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3편은 아마도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편일 것입니다.
다윗이 인생 말년에 자기 생애를 돌아보며 지은 시라는 느낌이 들죠.
한 성도 다윗이 계획에도 없던 하나님을 만나서 평생을 동행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계획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을 뿐이죠.
그렇게 주님이 목자가 되셨더니 부족함이 없었노라 다윗은 회상하며 하나님께 이 시편을 봉헌한 것입니다.
오늘 시편이 예수님의 양이 된 성도들에겐 다윗과 똑같은 감사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또 아직 목자를 정하지 않은 분들께는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따르는 성도들에게 부족함이 없이 인도해 주십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십니까?
정말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이걸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을 양과 목자로 노래한 것은 그런 목가적인 아름다운 시상이 떠올라서가 아닙니다.
오늘 시편의 그림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넓은 초원에서 유유자적함을 누리는 양떼들의 광경이 아닙니다.
이 시편은 중동지역의 양치기가 배경입니다.
목자가 없다면 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멸종했을 동물입니다.
생존을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먹이활동이잖아요?
양은 스스로 먹이활동을 못하는 동물입니다.
양은 자기 주변에 있는 풀을 다 뜯어 먹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데도 다른 곳으로 멀리 이동할 생각을 안 한다고 합니다.
더더구나 삭막한 땅 이스라엘에서 양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토양이 척박한 중동에서 식물이 자랄만한 땅엔 사람 먹을 걸 심지, 양 먹일 풀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들이 돌산이나 광야지대로 데려 다니며 먹입니다.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떼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이죠.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양들은 돌산을 배경으로 자갈밭에 얼굴을 처박고 있습니다.
대체 뭘 먹고 있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돌 틈에 아주 작은 풀들이 돋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자는 이렇게 먹을만한 풀이 난 곳으로 양떼를 이끌고 다녀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2절이 다윗에게는 그런 절박한 생존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쫒기던 십여년 세월을 광야에서 먹여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잖아요?
그것도 육백명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잖아요?
자기의 인생을 떠올려보니 그때 도대체 무얼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먹이고 기르셨다고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그런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먹이고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어떻게 살아나왔을지 다른 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처럼 믿고 따랐을 뿐인데, 살아남는데 부족함이 없었구나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을 목자로 만나지 않은 인생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가졌어도 하나님을 모르면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 그 이상이 아닙니다.
목자 없는 양의 운명은 뻔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병들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행복을 잃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며 목자 없는 양 같다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그래도 좋은 한평생이 되지 않겠냐는 막연한 확신을 가집니다.
성도들 조차도 때로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그 상상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본성적인 악함 때문입니다.
창세기6장5절에서 타락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하나님이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8절에서 다시 말씀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하나님 이상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통찰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리 인간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 한다 해도, 안타깝게도 이 말씀이 인간에 대한 진실입니다.
세상엔 죄악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과 계획은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인생을 기대해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양의 길에 이리와 늑대가 있듯이 사람의 원수인 악의 세력들이 주변에서 항상 엿보고 있습니다.
삶이 평탄할 때는 세상이 행복하고 쉬워 보이죠.
좋아만 보이던 세상에 걷어차이고 눈물 콧물을 빼보면 그게 아님을 절감합니다.
하루 저녁 뉴스만 봐도 저 사람은 어쩌다 저런 봉변을 당하게 되었나, 어쩌다 저런 덫에 빠졌나 두려운 생각이 들잖아요?
누가 저 사람들을 구해주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그런 재앙을 만나도록 방임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목자같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만 목자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시는 목자이십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먼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소생시킨다는 것은 완전한 회복, 되돌림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죄로만 살아오던 영혼이 완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알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신비하고 위대한 귀환인지 그 사실이 나날이 새롭고 감사가 깊어집니다.
또 하나님만이 우리를 복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죄로 얼룩진 길만 알던 우리에게 의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죠.
