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던 빚진 여인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어느 한 쪽이 조금 더 사랑하게 마련이죠.
사실 똑같이 서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조금 더 사랑함으로 희생하기 때문에 결국 많은 세상의 사랑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인 중에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 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롤랑 바르트라는 작가는 누가 더 많이 사랑하냐는 증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좀 피곤해도 먼 길을 자청해서 만나러 가는 사람이 찾아가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죠.
둘째는 기다리는 자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항상 기다리는 자기의 역할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혹 들었지만 내기는 항상 자신이 패자였다고 합니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약속 자리에 좀 늦게 도착하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지만 결국 더 많이 사랑하는 자신은 항상 시간이 있고, 정확하고, 일찍 도착하기조차 하더라는 것이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래서 기다리는 쪽은 항상 부모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바로 상대를 기다리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의 사랑이 큰 것을 우리가 배우려고 하지만 사실 가장 많이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장 오래 기다리셨고 제일 많이 노력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했을 때 예수님은 마치 기다리고계셨다는 듯이 응하지 않으십니까?
죄 많은 여인의 당돌한 습격을 받고도 예수님은 마치 여인이 들이닥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맞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시고 하늘나라를 상속해 주시기 위해 수 천년을 기다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기 까지 또 수십년을 기다려주셨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현실이 아무리 우리를 슬프게 하고 때로 비참하게 해도 우리는 아픈 마음을 안고 오늘도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을 맞아 세상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개신교 성도 수가 많지 않습니다.
세계의 71억 인구 중에 불과 6%정도인 4억명 정도가 개신교 성도입니다.
100명중에 여섯 명, 이런 어려운 시험을 우리 실력으로 어떻게 통과했겠습니까?
우리가 어쩌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지 그저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 앞에 나온 두 인물 바리새인 시몬과 죄 많은 여인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며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지를 배우길 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두 인물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인과 아벨이 그렇고 야곱과 에서, 다윗 왕과 사울 왕이 그렇죠.
오늘 본문도 바리새인 시몬과 죄 많은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식사자리에 마치 우연인 듯이 등장하는 여인과 바리새인들이 대조를 이루며 이야기를 꾸며갑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절묘한 무대인 셈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실 때 보면 정말 타이밍이 절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가장 정확한 때를 알고 계시고 모든 환경을 기가막히게 짜맞추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좀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움직이십니다.
본문처럼 이렇게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 대개는 영생을 얻은 부류와 영벌을 받은 부류의 인간을 보여주려는 의도이십니다.
누가 읽어도 구원 받기 위해 취해야 할 믿음의 태도를 뻔히 알수 있도록 대조를 통해 더 명확하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본문의 두 인물의 태도를 통해서도 결국 구원과 심판으로 갈리게 되는 두 부류의 인간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은 오늘 본문 50절의 말씀대로 확실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물론 주님은 시몬도 오늘 사건을 통해 구원받기를 바라셨던 것을 본문을 읽는 가운데서 이미 느꼈을 것입니다.
40절에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이 말씀에서 그를 가르쳐 깨닫게 하고 싶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몬이 오늘 사건 이후 회개하지 않았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결국은 내 삶에 종지부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오늘 여인이 예수님께 확정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평안이 없으면 믿음이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현실에도 도움이 안되고 영생에 대한 확신도 없는 믿음이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막연히 내가 구원받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처럼 실제적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을 확증해주는 인물들의 믿음에 우리 믿음을 비교해 보고 그들의 삶을 배우며 확신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 속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복음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어느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죠.
예수님을 믿는 데는 한 구절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김상복목사님 저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지독히도 박해하던 한 알콜 중독자 남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들어 온 남편은 성경을 읽고 있는 아내에게 욕을 하며 성경책을 뺏어 타고 있는 벽난로 안에 던져버렸습니다.
