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믿음을 자만하고 낙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긴장 속에 살아간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신자들의 믿음은 항상 시험을 받으며, 언제든 중도하차할 수도 있고,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 설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보내 늘 곁길로 빠지는 성도들을 다그치며 몰고 가시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겨우 걸음을 뗀 아기들을 돌볼 때가 부모에게 가장 힘이 들죠.
언제 넘어질지, 뭘 입에다 집어넣을지, 언제 위험한 물건에 손을 댈지 모르기에 부지런히 아기들의 동선을 따라 다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과 구원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 꼼꼼하고 성실하게 우리를 지도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지난 한 주도 주님께서 우리를 막아서지 않으셨다면 큰 실수와 위험을 당했을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오늘 하나님 앞에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로 축복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삶이 너무 지치고 힘겨울 때 하나님은 위로와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매일 바르게 사는 것이 더 많은 고통과 실패를 피하는 방법이기에 오늘도 미가선지자를 통해 우리를 다그치십니다.
이 말씀이 성령의 은혜로 우리 심령 깊은 곳에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더 견고한 믿음으로 채워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본문과 같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미래의 운명이 기록된 성경을 예언서라고 합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이 많은 분량을 기록한 경우가 있고 미가선지자처럼 짧은 기록을 남긴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언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예언서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그 예언의 내용은 대체로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많은 예언서는 매 맞을 짓을 끊임없이 하는 인간들과 계속 잘못하면 때리겠다고 경고하는 하나님의 메신저들의 외침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잘하고 있다면 이 성경들이 우리 손에 전해졌을 이유가 없겠죠.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죄악을 고치도록 경고하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죽여 아예 그 입을 막아버리는 악으로 응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집하며 가던 그 길 끝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는 1948년에 다시 세워진 나라입니다.
오늘 미가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남북왕조가 다 멸망한 때가 주전 586년이니까 그 이후 근 이천오백년 동안 완전한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떠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죠.
그런데 저는 2500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이들을 다시 데려다 놓으시는 하나님이 더 경이롭고 두렵습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결국 언약은 깨지고, 구원이 아닌 심판으로 종결되었을까요?
먼저 이들의 실패는 제사의 변질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이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문제를 중시했다는 것을 6,7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미가선지자는 사람들의 생각을 자신의 말처럼 대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문제를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일 년 된 송아지를 제물로 바칠까, 그 다음은 천천의 숫양, 그 다음은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라고 말합니다.
점점 제물이 거창해지고 있죠?
그 다음은 내 허물을 위해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라고 합니다.
이젠 동물제사를 넘어 자식을 바치려는 열심까지 나옵니다.
이런 과장 된 예물과 하나님이 금하시는 인신제물을 들먹이는 것은 벌써 예배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얼핏 보면 엄청나게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뒤이어 나오는 불법과 거짓이 판을 치던 그들의 삶과 격한 부조화를 이룹니다.
이런 제사행위에 대해 8절에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게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앞 부분을 원문대로 해석하면 ‘아, 이 사람아’라는 한탄조의 말투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과 네 아들을 내놓으라하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지 떠들썩한 예배나 예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예배와 제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만물과 천상의 존재들에게 질리도록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예배는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공경을 뭘로 표현하겠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겸손함과 신뢰의 표현이고 과거와 현재의 죄로부터 용서받은 것을 감사로 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를 소홀히 하는 참된 성도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예배의 변질과 삶이 따르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죠. 왜 이들의 예배와 삶에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의 차원에서 볼 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는 굳이 자신을 뜯어 고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섬기는 모든 종교들의 목적은 자기의 안녕과 부와 성공을 위해 어떤 힘이든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이미 보고 배웠던 애굽의 종교와 가나안의 종교와 똑같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 신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둘도 좋고 셋도 좋고, 그래서 힌두교엔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종류의 재앙들을 막아 줄 수억의 신이 존재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중에도 여전히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을 천막 안에서 끌어안고 있었다고 동시대 예언자인 아모스선지자가 고발하죠.
가나안땅에 와서는 거기다 플러스, 가나안부족들이 믿던 신상까지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상종교는 제물로 신의 환심을 사고 복을 빌면 그만이지 인격과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전에 미얀마에 갔을 때 나라 전체가 불교의 우상과 신전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 많은 영혼들이 그 불상에 미혹되어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던지요.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그 국민들이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신용카드만한 얇은 금박을 한 장씩 사서 집채만 한 불상에다 입히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평생 그 일을 합니다.
