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

남수연 2022. 6. 14. 16:16

https://www.youtube.com/watch?v=5SwotUFXtKc 

 

오늘부터 몇주간 시편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시는 어떤 사실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생각이 응집 된 상징적인 언어로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시를 읽는 사람들도 설명이 아닌 직관으로 이해하죠.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설명이 필요 없이 마음에 훅 들어오죠,

풀꽃3이란 시도 있습니다.

‘기 죽지 말고 살아 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1993년 국민일보 문학상에서 당선작에 1억원이라는 획기적인 고료를 내걸었습니다.

그때 김형경씨의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제목이 아주 시적이라 사람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던 것 같습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잖아요?

뻐꾸기는 뻐꾹 뻐꾹, 뜸북새는 뜸북 뜸북, 꾀꼬리는 꾀꼴 꾀꼴, 부엉이는 부엉 부엉.

물론 울음소리를 듣고 사람이 새 이름을 붙인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죠.

그런데 책 제목을 보면 마치 타고난 저마다의 운명 때문에 피를 토하듯 슬피 울고 다니는 새가 연상됩니다.

나도 저렇게 울며 살아가는구나 싶은 울컥하는 마음에 소설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는 것이죠.

그래서 그 책이 300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시편을 사랑합니다.

시인이 내 대신 토해내는 탄식과 기도를 읽으며 ‘이 사람도 이랬구나’ 거기서 나의 처지를 위로 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찬양과 감사로 끝을 맺는 시편을 읽으며 나도 그렇게 되리라는 소망을 갖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죠.

율법책과 역사서만이 아니라 이런 시편을 성경으로 주신 것은 그만큼 섬세하게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달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1. 시편1편을 나누기 앞서 먼저 시편에 대해 좀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만 알면 안되고 성경도 알아야 합니다.

시편은 총 150편입니다.

그 중에 75편 정도를 다윗이 지었고, 나머지는 성전에서 찬양을 맡았던 고라자손, 아삽, 솔로몬, 모세 등등이 지었습니다.

작자 미상의 시편도 몇 개 있습니다.

시편이 기록된 총 시대로 보면 약 천년에 걸친 작품들인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의 심정이 마음에 와 닿고 공감이 됩니다.

시대는 달라도 신앙은 같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똑같기 때문이죠.

오늘 시편이 삼천년 전 사람이 지은 거라는 생각이 안 들잖아요?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시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성령에 감화되어 지은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일권부터 오권까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중 오늘 1편부터 41편까지가 일권에 해당됩니다.

일권을 보시면 시 앞에 모두 ‘다윗의 시’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만으로 묶여진 1권에서 유독 제목이 없는 오늘 1편과 2편도 당연히 다윗의 시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4장 베드로의 설교도 보면 2편을 인용할 때 다윗의 시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시편을 잘 이해하려면 다윗의 인생 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시란 자기 인생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다윗의 생애는 우리가 알다시피 대하드라마와 같습니다.

사울왕조에서 다윗왕조로 바뀌는 과정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요.

마치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뒤, 왕권을 다지기 위해 피를 부르는 조선 초기 사극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다윗은 8형제 중에 막내로 어릴 때부터 부친의 양떼를 데리고 광야로 내몰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대 왕으로 은밀히 내정되고, 왕이 되기까지 매일이 숨가쁘게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왕이 되고도 나라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 수많은 전쟁에서 싸웠습니다.

왕위 승계를 두고 벌어지는 자식들끼리의 암투가 있었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까지도 이르죠.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도 당합니다.

이 대하소설 같은 인생을 보내며 다윗은 위기마다 시편을 썼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사람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다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어느 상황에서 썼는지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시편1편은 다윗의 신앙을 바탕으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라는 주제로 관통한 시편을 대표하는 다윗의 인생작입니다.

 

2.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세상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결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복 있는 사람과 세상을 따르는 악인들입니다.

그 대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중에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복 있는 사람을 선택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냐는 것은 우리가 고려할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나의 선택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1) 복있는 사람들은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은 한 명으로 되어 있고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라고 여러 명으로 표현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열 명에 하나, 스무 명에 하나, 희소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거의 안 믿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잖아요?

그 사람들 중에도 점잖고 도덕적으로 괜찮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죠.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사람들의 내면을 간파해 악인, 죄인, 오만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복있는 사람들은 세상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꾀로 살아갑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꾀’라는 단어 안에는 유혹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악한 행위로 사람들을 끌어 들인다는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또 복있는 사람들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 있다’는 것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선 것이 아니라 길이 날 정도로 습관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정치인들 중에 성범죄 한번으로 정치 인생이 끝난 사람들이 좀 있죠.

그것이 대개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수히 지은 죄의 길에서 어느 순간 덜미가 잡힌 것이죠.

사람들이 죄에서 돌아서는 게 힘든 것은 이미 길이 만들어질 정도로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행동들이 죄의 길을 내는 것은 아닌지 조심해야 하는 것이죠.

-복있는 사람들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겸손해 보이는 사람에게서도 무심코 나오는 오만함을 쉽게 봅니다.

죄인의 오만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도 교만하고 오만하게 구는지 모릅니다.

그 오만의 치명성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는 것이죠.

티끌 같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머리로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떠받들며 살아가잖아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오만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정말 머리가 숙여집니다.