다음 날 난로의 재를 긁어 치우다 그는 타지 않고 남은 성경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읽어보다 소스라쳐 놀라 뒤로 넘어졌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는 성령의 강한 감동을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1850년 영국의 한 시골 마을은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십대의 한 소년은 그가 늘 다니던 교회에 갈 수가 없어 가까운 교회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마침 작은 교회에서는 출타했다 돌아오지 못하신 목사님을 대신해 한 평신도가 서툴게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한 본문은 이사야 45장22절 말씀이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여러 달 동안 이 소년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 괴로움 가운데 빠져있었습니다.
서툰 대리설교자는 별다르게 준비한 말씀 없이 본문을 계속 반복해서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구석에 앉은 새 방문자를 보고 이 소년을 향해 말했습니다.
‘젏은이 자네는 아주 피곤해 보이는 군,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그 말에 소년이 믿음으로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의 회심의 순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성령의 역사가 우리 중에 강하게 임하시길 소원합니다.
본문의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며 주시는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지배계층의 배척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적대세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본문을 보면 초대는 했지만 과히 예수님을 환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동지방에 풍습대로 더러워진 손님의 발을 씻어주지도 않은 것을 보면 영 대접이 시원치가 않죠.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도대체 왜 예수님을 모셨는 지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 중에 어떤 목적을 갖고 나오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시몬 같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시몬은 소문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맞는 지 탐색해볼 목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의 독백을 통해 볼 때 오히려 예수님을 흠잡을 의도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엔 동료 바리새인들도 많이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죄를 지은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렇게 죄인이라고 공인 된 경우는 대개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기였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동네사람들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죄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처지고 남들 앞에 당당하게 설 입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주의자 시몬의 집에 그것도 바리새인 남자들이 가득 모인 자리에 염치불구하고 들이 닥친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각이라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고 만나기 위한 열망이 여인을 사로잡았기에 멸시의 눈총이 쏟아질 게 뻔한 그곳에 쳐들어온 것입니다.
사랑이 참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놀라운 용기와 담력이 생기고 힘든 현실도 극복하게 됩니다.
여인은 아마도 많은 군중이 모였던 예수님의 집회에서 은혜를 입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뵙고 싶은 마음이 절절했고 자신이 더 이상 심판받을 죄인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그의 마음을 아셨기에 여인을 향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이 여인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아가는 것이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여인의 태도를 통해 예배자의 모습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나온 여인에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예배자에게 있어야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심드렁한 시몬과 모든 것을 다 드리고도 부족해 물처럼 자신을 쏟아붓고 싶은 여인의 열정이 너무 대조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에게 이런 열정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래 된 연인처럼 아무 느낌도 감정도 없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듯이 오늘도 지난 주와 똑같은 밋밋한 예배를 드리고 아무 성과도 느낌도 없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오늘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열정을 갖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기 위해서는 매일 일상에서도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힘써 일상에서 친근한 관계를 맺어가지 않는다면 주일예배에 갑작스런 열정은 생기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주일에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하는 것입니다.
왜 보통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가 힘들고 말씀은 어렵고 온종일 하나님을 잊고 살게 되겠습니까?
노력없이 저절로 자연스런 본성대로 살아가면 우리 죄의 본성과 영적인 태만함이 점점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어느 순간 정말 하나님은 안계신 것 같고 하늘이 닿힌 것 같은 막막함에 빠집니다.
여인이 주님을 만나길 간절히 고대하고 마을에 오실 정보를 입수하고 돈을 마련해 향유를 준비했듯이 우리에게도 평범한 삶 속에 항상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경건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꾸준한 기도와 말씀을 통해 차근 차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맛을 들여야 열정도 생깁니다.
만유의 주인이 되시고 그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천상의 천사들이 영원히 사모하며 섬기는 하나님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만큼 느껴질 것입니다.
