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빌레몬과 오네시모 (빌레몬서1장8절-20절)

남수연 2017. 9. 29. 17:27

남에게 뭘 부탁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남에게 신세지며 살고 싶지는 않죠.

하물며 내 문제도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취직이든 도움이든 남에게 대신 부탁해 주는 것은 정말 큰 희생이고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잔뜩 몸을 낮추고 애절한 어조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특수하고 개별적인 편지가 성경에 들어와 있는 게 좀 의외이죠.

성경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신하고 돈 떼먹고 도망가고 애증에 얽히고 그런게 인간사잖아요?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책이지만 한편 성경만큼 인간을 광범위하고 솔직히 다룬 책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지만 사람도 알게 합니다.

성경이 인간사의 모든 애환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의 모든 위기와 고통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스스로 죄에 팔려 자청한 불행이지만 하나님의 눈은 결코 사람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으십니다.

자식은 부모 일에 눈을 질끈 감을 수 있을지 몰라도 부모는 자식 일에 눈을 질끈 감지 못합니다.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종의 운명을 타고난 오네시모.

더 이상 고칠 수 없이 망가진 범죄자 오네시모를 성경에 끌어 들이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위해 마련 된 인생을 도둑질하고 사는 오네시모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도망친 노예의 기구한 운명, 배반당한 자의 분노, 이를 중재하려는 이의 지나치다싶은 애절함, 이런 내용이 결코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 한가지 입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 사람의 입장에서 복합적으로 살아갑니다.

배신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고, 상처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오늘 말씀이 여러 상황에 있는 우리 자신을 깊이 해석해 주실 것입니다.

한 장으로 되어 있는 가장 짧은 성경 빌레몬서에서 결코 짧지 않은 긴 여운과 은혜를 오늘 발견하게 해주시라 믿습니다.

 

1. 먼저 편지의 수신자인 빌레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빌레몬서는 교회에 보낸 공적 서신이 아니라 바울사도가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개인 편지입니다.

바울이 써내려간 인사말 속에서 빌레몬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로 믿음을 갖게 된 빌레몬은 바울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바울의 복음사역에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빌레몬의 집은 골로새지역에서 성도들이 모이는 가정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아니면 유일한 골로새의 교회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되고 성도들을 잘 섬기는 훌륭한 교회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어느 날 도망을 간 것입니다.

18절에 바울이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으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한 것을 보면 빈손으로 나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얼마간이라도 살아갈 돈을 좀 훔쳐가지고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고 아낌없이 헌신한 빌레몬에게 노예가 도망간 일은 여러모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밑에서 일하던 직원이 회사를 나가겠다고 할 때 기분 좋을 사업주는 없습니다.

뭔가 회사와 오너에게 만족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잖아요?

교회를 떠나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시대 교회성도 중 50%가 노예였다는 자료를 볼 때 오네시모도 주인집에서 드리는 예배에 자의반타의반 함께 했던 교인이었을 것입니다.

노예의 도주는 당시로 볼 때 재산상의 손해와 주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그런 세속적인 면보다 신앙적으로 집안사람을 잘 건사하지 못했다는 실패감과 배신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성도라고 해서 별 문제없는 좋은 날만 기대할 수는 없다는 걸 보게 됩니다.

오히려 오네시모를 너그럽게 대한 것이 도망갈 빌미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빌레몬 같은 주인이 자기를 지명수배 해 사형에 넘겨주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오네시모의 탈주계획을 실행에 옮기도록 부추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이기에 야박하게 못할 것을 알고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이용하려고 기가 막히게 남의 약점을 파악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은 사람 사이에서 고난을 더 자청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 결과가 영구하고 더 값지다는 것이죠.

그렇게 골로새교회를 큰 충격에 빠트리고 도망쳤던 오네시모가 어느 날 갑자기 빌레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고개를 떨군 오네시모의 손에 들려있던 한 장짜리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 본문인 빌레몬서였던 것이죠.

오네시모를 본 빌레몬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겨우 눌러놓았던 복잡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솟구쳤을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모든 사유는 감정에 항복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상한 감정은 모든 합리적 판단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다는 것이죠.

