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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면

남수연 2017. 3. 9. 00:18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계단들과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살펴보자.

 

1.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적인 집중력

 

하나님께 가납되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복잡한 세상에서 은밀한 장소로 조용히 물러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곳이 당신의 침실이라도 좋다.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감싼다고 느낄 때까지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어라. 불쾌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것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말라. 하나님께 당신을 드려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당신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되지 말라. 순간순간 마음속으로 기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그러면 얼마 후 당신은 심지어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겸손하고, 진실하고, 어린애처럼 정직해지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마음이 산만한 상태 그대로 오래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라. 정처 없이 방황하는 수많은 생각을 집으로 불러들여라. 영혼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영적인 집중력을 기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성경을 혼자 묵상하는 기술을 연습하자. 성경을 펴서 책상 위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그러면 성경말씀이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가르치소서...”라고 믿음으로 고백하라.

 

영성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성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매우 소홀하다. 만일 영적이고 경건한 일에 착념하거나 실천하는 일에 게으른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처럼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는 어떤 전문 피아니스트가 있다면, 또 그처럼 나태한 야구 선수가 있다면, 그들은 음악계와 구단을 떠나야 할 것이다. 만일 거룩해지는 방법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평신도만큼 과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과학적인 난문제를 풀지 못할 것이다. 교회 신자들처럼 훈련이 안된 유약한 병사를 가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적국의 공격에 곧바로 무릎을 꿇을 것이다.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성공을 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홀로 있는 일...’‘침묵의 열매를 맺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야 한다. 시끄럽고 분주한 하루 중 어렵게 마련한 ‘묵상의 시간...’은 낭비되기 쉽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우리의 묵상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과 대화하면서 묵상의 시간을 전부 날려버릴 수도 있다. 자신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질지는 몰라도 영적인 성장을 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늘 묵상해야 한다. 순수한 영성에 이르는 데 있어서 이것 말고 다른 지름길은 없다. 순순한 영성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길을 가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금까지 소홀하게 취급된 진리를 다시 찾아서 그것들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기도와 깊은 묵상이다. 우리가 기도와 깊은 묵상에 잠길 때, 마치 안개처럼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진 세상적인 생각에서 그 진리를 분리해내어 지속적으로 굳게 붙들 수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눈길과 마주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이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신다고 증거 한다. 우리 영혼의 눈이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눈길이 우리의 눈길과 마주칠 때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교회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서 있든지 무릎을 꿇고 있든지 임종의 고통 가운데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꾸준히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무엇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일들에 관여해야 할 상황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 안에서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은밀한 교제가 진행된다. 그러다가 잠시라도 그들이 눈앞의 일에서 해방되면 그들은 곧바로 주의를 하나님께로 향한다.

 

성경말씀을 오래 묵상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이며, 교회 출석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해줄 것이다. 봉사, 일, 활동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습관이다. 이런 내적 관조의 훈련을 거듭하면, 우리 ‘육신의 눈...’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우리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결국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이라는 시각체계 외에 ‘영혼의 눈...’이라는 새로운 시각체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훈련하겠다는 의지의 헌신을 늘 견고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습관이 거듭하다 보면 얼마 후에는 더 이상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영적인 반사작용...’이 생겨나 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속에 들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현대의 종교는 시끄러운 소리, 지속적인 활동, 자기주장이 강한 목소리, 그리고 대형화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다는 해괴한 이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힘과 안전이 시끄러운 소리에 있지 않고, 고요함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하라

 

하나님의 임재의 중요성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면전에 있으면 우리는 그분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분에 대한 감탄이 점점 더 커지면 결국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거 영적 거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그 체험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갔다. 캄캄한 어둠의 공포가 아브라함에게 닥쳤을 때처럼, 혹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뵙기를 두려워하여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숨겼을 때처럼,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얼마 후 그 두려움은 즐거운 외경심으로 바뀌어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즐겁고 경건한 감정으로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근거는 없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들처럼 살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토록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일했고,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느낌이 너무나 황홀하다고 우리에게 증거 했고 우리도 이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체험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를 공격해도, 적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어대도 우리는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자기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반대에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그들의 체험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기에 다른 어떤 변호나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참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본질은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종교는 실재의 그림자이며, 다른 사람의 체험을 옮기는 싸구려 모방일 뿐이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교회 안에서 살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영혼이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신학과 논리가 합성해낸 신만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하다는 강력한 감정이 신자를 순식간에 사로잡을 수 있다. 이 감정은 그의 삶과 사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의 모든 판단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견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분의 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을 전부 그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분은 기다리신다. 그런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성삼위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있다.