오늘도 내게 생명을 주셔서 이 맑고 찬 공기를 호흡하게 하시고 건강한 두 다리와 구원받을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가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에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부었던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고 축복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런 예배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인지 아닌지는 구원의 척도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 보면 천사가 이렇게 요한사도에게 예언합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들과 성전 바깥 마당을 드나드는 사람을 구별하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구원의 은혜에 진정성 있는 감사와 예배가 없이 바리새인 시몬처럼 종교행위로 때우는 사람들이 마지막 때 환란과 시험을 통해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너무나 아름다운 비전이 있죠?
아버지 앞에 나온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감사와 감격의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의 은혜와 감격은 매일의 삶을 안연하고 자신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역대하16장9절에도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함께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도록 서로를 도와주고 믿음 안에 성장해가도록 우리 모두를 한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과 예배의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축복받을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정과 감사로 예배할 때 우리 모두에게 예배자를 대표하는 다윗에게 허락하신 모든 영적인 은혜와 세상의 축복을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이런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한갓 피조물이라는 신분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이 용기를 내어 연회장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선뜻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38절에 예수님의 뒤에 서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발 곁에 멀찍이 섰다고 기록합니다.
시편 99장 5절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본문 기록자인 의사 누가가 여인의 열정과 경외심을 예리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주님을 사모하기에 멀리 있는 것이 고통이지만 가까이 하기엔 자신이 또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한 것이죠.
우리 초코가 새벽이 되면 제 침대 위로 펄쩍 뛰어 올라오는 데 얼굴 있는 곳엔 차마 못 오고 슬그머니 발치에 드러눕습니다.
제가 주인인줄 알고 어려워 할 줄 아는 모습이 더 사랑스럽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 강아지 7마리를 분양한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동네 보신탕집에서 사육되던 개가 새끼를 가졌는 데 새끼 낳을 때가 되자 집을 탈출해 나와 근처 풀 밭에다 새끼를 낳고 다시 보신탕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새끼들의 운명을 알고 도망 나와 낳은 것도 신기하지만 그런 사람도 주인이라고 돌아간 어미개도 참 이해가 안되죠.
아무튼 개들은 주인을 주인으로 알아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환대하시지만 진정한 예배자는 만물의 지배자이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게 섬깁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기뻐하시며 세상에서 더 존귀한 자들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예배의 헌신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눈물을 터뜨립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과 안도에 복받쳐 흐르던 눈물은 땀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고단한 주님의 발을 볼 때 홍수가 되어 쏟아집니다.
하늘 위에 천지를 밟고 서실 하나님의 발이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렇게 더러워지고 피곤해 있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상대의 필요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눈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가 보입니다.
사람의 눈에 관심 있는 것만 보이지 않습니까?
아들이 군대 가면 어머니 눈에는 군인들만 보인다고 하죠.
아들을 군대 보낸 어머니들은 한결 같이 왜 이렇게 거리에 군인들이 많냐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제대하면 군인들도 다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시몬은 온종일 불쌍한 인파 속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의 피곤한 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사도가 천상의 주님을 다시 보았을 때 하얀 세마포 옷자락이 발에 끌리는 사이로 풀무불에 단련된 것 같은 빛나는 주님의 발을 보았습니다.
아름답고 빛나던 주님의 발이 자신을 위해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오셨것만시몬은 그 발에 물 한 바가지를 부어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포개어져 못이 박힐 그 발을 이 여인이 바라보며 눈물로 그 먼지를 씻고 입을 맞추고 머리털로 닦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립니다.
우리 인생에서 모든 것을 걸고 섬겨도 아깝지 않은 우리 주님을 여인처럼 이렇게 만나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하나님께 우리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이런 섬김과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 25에서 말씀하시죠.
또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고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기 위함입니다.
욥기 36장 11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우리가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와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축복하시는 줄 믿으시고 우리 섬김의 무릎과 손을 더욱 강하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분위기가 사실 참 묘합니다.
