 배를 좀 내달라고 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절박한 문제를 안고 나온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했고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고침을 받으려고 몸싸움을 하며 밀어 재칠 때도 피곤해하고 짜증내거나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신경이 날카로워있던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다만 목자가 없이 유리하는 양 같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든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하며 나갈 때 주님이 반드시 들으시고 그 문제를 맡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피로하고 허기를 느끼고 탈진할 만큼 힘이 들어 털썩 주저 앉아 있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인생의 문제로 고통스럽게 나와 탄원하면 절대 내일로 미루신 적이 없고 거절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부모들 마음이 자식에 대해 늘 그렇지 않습니까?
피곤에 지쳐 쉬는 날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놀이동산 인파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몸살로 앓고 있다가도 학교에서 지친 모습으로 아이가 돌아오면 알 수 없는 힘으로 일어나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게 어머니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13장5절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에서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듯 무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며 보내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읽고 배워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진리들을 깨달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몰려온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학정에 시달리고 가난과 싸우며 아무 희망도 없이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천국의 소망을 잃은 지 오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쳐 주셨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죠.
사람들의 관심이 항상 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필요보다 사실 영적인 목마름이 채워지는 게 더 간절합니다.
그들은 구원받길 원했고 천국에 들어가길 갈망했습니다.
당시 서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했고 적당히 죄와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거룩한 율법은 지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죠.
그들은 율법자들 눈에 죄인이었고 천국 문 밖의 사람들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일깨워 주실 때 그 위로의 말씀과 복음이 너무 좋아 지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오늘 그들은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인생의 해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길 원하며 주님 앞에 나온 우리를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심령에 오늘 자비롭게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마음에 깊이 새겨주시길 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주님께서 고단하고 팍팍한 우리 인생에도 영혼을 살리는 생명수와 같은 말씀의 은혜를 날마다 부어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가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 때 한 쪽에는 마음에 평정이 깨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새워 호수 여기 저기에 그물을 던졌지만 이상하게 번번히 허탕을 쳤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조업은 밤에 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밤샘 조업이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는 일입니까?
게다가 밤새 빈 그물만 건져 올리고 있었으니 약도 오르고 화도 났겠지요.
힘이 좀 들어도 사업이 잘 되고 돈이 좀 들어오고 손에 잡히는 게 좀 있으면 그 맛에 견딜 힘도 나는 것이죠.
고생은 잔뜩 했는 데 아무런 보상이 없을 때 우리가 더 기운이 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의 노련한 어부로서의 자존심도 망가졌을 것입니다.
어부가 자기 텃 밭에서 밤새 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했다면 실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 아닙니까?
동업자 보기에도 창피하고 괜히 화가 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을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제이스도시락을 할 때 유난히 장사가 잘 안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상이 적게 오르는 자체로 마음이 힘들기도 하지만 장사가 안되는 게 이상하게 창피한 생각이 드는거예요.
배달직원 보기도 민망하고 옆집 식당 사장 얼굴도 괜히 피하고 싶어지는 좀 묘한 심리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런 기분에 사로잡히면 어디 틀어박혀 숨고 싶은 마음이 막 들고 그럽니다.
베드로는 다른 어부들이 들어오기 전에 얼른 그물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 눕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배가 두 척이 호숫가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갈릴리 호수 주변엔 수백 척의 고깃 배가 조업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밤새 허탕 친 두 배만 먼저 들어 왔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지요?
그 허탈한 아침, 그 창피한 아침,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들어가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그 시간,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배를 빌려달란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난감했을 것입니다.
꼼짝없이 배를 빌려드리고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죠.
말씀이 다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깊은 데로 몰고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전공자가 전공자에게 지시할 때가 제일 기분나쁘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예수님에 대한 최근 명성을 알고 있던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병고치고 설교하고 목수 일이라면 모를까 고기 잡는 일까지 훈수하시는 데야 베드로 성격에 욱하고 올라오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내 직장 문제는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 것 같죠?
내 앞 일은 아직까지 내 힘으로 살아온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죠?