 

성소 속의 진리 - 하나님의 면전으로

 

구약에 나오는 성소는, 죄악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잘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하나님께 돌아온 죄인은 성소의 바깥뜰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놋으로 된 번제 단에서 피의 제물을 드리고 가까이 있는 물두멍에서 자신을 씻는다. 그런 다음 그는 휘장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간다. 성소 안에는 자연광이 없으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정금등대가 부드러운 빛을 비추고 있다. 또한 성소 안에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진설병과 끊임없는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 단이 있다.

 

성소까지 들어간 예배 자는 이미 많은 것들을 누렸으나,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또 다른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을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가야만 속죄 소의 위에서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그 피를 드렸다.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진 휘장이 바로 이 두 번째 휘장이다. 성경기자에 따르면, 이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예배 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 열렸다고 한다. 우리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면전 앞에 나아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manifestation), 즉 그분의 임재의 ’나타남...’은 그분의 임재와는 다르다. 임재의 현시 없이 임재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기에 계실 수 있다. 한편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에만 그분은 현시하신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를 보여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과 순종 가운데 성령님에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의 얼굴빛으로 밝게 빛나는 삶을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현시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온 우주는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분은 이상하고 이질적인 신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죄악에 빠진 인류를 사랑으로 감싸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근한 아버지이시다. 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신다.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그분에게 반응하기만 하면 그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 믿음과 사랑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수용성이 더욱 온전해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지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

 

3.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탈 때까지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배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자들과 교제하시는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의 영혼은 안식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그분 앞에서 완전히 의롭게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우리의 노력을 그분은 즉시 알아주시며,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우리의 동기가 신실하다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우주의 근원이 되는 분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빛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이미 그에게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님께 직접 받은 확신으로 기쁨에 찬 삶을 살 것이다.

 

4.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교회라면 사교클럽, 뜨개질 모임, 골프나 조기 축구회 같은 것만 제공하는 교회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갈망했는지 알 것이다. 아브라함과 바울과 우리의 큰 차이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주님을 다시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우리는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항상 온전히 하나님께 머물고, 그리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내면이 꽉 찰 때까지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마음을 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쉬지 말고 읽고 명상하라. 그분의 능력이 그대를 가득 채울 때까지 그렇게 하라.

 

5.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감탄의 단계에 올라서지 못하는 예배는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배 자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평안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그는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우리의 예배가 감사에서 감탄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그분에게 가서 닿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있는 복된 사람들이 가지는 이타적인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될 것이다. 경외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잠깐이라도 본 사람들은 결코 불경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게 될 것이며, 자랑과 교만이 없어지고 경외심이 넘쳐 하나님을 숭모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무릎을 꿇을 때, 인간의 말이나 언어의 표현이 무색해짐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경외스러운 순간에 예배 자는 완전히 무력해져서 오로지 “오..!”라고 소리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오..!”라고 소리칠 수 있으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소위 ‘평안...’을 전한다는 선지자들과 ‘안전...’을 판매하는 세일즈맨들에게 빠지거나,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은 영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깊은 묵상이 주는 평안도 모른다.

 

진실성이 없는 듯한, 말로 유창하게 기도하는 습관에 빠지다보면 대개 우리의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흐르기 쉽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민에 찬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 대신, 기도제목이나 예의바른 감사의 말을 차분히 나열하는 식의 습관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그 다음 단계는 대개 영적 침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알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고, 그분의 성품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고, 그분의 위대하심 때문에 감탄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 우리는 저절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숭모하게 될 것이다.

 

 

AW 토저/예배인가! 쇼인가!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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