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이라는 신학자는 구약성경 중에 스가랴서가 의미를 알기 가장 힘든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서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거의 충격적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몇 구절을 볼까요?
9장9절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5백년전 스가랴선지자에 의해 이렇게 정확히 예언되었습니다.
또 11장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들이 나 하나님을 헤아려 값을 매긴 게 은 삼십 개라는 말씀이죠.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개를 받고 제사장들에게 넘겨준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또 그 은 삼십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졌다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27장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을 후회하고 성전에 던지고 간 은 삼십을 어떻게 쓸것인지)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이 정도면 스가랴서에 대한 관심이 확 생기지 않습니까?스가랴서에는 스가랴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여덟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그 중 우리가 읽은 부분은 네번째 환상입니다.
저도 여러번 읽었지만 과연 제롬의 말대로 의미를 정확히 알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본문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을까, 그 때 백성들의 상황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좀 이해가 됩니다.
오늘 상당히 어려운 본문에 도전하지만 성령께서 분명히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 페르시아제국을 세운 고레스왕의 칙령에 따라 본토 유대땅으로 돌아온 때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만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이 떨어졌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하고 열광했겠습니까?
이젠 돌아가서 과거 다윗왕 때의 영광을 되찾고 잘 살게 될 것을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예언 뒤에는 성전재건과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가 다스리는 완전한 영광의 나라가 올 것이 함께 예언되어 있었거든요.
기대에 부푼 1차 귀환자들은 천오백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행군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성전 터에 성전을 짓기 위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주변 민족들의 방해로 성전공사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성전공사가 중단 된 채 무려 15년이 흘러간 시점이 바로 오늘 스가랴선지자가 하나님께 환상을 받은 시기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성전도 짓지 못했는데 무슨 다윗왕의 후손인 메시야가 오셔서 통치를 하시겠습니까?신앙의 부흥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기대했던 귀환자들의 열정은 점점 사그러 들었던 것이죠.
그러는 사이 이젠 현실적으로 내 집이나 잘 짓고 농사나 지으며 우리끼리 잘 먹고 살자는 분위기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선지자를 통해 성전을 건축하라, 반드시 메시야가 성전에 오실 것이라는 환상과 예언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며 본문의 환상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스가랴가 보게 된 환상에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천사와 당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사탄 그리고 스가랴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천사는 구약성경에서 성육신하시기 전 성자하나님을 일컬을 때 쓰는 호칭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 쪽에 서서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인지 그림이 그려지시죠?
마치 하늘나라 법정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를 참소하고 그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당시 귀환한 백성들을 지도하던 대제사장이지만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또 현대로 말하자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리우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대제사장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실제로 불려가 서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환상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영적인 시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예루살렘에 있지만 그 모습이 천상에서 영적으로 볼 때 이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들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집이나 일터나 학교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는 영적인 측면에서 실시간 모니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으로 조심해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공의 앞에 드러난 영적 실체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럽다는 단어는 조금 더러운 게 아니라 혐오스러울 정도로 더러운 최상급의 더러움을 말합니다.
왜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을까요?
레위기에 보면 대제사장의 옷은 속죄제물의 피를 뿌려 정결하게 했습니다.
성전이 없고 제사가 없으니 여호수아가 속죄 받지 못한 상황인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제사장의 직무를 본다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죽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도 대속죄일 제사를 통해 속죄 받지 못하고 죄 중에서 더럽게 살고 있는 셈이죠.
대제사장인 여호수아가 그래도 나름 정결한 삶을 살지 않았겠습니까?그러나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 받지 못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냄새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더러운 죄인을 왜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고 옹호하시냐가 지금 사탄이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범죄한 사탄이 어떻게 해서 아직도 하나님 앞에 들락거리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사탄과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를 약점으로 잡고 늘어지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진리는 우리의 자연적인 지각으로는 다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제한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정확히 알려주신 사실만 우리는 이해하면 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사탄이 일정 기간까지 하나님 앞에 출입하도록 허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사탄은 우리를 대적하고 고발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욥기에서도 사탄이 하나님 앞, 천상의 회의에 나타나 욥을 고발했던 것을 볼 수 있죠.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의 과실을 참소하던 사탄이 쫒겨 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 사탄은 하나님께 책망 받은 존재, 즉 심판받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점잖게 나무라시는 것 같지만 여기서 책망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 곧 심판을 뜻합니다.