국민들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궁색한데 불상들은 다 호사스러운 황금을 비대해 보일만큼 둘러 입고 이들의 절을 받고 있었습니다.
양을 바치고, 기름을 바치고, 자신의 몸의 열매까지 바치며 복을 구하는 게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가장 큰 적은 이렇게 믿음이 종교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사귐입니다.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 하나님께 영향을 받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서로 사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고, 북이스라엘 역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자꾸 금송아지를 만듭니까?
신상은 우리에게 정직하라, 죄를 버려라, 이웃하고 화해해라 이런 말 안하거든요.
자기가 편할 때 가서, 자기 편한 대로 제사를 드리고 복을 빌면 끝입니다.
우리의 종교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귐이 아니라 치성을 드려서 복을 받는데 한정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까?
당연히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을 그렇게 빌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사귐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바른 법을 따라 살면 복은 저절로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단지 희생제물이 왜 필요한지 깨닫는 진심어린 회개와 그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가 짓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과 교통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배하는 우리에게서 세 가지가 있나를 보십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합당하고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먼저 정의입니다.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를 정의라고 합니다.
사회에는 정의란 말은 있어도 정작 정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의로 세워집니다.
시편 89장14절에 보면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미 영원까지 이어지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의 교회공동체가 장차 있을 영원한 영광의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땅에서의 멤버십이 그대로 천국까지 갑니다.
그렇기에 그 나라의 국민이라면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정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정의를 생각하면 투쟁이 생각나고 거대한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할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에게서 먼저 불의를 버리고 세상의 불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불의에 편승해서 이득을 취하거나 적어도 불의를 정의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서울대병원에서 고백남기씨의 사인을 병사로 기재한 사실에 대해 서울대의대 교수와 학생, 동문들 5백여명이 원칙에 어긋나다며 실명으로 성명서를 냈습니다.
모교의 병원에 대해 이런 의사를 밝히는 것은 정의이고 용기입니다.
역사 이래 불의에 대해 정의를 주장하는 데 앞장 선 것은 원래 교회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정의로움과 함께 합니다.
최근 정치권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한 장관의 경우를 보십시오.
이분이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공직자로서 도덕적으로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 하나가 농수산식품공사 사장으로 있을 때 회삿돈으로 교회에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회사이름의 정당한 기부라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숙합니까?
그렇다면 더 가난한 교회도 많은 데, 왜 본인이 다니는 대형교회에 기부하냐며 비아냥거리잖아요.
이 분이 신앙은 장로라지만 그것은 정의롭지 않은 처사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를 돕는 것도, 하나님을 돕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정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나라를 말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이런 나라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나라에서 정의를 완전히 실현할 수 없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완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가 성도들 가운데 먼저 실현될 때 세상나라도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교회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자, 인애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말합니다.
정의만 있고 인자가 없는 곳에 연약한 죄인들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정의로만 키우면 자식들 다 병납니다.
남의 불의를 보고 격분하며 정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정의를 부르짖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인자가 없으면 또 하나의 폭력이고 불의가 되기 쉽습니다.
대개 성향이 정의로운 사람들이 인자는 좀 부족하죠.
신자들은 이 땅에서 아직 온전치가 않기에, 하나님이 정의만 있고 인자가 없으셨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지난 한주간도 말씀대로 살지 못했지만 오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고 복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애와 한 짝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는 서로 다른 두 성품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지만 우리의 체질이 진토임을 아시기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주신 생활법을 하나 하나 읽어보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인자하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율법을 따라 이스라엘백성들은 서로를 인자하게 대하고 그 사회에서 잔인함과 억울함이 없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약자에 대해 사람들의 본심은‘ 너는 내 밥이다’입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면서도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 죄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우리 중 누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께 뽑혔겠습니까?
그렇기에 형제에 대한 인애가 없는 신자를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설교에서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에 대해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인애보다는 포악에 가깝고, 인자보다는 남을 가혹하게 대하기 쉽지만 오늘 말씀을 따라 힘써 주님의 인자하심을 닮아가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것입니다.
제사하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다 겸손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위기를 맞을 때는 일이 잘 풀리고 만사가 평탄하고 이젠 내 힘으로도 모든 것을 해 나 갈만 할 때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할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고김준0 목사님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일제시대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군이 되었는데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일년 반을 숨어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 때 정말 ‘숨을 쉬듯이’ 주님과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는 탈영병의 삶은 ‘숨 쉬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우리 삶에서 고통을 거두어 주셨을 때, 숨쉴만하게 되었을 때, 그 때도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반면에 일이 지체되고 점점 우리를 지치게 할 때도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합니다.
