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초대를 받고 시간을 내서 교회에 오신 분들게 감사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함께 하지 못한 분들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꼭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를 즐겨 봅니다.
지난 주 목화솜을 트는 달인이 소개되었습니다.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어릴 때엔 겨울이 오기 전 이불솜을 다시 틀었습니다.
탈탈탈 소리 나는 솜틀기계로 틀면 이불솜이 다시 새것처럼 폭신해 졌죠.
지난주 소개된 달인은 48년간 솜 트는 일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솜에 대해서는 달인이 될 수밖에요.
한 줌 솜을 잡으면 그게 80그램인지 8그램인지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맞추더군요.
이 분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했는지 10년만에 솜틀가게가 있는 2층건물을 장만했다고 합니다.
요즘 모든 사람의 로망인 건물주가 된 것이죠.
그런데 아직도 낡아 빠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신고 있는 양말에도 구멍 투성이었습니다.
요즘 그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PD도 답답해서 ‘이젠 돈 좀 쓰며 사셔도 되지 않으신가요’ 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달인의 두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속엣말을 꺼내는 겁니다.과거 힘들 때는 정말 가난해서 경우도 못 지키고 살았다는 것예요.
경우도 돈 있는 사람이나 지키지 없는 사람은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킨다는 것이죠.
그래서 죽어라고 돈을 모아 이만큼 살게 되었지만 지금도 가난하던 때가 자꾸 생각나고 그런 때가 다시 올까봐 두려워 돈을 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이 일 년에 십 만원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지난 주 기사에 보니 8100억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주윤발씨가 한 달에 십사만원으로 산다죠.
정말 충격적입니다.
저도 자극을 받고 돈을 좀 안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그런데 달인은 한 달에 십 만원도 아닌 일 년에 십 만원을 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자린고비 같이 인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온 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지금도 과거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측은했습니다.
저는 솜틀집 사장에게서 결정적인 두 가지 결핍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른다는 것과 또 하나는 도움이 될 든든한 누군가가 곁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현재와 미래를 다 알고 진심으로 나를 도와줄 힘 있는 인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기꺼이 그런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나눌 때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고 이해가 잘 돼서 선한 목자를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먼저 예수님은 과연 선한 목자인지를 확인해 보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좀 안다는 사람도 이스라엘사람, 역사 속의 존경받을 성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자칭하셨습니다.
만일 어떤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가 나서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을 정말 선한 사람, 진실한 사람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자신을 선하다고 할 만한 인간은 없습니다.
또 누가 바른 길을 알아서 타인을 인도하겠습니까?
자신이 그렇다는 사람은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어리석은 망상가이거나 의도적인 사기꾼이거나 자기에게 기만당한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단 은혜로교회 처럼 사람을 남태평양 피지섬으로 끌고 가 집단생활을 시키며 착취하는 거짓 목자들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질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부모라 해도 자기가 죽겠으면 자식이란 짐을 내려놓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많은 지지자들과 또 반대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반대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 미쳤다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한 인간이라면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예수님이 진실하신 분이라고 평가합니다.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는 사람이 진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성립되려면 예수님은 단순히 한 인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스승인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선한 목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누군가의 선한목자가 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선한 목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라고 하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가 양과 목자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고,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는 솜틀집 사장님도 자기 힘만으로 죽자살자 살았습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워싱톤포스트지에 터키에서 양4백마리가 절벽 밑으로 떨어져서 죽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앞서 가던 양이 절벽인 줄 모르고 떨어졌는데 뒤따르던 양들이 다 앞으로 직진해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목자가 앞에서 인도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참극입니다.
양들에게 목자는 생존을 위한 인도자입니다.
중동지역에서 양을 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드넓은 초원에서 양들이 마음껏 풀을 뜯는 그런 목축이 아닙니다.
뉴질랜드 같은 경우야 목초지가 워낙 좋죠.
목축업자들은 넓게 울타리를 친 방목장을 몇 개 만들어 놓고 양들이 며칠이고 풀을 다 뜯어먹으면 다른 방목장으로 옮겨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풀이 우거진 곳이 많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삭막한 광야를 다니며 양이 먹을 풀을 찾아야만 합니다.
물론 사막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뉴질랜드 목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뉴질랜드 초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광야 같다는 뜻이죠.
사람들의 삶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한숨과 애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평생 초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 그런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교독문에서 읽은 시편23편은 마음을 평온케 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얼마나 평화롭고 마음이 풍요로운 광경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뒤 이어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남을 고백합니다.
이게 이스라엘광야 같은 이 땅의 삶입니다.
모두가 내 곁에 있고, 먹고 사는 게 풍족하고, 가정에 웃음이 있는 때가 있는가하면 때로 모든 게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대신 눈물이 베개를 적시고, 번민으로 밤을 지새고 근심의 나날을 보냅니다.
이런 캄캄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보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길에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유대광야를 지나보았는데 정말 풀 한포기 없는 메마른 땅, 돌산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목자들이 한 무리 양떼를 몰고 걸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나중에 경관을 보려고 차에서 내렸는데 돌맹이 틈 사이에 신기하게도 물기를 머금은 아주 작은 풀들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더군요.
목자들은 그런 식물들이 있는 곳을 알고 양들을 데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들에서도 목자는 반드시 먹을 것을 찾아 양들을 먹입니다.
목자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길을 찾아 주시고 먹을 것을 찾아 우리를 먹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을 따랐더니 이 말씀이 매일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주님을 따른 우리는 다 증언할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3. 그렇다면 그 목자는 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신 것은 양들을 온전히 이끌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일까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생의 잔혹한 얼굴을 마주치며 삽니다.