불의와 죄악의 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얻은 것들이 바람에 불면 날라가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스스로 의로운 길을 가고, 누가 사람을 가리켜 의의 길로 가도록 지도하겠습니까?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이 걷는 길이 나쁜 길인지 알면서도 갈등이 괴로워 의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길’은 원어로 선을 그어서 구분한 길, 트랙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견책하며 의의 트랙을 따라 갈 수 있도록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그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은 말씀의 트랙을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행동 반경은 그래서 좁고 명확합니다.
그 좁은 길 안에서 세상사람보다 더 넓은 세상을 더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주님은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주님을 따라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어려움도 만납니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가 목자를 따라 가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만날 때 당황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길로 데려 가시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닌가?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쫒겨 다니는 처지가 되었을 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왕의 군사 삼천명에게 쫒기던 그런 절박한 시간들이 있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사울왕에게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23장14절,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왕이 십년동안 다윗 하나를 죽이지 못했다는 게 정상이 아니잖아요?
다윗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하시는 목자라는 사실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이후로도 그 숱한 전쟁을 두려움 없이 해 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인생의 시련을 만납니다.
조금만 도와주시면 될텐데 왜 우리를 이런 터널에 두시는지 하나님이 야속하고 나 혼자 믿는 것은 아닌가 의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길을 이 시편처럼 길게 보아야 합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목자가 자꾸 양떼를 데리고 어디론가 갑니다.
목적지는 아버지의 집이죠.
우리의 인생여정은 시간을 따라 계속 영원한 집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한 시간도 머물지 못하고 행복한 시절을 붙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마주오는 시간 안에 무엇이 실려있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좋은 환경만을 고를 수도 없고, 앞에 있는 시간을 내가 미리 계획한다고 그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습니다.
지나온 삶을 보면 알잖아요?
계획해서 된 부분이 얼마나 됩니까?
사람이 예측하고 계획한 대로 된다면 부자가 안 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요즘 주식시장이 충격적이죠.
워렌 버핏 같은 투자의 귀재도 항공주에 투자했다 큰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아이작 뉴턴도 그 옛날 주식으로 전재산을 날린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의 광기는 측정할 수 없다’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푸틴이 무모한 결정을 해서 온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은 그냥 내게 다가온 삶을 받는 것입니다.
다만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된 환경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룩에게 말씀하셨잖아요?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가장 알맞게 디자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상의 목적으로 인도하실 여러 가지 안을 갖고 일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따랐는데 이런 결과가 되었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길이 완전히 막히면 하나님이 2안을 준비하셨나보다 생각하면 됩니다.
안되면 3안도 있고 4안도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마귀도 어떻게 못합니다.
뜻대로 안된다는 원망과 한탄과 낙담이 나를 무너뜨리는 마귀를 돕는 내부의 적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 우리를 위한 다음 계획을 갖고 안전히 인도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젊을 때는 하나님의 시선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도 때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이 쌓여가며 점점 군말 없이 목자 예수님을 따라갈 수 밖에 없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목자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에서 높여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먼저 이 말씀은 여지없이 우리 일생에 대적하는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때로 내 주변의 사람들로 위장하고, 실직으로, 질병으로, 관계의 괴로움으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에게 상을 차려 주십니다.
여기서 상은 공식적인 만찬에서 사용하는 큰 식탁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마친 뒤에 종말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상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 땅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은 원수의 코를 납작하게 할만큼 우리의 잔을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보기 좋게 어려움을 이기고 우리를 구경거리로 삼았던 원수들 앞에서 넘치는 축복을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그런 아름다운 종말을 맞을 때까지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오실 것입니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나를 ‘따른다’는 말은 군사용어로 추격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바짝 추격하신다는 것이죠.
이것은 주님의 성실하신 인도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런 하나님을 벗어나 각기 제 길로 가려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선교사로 가서 목자생활을 체험했던 선교사가 이런 경험을 얘기하더군요.
자기가 일하던 목장에 깻묵 창고가 있는데 어느날 밤 거기서 불이 났습니다.