다소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을 식사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발생한 이 헤프닝을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인 시몬은 여인을 제지할 생각도 않고 어찌보면 죄많은 여인의 습격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곤란한 처지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시받는 여인이 다가와 많은 눈물로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고 입맞추고 향유를 바르는 동안 편안하게 발을 맡기고 계십니다.
평생 남에게 거절당하며 상처받고 살았을 여인입니다.
주님이 뿌리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릎 쓰고 예수님께 드리는 섬김을 주님은 만류하지 않고 다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예수님을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지조를 팔은 세리나 몸을 팔은 창기나 예수님은 그들의 아픈 과거와 상처를 묻지 않으시고 위로하고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범죄함 뒤에는 때로 방종도 있지만 괴로운 환경과 고독과 절망도 있음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친구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2장11절 그러므로 (우리를)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브리서11장16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 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때로 내 모습이 내가 봐도 부끄러울 지경인 데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답니다.
오히려 죄의 본성과 악의 사회구조 속에서 마음껏 하나님의 형상을 펼쳐보지 못하고 일그러진 인생을 살고 있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긍휼은 사랑보다 더 부드럽게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만의 미덕이십니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죄성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던 한 주간을 후회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 마음을 쏟아놓을 때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감추고 아버지 앞에 나온 우리의 작은 헌신과 예배를 받으시고 위로와 축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수업을 정리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많이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 받았을 때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헌신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사랑한다는 감정을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지 싫어하는 지 무관심한지 우리가 정확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전혀 다른 생소한 감정이 아닙니다.
내가 연인을 사랑하듯이 내 가족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좋고 가까이 가고 싶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실제적인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진정한 예배자가 되게 하고 자기의 인생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는 삶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행동을 보시며 이 여인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말씀합니까?
자기의 죄를 많이 용서받았다고 믿은 데서 나왔다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내가 얼마를 빚진 죄인이었다고 생각하냐에 달려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 죄가 많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내게 갚을 능력조차 없는 무거운 죄의 값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죠.
진정한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와 감사가 없으면 그냥 다른 사람들을 따라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언젠가 공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됩니까?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 주실 때 그것을 인정하고 죄가 되는 행동과 습관을 애써서 버려야 합니다.
제가 게으름이란 책을 읽는 데 게으름이 인간 내면에 있는 은밀한 죄라는 것을 작가가 계속 지적하는 데 슬그머니 거부감이 드는 겁니다.
나를 편안하게 하고 좀 느긋하게 쉬는 게 그 정도로 나쁜 것인지 지나치다는 생각이 언뜻 언뜻 드는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지적받을 때 절대 달갑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실 때 죄가 아니라고 우기면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머리가 환히 열리며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죄라고 구분한 것들을 죄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내 안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냉정함이 죄라고 하신다면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안에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어느 날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께 대한 불손과 망령 된 행실까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며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말씀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진정한 회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내가 죄의 본성을 따라 거리낌없이 하던 일들을 책망하실 때 뒤집어지며 일어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우리의 의지적인 인정과 그것을 버리려고 결단하는 양심적인 노력이 장차 성령이 임하시는 진정한 회개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나는 죄인이라고 머리를 떨구고 눈물로 뺨을 적시는 사람이 결코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죄는 그야말로 머리카락보다 더 많고 더 검다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를 비춰주실 때 더욱 더 알게 됩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을 상상이 아닌 진짜 내 감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기쁨을 연인들은 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모든 마음과 가진 것을 다 드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 여인의 마음에 좌절이 있겠습니까, 절망이 있겠습니까, 무슨 고통이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사랑받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감사와 자존감과 기쁨과 행복이 그 안에 넘쳐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것이죠.
주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이 음성이 들려야만 더 이상 믿음의 길에 갈등이 없고 삶에 두려움도 사라지고 내 갈 길이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더 많이 깨닫게 하셔서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또 오늘 살펴본 대로 여인의 섬김과 예배의 모습처럼 진정한 마음과 감사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우리 심령에 날마다 샘처럼 솟아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1.27 주일예배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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