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섯 번 째 창립기념일 예배를 드리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우리나라가 먹고 잘 시간도 없는 시간빈곤국이라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OECD회원국 중 수면시간이 최저인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기적을 이룬 나라, 그러나 기쁨을 잃은 나라라고 표현했더군요.
이런 바쁜 사회에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때로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은 우리에겐 기적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우리 모두가 믿음에 견고히 서가고 가정들이 잘 되어가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은혜를 항상 감사하며 섬기는 우리 모두를 앞으로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인이 될 것인지는 어떤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구원도 교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각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 교회의 영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을 현세의 축복에 두는 교회에 소속되면 현세에 복 받고 병고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복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빈곤하면 결과적으로 육신의 일도 함께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바로서면 육신의 일들이 바로 잡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지나치게 신비적인 신앙생활에 치우치는 교회라면 현실과의 부조화 속에서 결국 신앙과 삶이 둘 다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어떤 교회를 이루느냐가 그래서 참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잘되는 것은 곧 우리 개인이 잘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입니다.
오늘 5주년감사예배에 나눌 말씀도 성경에서 모범을 찾기 위해 요한계시록의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편지를 받은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 중에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칭찬과 위로를 받은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우리 교회가 본받고 따라야 할 점을 찾아보길 원합니다.
본문을 함께 보셨는데, 환난과 궁핍이 나오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이 나오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들이 나오니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머나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첫째로 서머나교회는 부요한 교회입니다.
서머나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들은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9절에서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서머나교회가 환난을 당하고 궁핍했다는 것입니다.당시 서머나는 무역이 성행하던 풍요로운 항구도시였습니다.
이즈메르라고 이름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이스탄불, 앙카라와 함께 터키의 3대 도시로 불리우는 번성한 도시입니다.
덕택에 서머나에 사는 사람들은 부의 혜택을 풍부하게 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인 연봉이 가장 높은 도시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서울이 아니라 울산이라고 합니다.
울산 직장인 평균연봉은 무려 7020만원으로 서울연봉 5312만원을 훌쩍 넘어섭니다.
물론 현대중공업과 같은 대기업과 오일회사들이 많기 때문이죠.
서머나사람들도 그런 부자 도시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서머나교회만 궁핍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도시의 부유한 혜택은 당시 정책이었던 로마황제 숭배자들, 로마황제의 백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민들은 1년에 한번 가이사제단에서 분향한 뒤에 증명서를 발부받았다고 합니다.
이 증명서 없이는 당연히 많은 부분 불이익을 당했던 것이죠.
그러니 흥청망청한 도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서머나 교인들은 궁핍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면에 있는 실상을 보여주시며 상황을 반전시켜 주십니다.
진짜 부자들은 서머나교회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교회에 대고 하신 말씀과 비교해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일곱교회 중 세상적으로 부자였던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책망하셨죠.
네가 나는 부요한 자라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네가 헐벗고 가난하니라
우리는 가치관이 세상과 다르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지금 현금이 많고 큰 집과 고급차를 가진 것이 부유하고 행복이라고 말할 때 속으시면 안됩니다.
그것이 있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만이 행복이고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서머나교회처럼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환난을 당하고 가난해졌다면 그게 차라리 더 부유하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장사하면 돈도 적게 벌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저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신경쓰다보면 나를 위해 실컷 비축해 두지도 못합니다.
신실하게 믿는데도 왜 사는 게 저렇게 신통치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 보시기엔 그게 진짜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부요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처럼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것은 쉬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큰 대형교회의 화려한 건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웅장하게 찬송을 부르면 눈물도 왈칵 나고 저절로 예배에 은혜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서 봉사하면 많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도 받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많은 청년들 앞에서 찬양하고 연주한다 해도 어디 하나 빠질 게 없잖습니까?
그런데 작은 교회 예배는 옆 사람 왔나 신경 쓰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찬양해도 은혜를 나눌 사람도 적고, 더 봉사하고 싶어도 마땅한 자리가 없습니다.
작은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야전훈련입니다.
신앙에 엄청난 야성이 생기고 근력과 강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인하지 못하면 우리 벌써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게다가 대형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대기업 삼성 정도 다니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기분 경험해 봐서 이해합니다.
이름 없는 교회 다닌다면 좀 시시하게 본다는 것 눈치로 우리가 다 압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대형교회이건 개척교회이건 누가 예수님 앞에 바른 신앙으로 세워져 가는 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기뻐하실 믿음인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수천명이 예배드릴 때는 믿음이 불끈 솟다가 집에 돌아가 낙심할 상황 앞에서 정작 돌파해야 할 강인한 믿음이 없다면 뭐합니까?