이 말씀 속에 사탄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하는 것은 곧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시비한다는 것 자체가 피조물의 위치를 망각한 교만하고 사악한 도발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나님이 심판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을 불에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같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만에 겨우 벗어난 불쌍한 처지입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와 폐허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참소하는 사탄의 악랄한 본성과 사악함을 하나님이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이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명백한 도발과 자비와 긍휼이 눈꼽 만큼도 없는 사악함입니다.
마귀의 죄는 긍휼과 사랑이 없는 무자비함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 무자비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듯이 마귀도 그래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동기가 사랑인 반면 죄를 지은 인간과 사탄의 동기는 오직 자기만을 위한 지독한 자기애입니다.
하나님도 안중에 없고,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이 피조물인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그 동기가 자기애입니다.
타인을 위한 사랑과 헌신인 것 같아도 실은 자기 이익과 자기 신념과 자기 구원과 자기 명예와 자기의 탁월함을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인류 박애주의나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자살폭탄 테러나 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동기는 세상에 없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사랑이 세상에 있습니까?
심지어 지옥도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악함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존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알잖아요, 사람 죽어도 안 바뀐다고.
인간의 위장 된 도덕과 교양 속에 감춰진 악이 다 드러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끝없이 분출되는 사악함을 갖고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당연히 누가 좀 말려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악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에게도 최악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악을 지옥에서 끝까지 다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에 보면 그들이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는 무자비함과 교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큰 죄라는 것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뭉클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불에 그슬린 이스라엘백성들과 우리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험악한 삶을 지나오며 당한 고난의 그슬린 흔적을 지닌 채 겨우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속 마음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아시고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상처를 막 공격하죠.
지금 여호수아에게 한 것처럼 우리가 성도의 모습대로 살지 못할 때 끊임없이 참소를 하고 고발 합니다.
우리 오른 편에 서서 우리의 생각 속에 비난과 조소와 부정적인 화살을 쏘아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네가 무슨 복을 받겠냐,
아직도 그렇게 은혜를 못 받으니 아예 포기해라.
마음이 그렇게 더러우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생각도 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책망하십니다.
마귀가 공격하는 생각이 성령께서 회개하게 하는 생각과 다른 것은 마귀는 아예 믿음의 싸움을 하고 싶지 않게 우리를 낙담킨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은 우리를 절대 불쌍히 보지 않습니다.
죄와 악에게서 일말의 자비라도 구할 생각 마십시오.
마귀의 목적은 철저하게 우리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시편기자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103편13절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가 여전히 세상에 연연하고 의심하고 죄에 질질 끌려 다니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옷과 같은 죄를 부끄러워하며 아버지 앞에 나온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사탄의 시도와는 완전 다른 하나님의 판결을 보십시오.
4절에 보니 사탄을 책망하신 하나님께서 아예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겨 버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나님께서 사탄의 면전에서 여호수아의 죄악을 제거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러셔도 되는 것입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무 조건도 없이 사람의 죄악을 제거해 버리십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지만 못하시는 게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바꾸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결과로 사망과 심판을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더러운 죄악을 그냥 없었던 것처럼 제거해 버리시냐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힌트가 5절에 있습니다.
(명령이 내려지자 여호수아에게) 곧 정결한 관을 머리에 씌우고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아까 1절에서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지금은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 곁에 섰다고 하죠?
이런 단어가 그냥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1절의 앞에 서다는 것은 재판용어로서 재판을 받기 위해 선 것을 말합니다.