내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풀어낼 것 같아 노상 나 혼자 머리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1장25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혼자서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해도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방향으로 응답을 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 하나님의 방식이 내 이성으로 볼 때 당장은 이해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깊은 데 그물을 내리는 예수님의 방법은 갈릴리 호수의 조업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아침이면 이미 모든 고기들이 먹이도 물지 않고 꼼짝 않고 숨어있는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임한 기적을 보십시오.
논리와 경험상 맞지 않는 말씀에 순종해 그물을 던졌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밤 새 한 마리 낚이지 않던 고기가 단 한번 투망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힌 것이죠.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포항으로 가다보면 돌0집이라는 유명한 음식점이 있다고 합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김0태장로님은 베드로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몇 년 전 성탄절에 김장로가 설치한 정치망 그물에 엄청난 방어 떼가 걸려든 것입니다.
어장 양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의 그물을 방어 떼가 교묘히 피해서 어장 중앙에 있는 김장로의 그물에만 몰려든 것입니다.
어장 상식으로는 원래 가장자리에 친 그물에 고기가 걸리지 가운데 쪽엔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날 건져 올린 방어를 수협에 경매해서 5억6천만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한사람의 그물에서 방어가 이렇게 많이 잡히기는 정치망 어장이 생긴 역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엔 그 자리에서 시가 1억 상당의 밍크고래가 포획되는 희귀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물고기를 잡아 횟집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걸 사명으로 알고 사는 믿음 좋은 김장로를 동네사람들이 다 한국판 베드로라고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오늘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힌 것이 실감이 나시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 이성과 생각과 다르게 인도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말씀이 우리 계획과 다르고 우리 생각과 다를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결과를 신뢰하고 따르면 놀라운 기적으로 인도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정작 기적을 목격한 베드로의 반응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배에 생선을 거둬 올리느라 야단 법석이 났을 때 기뻐해야 할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아래 털썩 엎드립니다.
그에 입에서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8절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굉장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목격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그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절대로 자연적인 게 아니란 것을 직감한 것이죠.
처음 영적인 은사나 기적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 마음에 굉장한 문화 충돌이 일어납니다.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 신기하고 기쁘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이 얼른 자신을 떠나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하죠.
우리 몸은 자연세계 속에서 죄와 뭉쳐서 살아가는 데 너무 익숙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실체 앞에 사는 게 이렇게 힘들고 부담스런 것입니다.
왜 구하는 데도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잘 보여주지 않으시는 줄 아시겠죠?
주님은 우리와 친밀해지기 위해 아주 서서히 다가 오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매일 주님과 함께 사는 삶에서 평안을 느끼고 만족을 느낄 수 있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큰 감동 없는 기도와 깨달음 없는 성경읽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꾸준히 경건을 위한 시간을 갖다보면 어느덧 영적으로 견고하게 성장하고 하나님을 좋아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동생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베드로는 동생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났고 베드로란 새로운 이름까지 받았지만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진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체험하고 나니 비로서 그의 모든 지각이 순식간에 달라지게 됩니다.
5절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8절에서 주여 라고 바뀝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다는 것은 그의 영이 거듭나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깨달은 것을 말합니다.
기적을 본다고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의 사역마다 율법을 어기는 지 감시하러 다니던 많은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다 주님의 병고치는 기적의 현장에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늘의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모르고 인류역사의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면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서 계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제일 먼저 안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은 제일 먼저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의 종들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선 자신의 죄 문제로 전전긍긍했던 것을 봅니다.
죄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견딜 자가 없습니다.
때로 범죄 사실이 드러나 검찰에 출두해 죄를 추궁 받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도됩니다.
죄가 사람들 앞에 드러날 때라도 이렇게 수치스럽고 자존감이 다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죄는 가릴 수 없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C.S.루이스는 현대는 인간이 재판장이 되고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 계신 시대 말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아무리 심판하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록자는 시편 32장1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의 죄를 가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바닷속을 꿰뚫어 보시고 물고기를 몰아오시는 주님의 눈 앞에 자신의 죄가 벌거벗긴 듯 드러나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무서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심판의 두려움에 놓인 그의 죄를 십자가의 은혜로 씻어주셨다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주님을 만나 죄를 깨닫고 또 속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벗어났던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자녀들임을 확신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
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2절에 호숫가에 배 두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의 의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께서 두 배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날 아침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한 목적을 갖고 갈릴리 호숫가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간밤에 이들이 밤새 노를 젓고 여기저기 그물을 던지며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아시다 뿐입니까?