내 믿음이 부요한 줄 알았다 정작 꺼내 쓰려할 때 바닥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면 어떻하겠습니까?
가장 절박할 때, 우리는 결국 혼자 서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도,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 때 내가 예수님의 손을 분명히 붙들고 있는 것만이 환난을 피할 유일한 비상구가 됩니다.
진짜 믿음의 부요함은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은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믿음이 서로에게 잘 드러난다는 면에서도 축복입니다.
주일예배 한번 안 드리면 성빈이 까지 다 압니다.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내 신앙을 오해하거나, 사람들 앞에 나를 내세우는 걸 봉사로 착각하거나, 많은 군중 속에 숨어서 내 신앙의 실체를 모르는 것에 비할 때 분명 축복입니다.
내 믿음의 갈등과 시험도 정직하게 드러나야 고쳐지고 바로잡히고 건강하고 부요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는 진실한 믿음과 연약한 교회를 섬기는 일에 괴로움이 있고 희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교회의 외적인 모습과 우리의 외적인 신앙생활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에게 주님을 위한 환난과 궁핍이 있는지를 보고 진정 우리의 부요함을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소아시아의 부요했던 교회들은 다 관광 유적지로 남아있지만 신기하게 지금도 서머나 교회에서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는 희생과 고난이 있는 한 우리 교회와 성도들과 가정이 영원히 주님을 경배하는 아름다운 처소로 남게 될 것입니다.
2.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도 겨우 겨우 버티고 있는 데, 장차 더 큰 고난이 온다는 말씀을 들을 때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어땠을까요?
이게 무슨 위로이고 칭찬의 말씀입니까?
그런데 분명하게 예수님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닥쳐올 환난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이 두렵고 지금 당한 문제에 짓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건의 전모와 결과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승리한 축구경기를 볼 때 가슴 조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머나교회에 분명히 고난이 닥쳐올 것이고 우리 삶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미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지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작은 근심을 모르시고, 이미 저질러진 문제들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어느 정도인지 정말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까지 아시고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신다는 믿음은 고난 중에 유일한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 중에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이고 고난은 우리 혼자 견디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위기 중에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위로하시고 내일 일을 준비하시고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우리 마음을 강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분은 목자 되신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니 감정이 복받쳤습니다.
혼자 두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잠깐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치시고 영원히 함께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모든 의식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성령께서 떠나지 않으시고 영혼을 감싸고 계신다는 생각이 왜 그제서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의식 가운데서 우리 어머니가 명료하게 ‘주여!’라고 부르는 소리를 제가 들었는 데, 성령님께서 분명히 어머니의 영혼이 계속 예수님을 향하도록 붙들어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곤고한 순간, 죽음을 직면하고 싸우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장차 받을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고난은 장차 마귀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신앙을 흔들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문제들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서머나교회를 감옥에 가둘 자들은 무고하게 고소하는 유대인들과 로마군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 배후에 누가 역사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냉철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마귀를 이길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환경의 너울을 쓰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붙들고 있는 한 마귀는 절대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또 마귀가 휘져어 놓은 어떤 악조건도 예수님과 함께 풀어가면 안 풀릴 일이 절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주님께 모든 일을 기도하며 의지할 뿐이지 결코 다가올 고난과 그 배후의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큰 시련을 만들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뿌리째 뽑으려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또 모든 고난의 양과 시간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본문에서 서머나 교회 전체를 마귀가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몇 사람만 옥에 던져 넣는다고 하십니다.
우리 삶의 시련과 풍랑이 일 때 그것이 우리를 통채로 삼키고 무너뜨릴 것 같지만, 아닙니다.
단지 삶의 작은 부분에 한정되게 시험이 온다는 뜻입니다.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능히 이겨낼 만한 부분만 시련을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시련은 불과 10일 동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0일이라는 의미는 긴 시간이 아닙니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를 생각해 보시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문화에서도 10일이라는 시간이 상징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감옥과 같은 환경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 그리 긴 시간이 되지 않아 끝난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과 개인사의 통치권은 마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님이신 우리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며 성도와 교회는 어떤 시련의 때이든 두려움 없이 담대해야 할 것입니다.
3. 다음은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관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 곧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이 말씀은 충성이 곧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내면의 믿음이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특히 충성심은 환난 중에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내게 닥친 상황들이 마음을 무너지게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한결 같은 믿음을 지킨다면 그것은 주님보시기에 아름다운 충성입니다.
세속의 가치관에서도 충성은 가장 높은 덕이라고 여겨집니다.