빌레몬의 상한 감정이 바울의 간청대로 과연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2. 빌레몬 앞에 다시 서게 된 오네시모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라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누구나 동경했던 최고의 도시 로마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자유롭고 행복한 새 삶을 살 수 있을거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바울이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체포되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로마에서 2년 정도 가택연금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돌아다니다 오네시모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고 오네시모가 감금 된 바울을 찾아가 만났다는 것이죠.

잘 살아보겠다고 선량한 주인의 돈까지 훔쳐 나온 오네시모가 어쩌다 바울을 찾아가게 되었을까요?

로마생활이 오네시모가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네시모가 성공했으면 뭐하러 바울을 찾아갔겠어요?

성공은커녕 돈을 다 까먹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오네시모가 훔쳤던 피해액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모든 것을 잃었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택하신 사람은 하나님을 등진 세상에서 절대로 잘 나갈 수 없다는 게 신앙의 불문율입니다.

하나님을 빼고도 세상에서 잘나가면 그게 더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면 모든 것이 다 털려 나갈 때까지 팔짱을 끼고 보십니다.

그럴 땐 아무리 기를 쓰고 이것저것 손 대 보았자 되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의 행복을 원하실텐데 왜 그런 곤궁에 빠지게 두십니까?

물론, 더 나은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되서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온 오네시모들이 교회마다 가득합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실패하고 병든 것이 은혜이고 축복이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걸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입니다.

의지할 친척하나 없고, 기댈 대도 없었던 처량한 오네시모는 로마에 갇혀 있는 바울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이미 빌레몬을 통해 바울을 알고 있었습니다.

편지에 나타난 빌레몬과 바울의 친밀함을 보면 바울이 빌레몬 집을 방문했을 수도 있고 적어도 바울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어왔을 것입니다.

비록 감옥에 갇힌 신세의 바울이긴 하지만 오네시모에게 생각난 유일한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생각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누가 생각나게 하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혼자라는 고독감이 밀려오고,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실패가 두려울 때, ‘내가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야겠구나이런 생각을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제 발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자기 힘이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성령께 이끌려 바울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바울을 통해 오네시모를 포근하게 품어 주셨습니다.

오네시모는 갇혀있는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와 성경을 배우고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되었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바울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들이 된 것입니다.

 

3. 바울은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중재하고 화해시켜야만 했습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의 심복, 심장이 될 만큼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여전히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였고 법적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네시모를 구제할 수 있는 열쇠는 빌레몬에게만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경솔히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의 지위로 보면 바울이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사도의 신분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일방적인 지시를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해결되는게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레몬의 마음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지가 편지에 다 드러나죠.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에 대해 민감한 지각을 갖게 해주시지만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느끼시는 연민과 동정이 성령충만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것이죠.

바울의 세심한 중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고 위로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마음의 상처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의 얘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더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인터넷 기사 뒤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얼마나 폭력적인지 당사자들이 그걸 보고 다 충격으로 넘어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알만한 정치인이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부부싸움하고 벌인 일로 비하하는 말을 쏟아 부었더군요.

죽은 분의 명예도 그렇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빌레몬에게 노예도 많은데 하나 도망친 거 좀 용서해라, 부자라서 그런 것이니 그것도 복이다 그렇게 말했다면 어땠겠습니까?

우리가 남을 위로한다고 속을 더 헤집어 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네시모가 나타남으로 다시 불거질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바울은 정말 사려 깊게 다가갑니다.

남을 위로 할 때 제일 효과 있는 게 무엇이죠?

내가 당신처지 보다 더 혹독한 일을 당했다는 경험담입니다.

바울은 자기 처지를 먼저 언급합니다.

1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이런 말은 바울이 쓴 다른 옥중서신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9절에도 갇혀있다’, 10절에도 갇힌 중에라고 거듭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빌레몬의 충격을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고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함으로 좀 완화시켜보자는 것입니다.

더 큰 고난 앞에서 종종 우리의 작은 시험거리가 묻히는 걸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시험과 고난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나와의 관계를 직관한 사람에게는 대면하는 고통의 강도가 다르게 느껴질 뿐 아니라 그 의미도 다르게 받아 들여 집니다.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아픔이 있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떠올리면 오히려 그 상황조차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내 죄를 속죄해 주시고 완전한 행복과 영화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못 견딜 고통은 없습니다.