밤새 베드로의 그물에 다가오는 물고기를 쫒으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지난 밤 단 한 마리의 물고기가 걸리지 않은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생의 어느 시기에 때로는 아무리 애를 쓰고 그물을 던져도 아무 것도 건져 올리지 못하고 기진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여기저기 물질이 새 나가 손해를 보고 공부건 사람과의 관계 건 내게 관련 된 모든 게 힘들어지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잘 되는 것만 섭리가 아니고 잘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아무 것도 되지 않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재난이 아니라 내 삶을 간섭하시며 하나님이 무언가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땐 내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나가 인내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셔야 합니다.
고질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부르시는지 모릅니다.
더 나은 진로와 사역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이 빈 배라는 허탈감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빨리 예수님을 내 삶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는 데 아무 것도 건져올리지 못했다면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때로 물고기를 다 좇으시고 우리 배를 비어있게 하시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가치 없는 것들을 털어내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것들로 채우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길 원하셨던 것은 비린내 나는 생선이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들이란 것이죠.
우리의 빈 배를 축복으로 가득 채워주셨다면 그것이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건 재능이건 명예로운 위치건 그것을 통해 더 가치있는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것이죠.
오늘 주님의 은혜로 빈 배에 가득 물고기를 채웠던 베드로는 그의 인생을 더 값진 것으로 채우기 위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의 삶 자체나 다름없던 물고기와 배를 과감하게 내버리고 그는 사람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으로 부름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저는 20대 후반에 구원을 받고 나름대로 전도자의 의무와 부담을 느끼며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혹시 택시를 타도 기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데 하는 부담을 느끼지 않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평신도로 있을 때 구역예배를 참석했을 때입니다.
그날 젊은 부부가 처음 참석을 했는 데 아내 되는 집사님이 저를 뚫어지게 보더니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저 원주예요하는 겁니다.
그 말에 깜짝 놀라 저도 그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는 데 얼굴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거예요.
제가 첫 발령을 받았던 학교에서 열심히 전도를 했었는 데 그 때 제가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나갔던 학생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교회를 잘 나가 믿음 좋은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님께 인도해 준 제가 생각나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는 데 이렇게 신기하게 만나게 되었다고 기뻐하더군요.
저도 전도의 열매가 눈 앞에 있는 걸 보며 너무 기뻤고 전도에 계속 힘쓰라는 하나님의 격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제자 부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껴 선교사훈련을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나약하고 믿음도 부족하다 해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겐 반드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상급이 될 전도의 열매를 나누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삶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전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된 그 맛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맛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온 걸 너무 기뻐하시기에 우리 안에 같은 큰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배가 물고기로 차고 넘친 것만 생각해서 제자들의 전도가 사람을 쓸어 담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설교 중 성령님의 역사로 예루살렘에서 오천명, 삼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단 한 영혼을 얻기 위해 빌립은 전갈과 뱀이 위협하는 황량한 사막으로 걸어가 이디오피아 내시 한 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따랐던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변변히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도 없이 목이 잘려 첫 번 째 순교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전도의 열매가 당장 없다 해도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평생 천하보다 더 귀한 단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 해도 우리 상을 잃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또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몸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로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복된 길 임을 기억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베드로는 오늘 비린내 나는 생선들을 던져버리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낚기 위한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평생 주님을 따를 때 이런 귀한 믿음을 늘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한다면 하나님 앞에 반드시 상을 잃지 않을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낮추고 섬기며 참고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언제인지 모르는 결실의 시간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하는 일에 반드시 마귀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성도가 모든 것을 다 버려서라도 얻어야 할 값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도의 열매인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마지막 절을 읽을 때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저는 이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합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자를 부르실 때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다 죽을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제자들의 순교를 알고 있기에 주님의 명령에 배와 고기들을 다 버려두고 따르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아픔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주시려 걸어가는 주님과 제자들의 뒷모습에서 왠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영원한 나라에서 가장 값지게 남을 길이기에 그 고난의 자리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꺼이 초대하신 줄 믿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우리 목숨이 위협받지 않는 이 때 인내를 갖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전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 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전도하는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지 순종하며 체험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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