약삭빠른 사람이 볼 때 충성된 사람은 미련해 보이지만 누구든 충성된 사람을 얻길 원하고 충성하는 자 앞에서 감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충성’은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고대 로마도시 폼페이가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18시간 만에 멸망했던 과거의 역사를 아실 것입니다.
AD79년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의 남쪽에 있던 폼페이도시는 지체 높은 사람들의 여름휴양도시로 화려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고도 없이 베수비오화산이 폭발합니다.
불타는 용암과 화산재가 무섭게 분출되어 삽시간에 폼페이도시 전체를 덮쳤습니다.
날마다 흥겨운 유흥에 빠져 살던 폼페이시는 화산재 밑으로 깊게 가라앉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700여년이 지난 뒤, 베수비오 산 아래서 밭을 갈던 농부가 폼페이시의 녹슨 수도관 하나를 캐냈습니다.
골동품에 관심이 많던 나폴리의 공주는 발굴을 명령했고 폭약을 써서 15미터 두께의 용암바위를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하에 묻혀있던 폼페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폼페이 발굴엔 미스테리가 있었습니다.
화산재 밑에서 도시의 전모가 완벽하게 드러날수록 사람들은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그 큰 도시가 사람의 흔적이 없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다시 수십년이 지난 뒤 이탈리아고고학자 피오렐리교수는 집집마다 두텁게 굳어진 화산재 바닥을 조사하다 그 속에 비어있는 이상한 공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석고액을 부었습니다.
발굴팀이 끌과 망치로 굳은 화산재를 조심스럽게 깨뜨려 나가던 중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빈 공간을 채운 하얀석고가 사람의 형체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순식간에 끓는 용암과 화산재에 덮힌 인체는 그 안에서 완전히 썩어 사라지고 동공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석고작업을 통해 복원해 낸 시신이 천여구가 넘습니다.
당시의 급박함과 공포를 그대로 보여주는 시신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날 유황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검은 화산재와 뜨거운 열이 도시를 덮치는 순간을 생생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결사적으로 아기를 끌어 안은 여인의 모습도 있고, 도망치던 자세로 굳어버린 공포에 찬 얼굴 모습도 있었습니다.
아기돼지는 화덕에 막 넣어지는 순간의 모습대로 석고로 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공할 만한 공포의 현장을 말해주는 석고들 사이에 전혀 낯선 느낌의 석고상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로마군복을 입고 창을 들고 서있는 성문 보초병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얼굴에는 공포의 흔적도 동요의 표정도 없었습니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자세로 서서 성문을 지키다 화산재에 덮힌 초병의 모습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한 화가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그날 폼페이의 불타오르는 화산과 도시를 덮은 시꺼먼 화산재와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성문 앞에는 공포와 비명에 전혀 동요되지 않은 입을 굳게 다문 초병이 서있습니다.
런던 워커박물관에 소장 된 Contler의 ‘충성’이라는 그림입니다.
자기의 임무를 위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초병의 기이한 충성이 지금도 보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이 군인의 상관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오직 그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군인은 죽음 앞에서 미동도 않고 그 자리를 지켰을까요?
사람은 소중한 자신의 생애와 자신의 목숨을 걸만한 가치를 찾지 못했을 때 문득 문득 삶이 허탈하고 허무함을 느낍니다.
목숨을 걸만한 가치를 찾은 사람은 열정으로 그 일에 충성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충성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셨습니까?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서머나교회를 향해 힘있게 명령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리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신 충성의 증인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충성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꼭 죽음을 불사하는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충성된 사람들은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항거하는 마귀의 세력은 순순히 기지를 내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두려워 도망가도록 감옥에 던져 넣기도 합니다.
용기없는 자들이 다 도망가고 주 예수님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폼페이의 초병처럼 충성된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나님나라를 이룩한 것입니다.
콜롯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며 충성되게 믿음을 지킨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죽음으로 복음의 진실을 알린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을 오락거리로 여기던 로마의 귀족들이 서서히 침묵속에 빠져 들었습니다.
저들이 죽기까지 충성하는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 지워지지 않는 질문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결국 로마 귀족들까지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하고, 기독교인들이 10%가 되지 않았을 때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그들의 충성 앞에 무너져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곧게 뻗은 나무는 재목이 되어 잘려가고 멋진 소나무는 관상용으로 캐가고, 못난 모양으로 자란 소나무는 끝까지 남아 씨를 퍼트리고 묵묵히 선산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문지기 초병처럼, 못난 소나무처럼 오직 한결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갑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충성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창립5주년을 맞아 우리 교회가 서머나 교회 처럼 주님을 위해 환난을 당함으로 진정 부요한 교회,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5년2월22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