본문에서 이리가 와서 양들을 습격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제 친구 권사 한 사람은 몇 주 전 아침에 빵을 사들고 출근하다 교통사고로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만큼 처절한 재난의 습격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가난과 절망과 질병의 습격에 시달립니다.
많은 재산가나 권력자들도 이 습격을 다 피할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은 재난과 고통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요?
늘 들려오는 무서운 재앙과 인간의 악행이 세상을 점점 채워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나라들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져 그렇게 자꾸 국경을 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팀켈러라는 목사가 뉴욕의 젊은이들을 만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유가 뭔지를 묻고 그것을 분석하고 변증하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땅에 이런 고통과 악이 존재하냐는 것입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이미 인생의 생로병사와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죄악이라고 봅니다.
지금 불행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내 죄의 결과이거나, 상대방의 죄, 혹은 사회구성원의 죄악 때문이 아닙니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죄라는 것에 동의를 합니다.
다만 그 죄와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가 다릅니다.
불교의 경우 수양을 통해 죄와 번뇌를 해결해 보자는 관점이죠.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 참 지혜롭고 실리적인 답변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 네 마음을 바꿔먹으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위해 마음을 바꿔 먹으라는 것이죠.
그러나 수행하는 승려들도 안되는 데 어떻게 마음을 내 뜻대로 바꿉니까?
나쁜 마음 하나를 다스리면 열가지 다른 번뇌가 살아나잖아요?
불교는 죄로 인한 고통과 번뇌에 수행이라는 답을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스티븐 호킹 박사의 유작이 발표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 책에서 호킹박사는 ‘신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한 개인이 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고 인류역사 이래 가장 큰 난제인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이 세상에 많을 것 같지만 통계를 보면 10%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신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이들은 굳이 신이 없다고 주장합니까?
무신론자들이 그렇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것도 알고 보면 다 근원적인 뇌의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의 경우죠.
그런데 이 죄책감이 묘하게도 한번 본적도 없는 ‘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합니다.
죄를 저지르면 하늘이 무섭지 않냐고 하잖아요?
사람들끼리야 서로 죄를 떠넘기고 남 탓을 하고 남과 비교하며 나는 더 낫다고 합리화 할 수 있지만 신에 대해서는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야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불편함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심리가 무신론의 본심인 것입니다.
본래 불교의 입장도 엄밀하게 보면 무신론이고 내세가 아닌 현세종교입니다.
모두가 다 수행해서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절대자 신은 없다는 무신론인 것이죠.
어쨌든 사람이라면 어떤 방식이든 죄와 고통의 문제를 생각하고 해답을 찾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문제가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해결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죄가 인생의 고통과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지만 스스로는 죄짓는 본성을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의 대한 자비하신 하나님의 해결책은 속죄입니다.
죄가 가져온 모든 불행과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피하도록 속죄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구도자가 되어 더듬더듬 찾아낸 여러 종교의 결론과는 시작부터 다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서 가르쳐주신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선 속죄자를 찾을 수 없기에 그 아들을 사람의 형상으로 보내셔서 온 인류의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죠.
예수님이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천오백여년 간 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 메시지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목자, 구원자, 속죄자를 보내실 것에 대한 예언과 그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고 축적해 놓으신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사야선지자는 이사야서53장에서 구원자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한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 된 대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성경을 잘 배우면 그 내용이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이고 진실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혹자는 성경의 기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제자들이 얼마든지 각색하고 조작할 수 있지 않냐는 의문을 가집니다.
사람이 조작을 하는 것은 뭔가 이익을 노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현재 전해 준 성경을 만일 조작했다면 그 댓가로 무슨 이익을 얻었겠습니까?
이들이 지금의 성경대로 당대에 전파하고, 글로 기록해서 남긴 댓가로 얻은 것은 박해와 죽음뿐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기록해 전해 준 성경의 말씀은 가짜 뉴스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심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삶이 힘들고 지치는 게 단지 광야같이 결핍되고 험악하기만 해서일까요?
모든 게 다 갖춰져도 권태롭고 외로운 것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단 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씀은 바로 너를 사랑해서 내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은 영화 속 이야기입니다.
만일 그들도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면 그냥 우리처럼 살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결국 이기적이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은 진실이고 또 불변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은 변화가 없으시다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목자가 필요하지만 사랑도 변하고 흔들리는 울타리처럼 나약한 사람을 의지하는 것만큼 불안하고 허망한 게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장래를 다 아시고 가장 진실한 사랑과 완전한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를 의지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가 나눈 말씀들은 집에 가면 잊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고 믿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한번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고 성급한 결론을 내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아 가시길 권고드립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길 결심한다면 주님은 정말 기쁘게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있지만 지금은 거친 광야에서 작은 식물로 만족해야 한다면 그것도 감사하며 누리시길 바랍니다.
작은 것을 누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진 적은 돈, 늘 아쉬운 건강, 항상 미흡함을 느끼는 곁에 있는 사람들, 이것을 행복하게 누리지 못하고 조금 더 나아진 뒤에 행복하리라 생각하면 행복은 늘 멀어질 것입니다.
오늘 누릴 작은 행복을 미루면 건물주가 되었지만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솜틀집 사장처럼 평생을 행복하지 않게 살지 모릅니다.
매일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살다보면 메마른 광야는 반드시 끝이 나고 드넓은 푸른 초장에 우리를 풀어 놓으실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혼의 목자로 정하시고 그 분의 말씀과 인도를 따라 이 땅의 삶을 안전히 인도받고 영원한 천국을 향해 함께 가시길 축원드립니다.
2018년10월21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