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새해 첫주일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더 진실되고 성숙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생활도 안정되어 큰 어려움 없이 지내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올해 우리가 함께 추구해 나갈 교회표어를 정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라
이 말씀을 올 한해 우리 모두의 지침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모든 면에서 성공적인 한 해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바른 신앙 위에 내가 올바로 서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마땅한 책임을 다하며 살 수 있다면 가장 큰 복을 받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뭔가 짐을 질수 있을만한 믿음으로 성장했다면 정말 큰 복입니다.
짐도 질만한 믿음과 건강과 사회적 여건이 좀 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해마다 우리 믿음이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또 여러 해 동안 충성되게 하나님을 따른 성도님들의 생활도 가지고 있는 악조건에 대비해서 분명히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더 헌신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된 모두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우리에게 더 주실지 참 기대가 됩니다.
새해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어두운 전망들을 예보하고 있지만 사실 제 속마음은 그렇게 걱정스럽지는 않아요.
송구영신예배에서 비관적인 사회문제들과 통계들을 예로 들었지만 속으로 너무 걱정이 안되고 감정이 안 실려 설교하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상황이 어떻든 우리가 지금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갈건데, 작년보다 더 우리 모두를 축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불끈 솟아서 기분이 너무 좋기만 한 송구영신 예배였습니다.
올해도 믿음의 공동체에 굳게 붙어서 주님을 따를 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로부터 은혜가 흘러 넘치고 복이 점점 더 채워지리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 속에 올해 표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또 이대로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유다서는 단1장으로 짧게 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보낸 사람은 유다입니다.
유다서 역시 초기교회에 성행했던 이단의 침투로 위기를 당한 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바른 신앙은 초기 교회 때부터 항상 이래 왔습니다.
교회의 이천년 역사를 보면 항상 이단과 세속주의와 안일함에서 오는 성도들의 믿음의 퇴보와 싸워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파선하게 합니다.
끝 날이 올수록 점점 더 믿음으로 살기는 어려워질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바로서야 영적인 생명 뿐 아니라 모든 일이 바로 잡히고 삶이 안정되고 편해진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래서 올해 먼저는 우리가 좋자고 올바른 믿음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바로 서야 교회도, 가정도, 일도, 제대로 감당할 여력이 생깁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우리 신앙을 바로 세우라고 합니까?
먼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이 편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깨닫고 믿은 성도들에게 쓴 것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는 것은 성경적인 올바른 믿음을 힘써서 고수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유다서는 특히 교회 안에 암초 같은 이단세력들이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에 강력히 대응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이단 문제에 당장은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배교와 이단의 문제는 교회역사에서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오랜 영적 싸움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힘써 지키는 것은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세상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해가죠.
비싼 돈을 주고 샀던 비디오카메라가 이젠 쓰기에 번거로운 퇴물이 되었잖습니까?
너나 할 것없이 하나씩 장만했던 밍크코트, 요즘 입고 나서면 왠지 좀 어색하잖아요?
다들 넓은 아파트를 꿈꿨지만 이젠 가족수가 줄고 고령화시대로 접어들다 보니 작은 평수에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이런 유행과 변화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한때는 교회가 좀 부흥하면 교회수양관을 짓는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찬송가만 부르던 교회 음악에서도 이젠 CCM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옛날엔 드럼이 예배 악기로 사용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대의 유행과 분위기가 교회에도 영향을 주고 예배스타일이나 교회생활에 변화를 줍니다.
그러나 외형에 작은 변화들이 있다 해도 절대로 바뀌면 안되는 신앙의 명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을 연구하고 깨달아 확립된 신앙의 기본적인 진리들은 확고부동해야 합니다.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이단 사상에 대해서는 싸워서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얼마 전부터 사도신경을 예배순서에 넣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을 연구해서 추출해 낸, 신자들이 믿고 고백해야 할 근본적인 신조입니다.
우리가 매주 배우고 믿는 신앙의 내용들입니다.
예배순서에 넣는 교회도 있고 빼는 교회도 있는데 우리교회엔 새신자분들이 많아서 당분간 넣으려고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정리된 기독교의 원리들은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에 의해 증거되고 보존된 아주 중요한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 사도신경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고 믿는다면 교묘한 이단 사상과 세속주의를 감별해 내고 우리 믿음을 지켜낼 수가 있습니다.
비진리에는 성령께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고 악령이 역사합니다.
건너편 스포츠센터를 사서 리모델링한 이단시비가 있는 교회가 벌써 입주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 십자가, 기도, 이런 얘기를 한다고 다 올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목사의 이단성이 드러나려면 상당 기간이 흘러 잘못된 열매들이 증거물로 보여야 알게 됩니다.
일반 성도들이 한두 번 예배에 참여해서 이단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 힘듭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신기한 기적들이 나타나고, 마치 하나님이나 된 듯이 교인들을 제압하는 목사의 카리스마에 빠져 미혹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의외로 아주 쉽게 힘에 굴복하고 추종해서 안전을 구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문제는 성경보다 목사가 받았다는 계시와 기적적인 현상들을 더 신봉하는데 있습니다.
교회명을 이번에 바꿨더군요.
전에 마트에서 여성의 몰카를 찍다 잡힌 사람이 이 교회 부목사라, 세상에 안 좋게 알려진 교회이름을 아마 바꾼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극성스럽게 전도하러 나설 것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단성이 있는 교회에 나가면 영혼도 털리고, 결국엔 다들 재산도 털립니다.