깻묵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그 고소한 냄새에 양들이 탈출해서 불타는 깻묵 창고로 돌진해 오더라는 것입니다.
양털에 불이 붙으면 큰 일인 것이죠.
그래서 양들이 못 오게 막으려고 난리가 났는데, 여기 막으면 저기서 몰려오고 저기 막으면 다른 쪽으로 몰려오고.
그날 밤 얼마나 양을 지키려 사투를 벌였는지 며칠을 앓아 누웠다고 합니다.
자기가 죽을 곳인지도 모르고 어리석게 몰려가는 것이 양 뿐이겠습니까?
우리도 저쪽이 망할 자리인지 모르고 자꾸 그리로 가려고 발버둥을 치잖아요.
그렇기에 목자가 그 위험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우리를 바짝 추격하는 것입니다.
누가 추격해 오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매일 원수가 우리를 추격해 온다면 매일이 숨가쁘고 두려운 마음에 쫒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추격해 오고 계시기에 악한 원수는 우리를 뒤쫒아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의 목자 유일한 목자이십니까?
정말 예수님은 믿을만한 목자십니까?
정말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확신하는 것은 세월을 되돌아보며 막연한 감상에 빠져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의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목자의 입장은 잘 고려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양을 위한 목자의 애정과 헌신을 남다르게 기술합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는 양떼를 먹이기 위해 안락한 집을 떠나야 합니다.
몇 일에서 몇 달에 이르기 까지 양들과 함께 노숙을 하며 오직 양을 돌보는데만 매달려야 하는 것이죠.
다윗은 양을 돌보는 목자의 수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한 데는 당연히 하나님의 헌신과 희생을 다윗이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 이런 믿음은 근거 없는 감상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람은 모두 죄를 갖고 태어나는 인생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성령님의 감화로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깨달았고 그의 시편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이하리만큼 자세히 전합니다.
본문 앞에 있는 22편을 보면 메시야의 고난을 그린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난 중에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시를 자세히 보면 그 고난이 다윗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느새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다윗은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17절,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가 어떤 고난을 당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실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대속의 사랑을 이해하며 다윗은 아, 하나님은 내 목자가 되시는구나.
나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겠구나 믿게 되는 것이죠.
다윗이 죽은 뒤 삼백여년이 지나 이사야선지자는 비밀을 한겹 더 벗기는 말을 기록합니다.
이사야 53장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 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예언을 완성하십니다.
요한복음10장14절, 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는 그냥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돌봐주시는 목자가 아니라 목숨을 버릴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번에 임윤0 이라는 열여덟살 학생이 미국 최대 명성의 음악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습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탄생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궁금해서 공연실황 영상을 잠깐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여분을 끝까지 다 보고 말았습니다.
임군이 혼신의 힘을 다해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온몸과 피아노로 연주하는 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과 사랑에 빠지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해 목숨을 주시고 평생 돌보시는 주님과 우리 모두가 사랑에 빠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의무이고 따분하다는 것은 목숨을 주실 만큼 우리와 사랑에 빠지신 하나님께 잔인한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처량하고 슬프다고 구약의 이스라엘은 푸념을 했습니다.
말라기 3장 14절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 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아노를 사랑해서 그 손가락으로 건반을 쓰다듬고 만지며 행복해하는 임윤0 군을 보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의 음악과 악기를 사랑해서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연주하잖아요?
왜 나는 크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 온 몸으로 하나님을 연주하시 못하는 것일까?
윤찬군이 그렇게 연주자로서 진심을 다할 때 영광을 얻었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연주하는 인생일 때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될지 성경에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장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10장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6장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목자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고 돌봄을 받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됩니다.
안전하게 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양무리 떼와 함께 광야와 같은 세상을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무리를 벗어나 혼자가 된 양의 운명은 뻔한 것이죠.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안전지대로 곧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우리의 몸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아름답게 연주하며 살 때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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