슬프고 아픈 것이야 부정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마치 그 아픔을 만지고 덮으시는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 같은 고난인생도 예수님의 고난이 덮으시기에 그것을 감당하고 견딘 것입니다.

자기가 생으로 감당해 낸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는 십자가로 승리한다는 말이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면 세상에 대해 강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 속에는 인생고 중 단 하나도 빠진 것이 없잖아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가슴이 베인 것 같죠.

주님을 떠올리면 제자들에게 배신당했던 주님의 아픔이 거기 있습니다.

가난이 두려워질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던 주님에 비해 내게는 가진 것이 아직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소망이 생깁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스런 치료를 받을 때,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린 주님은 낫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라는 게 생각나 고통이 은혜가 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아는 한 어떤 일에든 승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자신의 고난으로 빌레몬의 상처가 위로 받길 바랬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냅니다.

그런데 부탁도 아니고 간구한다고 말하죠.

9절에 보면 간구하노라, 10절에도 간구하노라

이런 바울의 자상함과 조심스러움에 빌레몬의 마음이 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무시하고 믿음제일주의로 살 것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에 굳게 서서 그런 것 쯤 넉넉히 무시하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잖아요?

식구라고 해도 한마디 말에 상처를 받고 그 기분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게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우격다짐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세상의 애착과 탐욕과 죄에 대한 결과를 간곡하고 엄중히 경고하셨지만 결단은 각자에게 맡기십니다.

그렇게 억지로 끌고 간다고 사람이 내 사람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커 갈수록 그 마음을 잘 헤아려 줘야지 우리 생각에 옳다고 강요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행동도 어긋나고 서로의 마음도 점점 어긋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인간적 측면에서만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쳐서 바울을 찾아오고 그러다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중재의 핵심입니다.

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어 갇힌 중에서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합니다.

갇히지 않았다면 오네시모를 낳지 못했을 거라는 뜻입니다.

갇힌 것도,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쳐 바울을 찾아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난 게 결과적으로 구원받은 계기가 되었고 영원히 함께 할 형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잠시 떠나게 되었다는 원어상의 표현은 신적수동태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의 히브리적 표현법입니다.

결국 이 일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일을 위해 그 일을 허용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책망하지 마라.

또 과거의 상처를 너무 애달파 하지 마라.

우리 삶에서 떨어져 나간 그 무엇으로 인해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과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일어나고 이뤄진 것일까요?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바울의 편지만을 전하지만 교회사는 그 이후의 일을 전해줍니다.

빌레몬은 결국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 저 사람하곤 다시 상종도 안 할거야라고 하는 사람의 내막을 들어보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용서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은 지각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배신에는 상처가 남습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받은 상처가 싸울 때 보면 다 다시 재생되잖아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용서한 것은 자신이야말로 더 많은 죄악 중에서 용서받은 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것을 언급하잖아요?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이 바울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 복음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중재와 하나님의 용서를 알기에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은 후일에 골로새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오네시모는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갇힌 중에서도 예수님을 전해주고 눈물어린 중재로 새 인생을 살게 한 바울에 대한 오네시모의 고마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전승에 의하면 바울서신의 대부분을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오네시모가 수집해서 보존했다고 합니다.

그게 성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이뤄지는지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세 사람의 개인사가 성경으로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네시모를 중재하는 바울의 진실한 사랑에서 하나님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던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중재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차원이 다른 데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세상 속의 일들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빌레몬서 같은 개인편지가 성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신비로운 것은 성령께서 사람들의 이런 사랑을 읽을 때 영적 작용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빌레몬서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눈앞에 그려주는 성경입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깊은 애정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보셨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모든 죄와 악함을 용서받은 우리는 빌레몬으로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우리는 돌아온 오네시모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도망자요 주인의 것을 훔쳐서 살아가고 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을 위해 바울처럼 간절히 중재하며 살길 원합니다.

또 오네시모와 같이 절망적인 조건으로 태어났고, 제기불능으로 실패했던 사람도 예수님을 깊이 만나니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와 가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예수님을 깊이 인격자로 깨닫고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네시모에게 그랬듯이 복음과 성경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바라기는 이 아름다운 가을에 성경을 펴고,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모두가 깊이 만나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빕니다.

2017년9월24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