올해는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배우고 또 예배설교에 잘 집중해서 더 견고하게 믿음의 기반을 다지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가 생각해도 믿음의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누가 내 신앙생활에 훈수를 두려고 할 때 겸손한 것도 좋지만, 늘 ‘나는 아는 게 없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내가 성경의 올바른 믿음 위에 어떻게 나를 건축했는지 언제고 당당하게 믿음의 내용을 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 그렇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세워나가야 할 올바른 믿음은 단지 이런 사도들의 신앙의 내용을 잘 알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할 올바른 믿음은 정확하게 무엇을 믿는지를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으로 아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실체를 만나고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에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을 졸라서 얻어내는 것이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무엇을 얻기에 앞서 실체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누리며 사는 완전한 믿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 중에 경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대개 공통적인 게 거의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내 힘으로 살아갈만한 데 굳이 기도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적인 기도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탑돌이를 하며 빌거나, 새해 정동진에 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소원을 빌거나, 수행을 위해 기도하는 것하고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종교적인 기도의 경험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는 기도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관계성을 갖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 예수님을 잘 모르면서 하는 기도는 성경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유대인들이 오랜 역사를 두고 훈련한 것과 같은 종교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루 세 번 유대교식 기도에 잘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받고 나니 그분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합니다.
막연한 절대자께 종교적인 기원을 하다가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라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고 그때 가르쳐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지금도 통곡에 벽에 매달려 열정적인 유대교인들이 혼신을 다해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종교적인 기도가 우리의 기도와 다른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감을 전혀 모르고 종교적인 열심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내 말을 들으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채 요행을 바라며 하는 기도라면 잘못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종교적인 기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내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해서 뭔가를 타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내 잘못된 생각과 욕심과 위험한 질주에 대해 우리를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우리가 설득당하잖아요?
한탄하며 시작했다 감사하며 일어나잖습니까?
염려하며 시작했다 하나님께 설득 당해 기쁨으로 일어나잖습니까?
타내기 위한 것이 기도의 목적이면, 세상 사람들 같은 노력으로도 왠만하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도는 우선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분명하고 거룩한 믿음위에 우리를 확고히 세우기 위한 것이고, 내 생각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점점 내 삶을 맞춰가는 신비하고 복된 신앙행위입니다.
이런 기도를 위해서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며 인격 대 인격으로 대화를 나눌 수 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유일하게 아시는 또 한분의 인격자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밖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 영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각과 확신을 넣어 주십니다.
대번에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라는 안전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저절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믿음을 주셔서 자꾸 우리가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한대로 이뤄 주실거라는 그 사실이 믿어져서 자꾸 기도하고 또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는 게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일까요?
그냥 기도하면 안되나요?
네, 그냥 내가 기도하면 안된다고 오늘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의적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목적을 한 개도 못 이룹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게 되고, 나를 위해 더 좋은 뜻도 모르고 내 생각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밤중에 찾아온 종교심이 깊은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그 말씀은 거듭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러면 주님, 거듭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났다는 확신이 없다면 매일 이 기도를 우선으로 하면서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일방통행으로 우리 요구를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어떤 기도를 시키시는지 의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우리의 생각이 조율되고 교정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자들이 억지로 감당해야 할 숙제가 아닙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아버지께, 예수님의 속죄를 받은 자격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되는 신비하고 분에 넘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기도할수록 내가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이 점점 확고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올바른 기도를 많이 하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좋은 것을 많이 주시기 위해서요.
우리 딸이 초코에게 간식을 주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초코 간식은 아무리 아무리 줘도 안 질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초코가 간식을 주면 그걸 물고 얼마나 좋아하는 지 그 모습을 볼 때 주인의 마음도 너무 좋은 것이죠.
개주인도 이런 마음인데,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실 수 있도록 성령으로 바르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더 좋은 뜻에 맞게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우선 사도적인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성경을 더 많이 배우고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방법은 당연히 성경을 펼치고 읽는 것입니다.
매주 설교를 통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어느새 많이들 배우셨습니다.
이제 성경을 펼쳐서 읽기만 하면 점점 더 많은 내용들이 깨달아지고 마침내 성경이 이렇게 재미있고 이렇게 믿음이 생기게 하는 구나 알게 되실겁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확신이 없다면 성령받기를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창조주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게 해주시고, 심판을 당할 불경건한 나의 모든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나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에 대해 분명하게 믿어질 수 있도록 성령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사실들은 성령 받지 않으면 절대 믿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기도를 싫어하는 몸을 길들여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기도해야 하는 데’라고 말합니다.
기도해야 좋다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 영에 자꾸 인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길들여서 기도의 훈련을 해야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유익한 것을 넉넉하게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삶을 누리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오래동안 기도하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안에 있는 풍성한 영적 생명이 고갈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영생을 아는 기쁨과 모든 지각을 평정시키는 그리스도의 평안과 담대함, 너그러움, 충성심, 자비함 이게 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선물이거든요.
가만히 있는데 이런 은사들이 내려온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런 은혜들이 점점 고갈되면 믿음이 있어도 불신자와 똑같이 심적, 육적으로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게 됩니다.
바쁜데 기도할 시간이 없다, 성경 읽을 시간이 없다, 피곤해서 예배도 못나온다. 이런 형편이라면 사는거나 마음의 상태가 불신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반드시 기도해야 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오늘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올해는 이 두 가지를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지키고 훈련함으로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굳게 건축함으로 영혼이 복되고 범사가 잘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2016년1월3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