먼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은 심판자 앞에 판결을 받기 위해 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자리를 바꿔 여호수아의 곁에 섰다는 것은 심판자가 아니라 변호사, 중보자가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시편 109장 31에 이렇게 증명합니다.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하시고 중보자가 되실 것을 걸고 그 죄악을 제거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이신 우리의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예수님의 대속으로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거룩한 제사장이 된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내 도를 행하고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집을 다스리고 내 뜰을 지켜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진리는 먼저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이 주님의 도를 행하고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가 왜 그렇게 어렵고 짐이 됩니까?
더러운 사탄조차 비웃을 만큼 더럽고 추악한 내 죄의 옷을 벗기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직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며칠 전 새롭게 하소서에 탈북한 음악가 부부가 나온 방송을 보았습니다.
남편 집사님은 북한에서 평양음대교수에 음악감독으로 정말 잘 나가던 고급 당원이었습니다.
얼마나 황태자 같은 생활을 했냐면 남한에 와서 고급 양복을 세탁기에 넣어서 돌렸다고 합니다.
북한의 고위관리들이 받는 대우가 상상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 분이 교환교수로 유럽에 나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남한으로 오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끼던 바이올린을 브로커에게 담보로 주고 목숨을 걸고 남한에 들어왔는데 관련기관에서 탈북동기를 묻더랍니다.
이 집사님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다고 하니 믿지 못하는 거예요.
정말 신앙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 버렸냐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분명히 말씀하더군요.
자기의 간절한 소망은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대로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다는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짐이 아닙니다.
다만 내 죄의 근성이 나를 괴롭게 할 뿐이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지,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절대로 짐이 아니고 무거운 의무라고 절대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단번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예언이 8절과 9절에 계속됩니다.
이들은 다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내가 한 돌을 세우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장차 일어날 놀라운 일에 대한 예표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도, 성전을 건축할 여호수아와 스룹바벨도 예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하실 놀라운 일을 싹, 일곱 눈을 가진 돌, 단번에 제거 된 죄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다 예수님과 관련된 단어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이사야선지자도 메시야의 오심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11장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새의 아들인 다윗왕의 후손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9절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한 돌에 대해 말씀합니다.
한 돌에 일곱 눈이 있고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이스라엘이 성전을 세우려 할 때 문제 중 하나는 법궤가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성막이 법궤를 안치하기 위한 처소였고 가나안 땅에 안착하고 나서 성전을 지은 것도 이 법궤를 안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언약하고 그 증거로 받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그 돌판을 넣은 법궤, 법궤의 뚜껑인 시은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없는 성전을 지어야 하는 사람들이 대체 이런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텅빈 지성소에 대고 거기에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는 일년에 한번 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에 그 피를 붓고 민족 전체의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없는 데 대제사장이 도대체 어디다 피를 뿌리고 어떻게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걱정하지마라, 율법을 기록한 돌판 대신에 내가 새로운 돌을 세우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곱 눈이 있는 한 돌, 일곱 눈은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그 돌은 곧 하나님 자신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새길 것을 새기신다고 하십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직접 친수로 기록한 율법을 주셨듯이 이 돌 위에 새길 것을 새기시겠다고 합니다.
무엇을 새기시겠습니까?
과거의 그 율법이 아니라 새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키지 못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명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보혈을 부어 하루에 이 땅의 죄악을 다 제거하신다는 놀라운 예언인 것입니다.
스가랴선지자에게 보여주신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좀 아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스가랴선지자를 통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이스라엘백성들을 격려하고 힘을 주셔서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표일 뿐이고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10절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구약성경에서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상태를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속죄로 인한 영원한 천국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불에 그슬린 타다가 겨우 건져진 나무토막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 줄 믿습니다.
이제 주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도를 기뻐 행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고 뜰을 지키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만이 우리 삶이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풍성하고 안전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 된 나라는 또 서로 초대하는 사랑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젠 사랑으로 서로를 초대하며 평안과 풍요를 누리며 이땅에서도 축복받고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5년3월1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