장기적인 시련에 지치고 실망감이 들 때 우리는 울컥하며 믿음이고 뭐고 다 둘러엎고 싶어집니다.
그런 마음은 여전히 신앙과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관해서 망쳐 놓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겠다는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화 된 형편이나 연약한 성품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잘될 환경에서만 우리를 잘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 먼저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고 우리의 기대를 능가하는 복된 환경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삶에서 하나님을 기대어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이런 정의와 인자와 겸손이 없는 이스라엘엔 온갖 불법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불법으로 재산을 모으려고 됫박을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는 땅콩 같은 것도 나무 됫박에 담아 놓고 팔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큼직한 됫박에 수북히 땅콩이 담겨있지만 막상 돈을 내고 받아 보면 땅콩은 종이봉지 바닥에 깔릴 만큼 적습니다.
됫박 밑바닥을 이중으로 만든 것이죠.
쌀 집에서도 말 통을 조작해서 이문을 남겨 먹고 그랬습니다.
신자들의 삶은 이런 면에서 흠이 없을까요?
직장에서 계약 된 시간을 업무에 사용하지 않는 것도 같은 것 아닙니까?
과도하게 이문을 남기는 것, 나쁜 재료를 사용하는 것, 불법적인 경로로 돈을 버는 것, 너희가 아직도 이런 일을 하고 있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합법적으로 제공되는 이득 외에 더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불의한 재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재물은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뇌물과 공짜 좋아하다 결국 덜미를 잡힌 김형준부장검사를 보십시오.
그 똑똑한 사람이 뭐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덫에 걸려 살게 되었는지, 정말 인간이 헛똑똑이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공짜 좋아하고, 별것 아닌 시시한 것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습관은 정직한 인격에서 점점 우리를 끌어내려 치사하고 비열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고 떳떳하게 경제활동을 하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탈이 없는 적당한 소득을 책임지십니다.
그렇게 불법을 사용해 가며 모아서 쌓아 둔 재물에 대해 14절에서 말씀하잖아요?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 된 것은 칼에 붙일 것이다.
불법으로 악착같이 모아 어디다 꿍쳐 놔도 하나님이 찾아내서 흩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는 합법적인 것만 들어갑니다.
또 이들의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했고, 그 주민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부자라면 횡포를 부릴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부자시라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얼마 전 광주의 고급아파트 주차장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큰 소리로 통화를 하던 입주민이 조용히 해달라고 하던 경비원의 얼굴을 담뱃불로 지지고 폭행했다는 뉴스가 나왔죠.
부자들은 구약성경시대에도 지금처럼 강포했다고 합니다.
아모스의 기록을 보면 부자들이 신발 한 켤레로 가난한 사람들을 종으로 샀다고 합니다.
거기에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것이 사회적 풍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힐러리후보와 공개토론을 벌였던 트럼프후보가 토론 중에 열여섯번의 거짓말을 했다는 통계가 나왔더군요.
한 정치매체는 선거 유세중 트럼프후보는 5분마다 한번씩 거짓말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데도 부동층의 표심은 흔들리지 않는다죠?
대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는 이 정도의 부패를 거론했지만 아모스서를 보면 더 실랄하게 비판되어 있습니다.
성적 타락이 어느 정도였냐면 한 여자한테 아버지와 아들이 드나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지간한 죄로 심판하신 게 아닙니다.
13절에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매서운지 두려울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으니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왜 스스로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각자가 제멋대로 살던 우리를 부르셔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본래 만물을 복되게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선하고 좋은 것을 주시려던 목적으로 돌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아버지와 다시 화목하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을 되찾고,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죄와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성도들은 불신자들과는 비할 수 없는 복을 누리며 삽니다.
그리고 이 삶이 천국에서 더 완전하고 영원하게 지속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 하나님을 성령의 은혜로 체험하며 사는 성도라면 천만금을 준다 해도 과거 믿지 않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죄성과 거슬려 정의롭고 인자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좀 힘들지 모르지만 이 놀라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불의하고 냉혹하고 교만하게 사는 것보다 정의롭고 인자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쉽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가 그런 사람들로 변했다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루하루 평안과 만족 속에서 감사하며 살아고 있는 것이죠.
오늘 그래도 여전히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대로 성령님을 의지해서 고치고 우리 자신을 매일 바르게 하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6년10월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