교회역사에 위대한 설교자로 손꼽히는 로이드존스는 늘 ‘나는 결코 설교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불러 세우셨다’ 말하곤 했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는 대단한 줄 알지만 사람들이 속으로 가장 낯춰 본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은 그게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따르지 않는 게 시인에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만하게 그 길을 가면서, 너는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 말할 때 쉽게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안 들었겠어요?

우리도 그렇게 적당히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에 그들과 다른 좁은 길을 끝까지 걷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악인들에 둘러 싸여서도 그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2) 복있는 사람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원수와 대적이 꾀를 내며 부산을 떨지만 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은 다윗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죠.

복있는 사람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세상의 소리가 의식을 지배합니다.

저희 청년 때는 성경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앉아서 읽으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성경에 푹 빠져들었죠.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다 배웠습니다.

성경 말씀이 내 속을 뚫고 들어와 성경 속의 그 죄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보여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구요.

성경에서 의문이 들던 부분이 어느 날 깨달아질 때 그 기쁨은 월급 받은 날만큼 좋았습니다.

월급은 한 달에 한번, 그것도 통장만 스치고 지나 가지만, 성경을 주야로 읽으며 그 기쁨으로 힘든 시절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이런 신앙생활이 지루하고 특별한 걸 못 느끼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진짜 하나님과 마주친 조우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조우라는 한자의 뜻이 흥미롭더군요.

조우라는 말이 원래 신하가 뜻이 맞는 임금을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훌륭한 임금을 만났으니 이제 평생 섬기고 모시기만 하면 되는 그런 신하는 복된 것이죠.

우리가 평생 섬길 하나님을 만나는 게 가장 큰 복입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에 많은 지각변동이 생겼습니다.

성도들을 대상으로 지금 신앙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게 무엇이냐는 설문조사에서 체험적인 신앙이라고 답한 사람이 70%가 넘었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영적 갈급함이 커졌다는 것이죠.

성경은 신앙의 체험을 성경 묵상에서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시편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는 기쁨을 감격스럽게 노래한 시입니다.

장장 176구절의 절마다 말씀의 위대함에 놀라는 탄성으로 가득합니다.

103절,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그런 은혜를 맛 본 사람은 손에서 성경을 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자꾸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구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에게 반드시 자신을 계시해 알게 해 주십니다.

다윗은 평생에 치명적인 오점이 세 번이 있었는데 다 율법과 관련됩니다.

사울왕 정권 동안 변방에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올 때였습니다.

정치초반 부터 하나님 신앙으로 백성들을 다스릴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일반인이었던 다윗은 제의에 대한 율법을 잘 몰랐습니다.

법궤는 레위인들만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수레로 옮기다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움직입니다.

수레를 몰던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다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막 왕위에 올랐던 다윗에게 이 사건은 큰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이 수군대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율법서에서 이 잘못을 깨닫고 다시 법궤를 모셔옵니다.

우리가 아는 밧세바 사건은 십계명 중에 두 개의 계명을 범한 죄였습니다.

그로 인해 다윗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 율법에 금지했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아주 큰 곤궁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것 때문에도 큰 징계를 받게 되죠.

다윗은 이런 사건을 통해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평생 지키며 살았던 것입니다.

다윗만큼 말씀에 따라 바르게 행한 사람은 없었다고 성경은 평가합니다.

다윗도 그랬듯이 우리도 하나님 말씀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치울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삶의 굴곡과 낭패가 대부분 그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이든 지키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해 보면 쉬운 계명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해 애써 말씀을 지키려다 보면 그 결과가 내게 얼마나 복이 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꼭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 싶지만 그렇게 하면 의외로 많은 문제와 갈등이 해결됩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우리가 반은 참게 되잖아요?

열 번 다툴 일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있는 사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주의해서 순종하며 사는 것과 연결되는 것임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을 누립니다.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생각하고 열심히 배우고 지킨 사람들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스스로가 시냇가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라 심겨졌다는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를 시냇가 좋은 자리에 심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자리는 이전에 내가 살던 곳이 아니잖아요?

내가 좋은 곳에 옮겨 심겨졌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이전의 나를 생각하면 광야 같은 데 혼자 서 있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한번씩 환난의 모래바람이 덮치면 한동안 해가 안 보일 정도로 인생이 암울해 졌습니다.

그럴 때는 입에 씹히는 모래알을 한참이나 뱉어내던 그 고충이 기억납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그때와 다르잖아요?

우리가 심겨진 이 시냇가 좋은 자리는 바로 예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니 진액을 먹고 저절로 열매 맺는 삶이 된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맺으려고 스스로 애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했죠.

열매 맺을 때가 되야 열매가 있는 데 나무가 조급하게 열매를 내려고 해봤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데 왜 내게는 신앙에나 생활에나 풍성한 열매가 없는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심겨진 곳이 시냇가가 확실하다면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물론 형통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풀리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게 더 형통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사람이 그 거대한 짐에 짓눌려 스스로 무너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는 세월 십년을 도망자 신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되게 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인생에 시련도 있고 아픔과 고통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셔서 교육이 될만하게 허락하시는 것이니 그럴 때 너무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잘 견뎌야 할 것입니다.

결말로 다윗이 누렸던 복을 역대상29장2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지키고 다윗처럼 늙도록 복을 누리고 자녀들에게도 그 복이 이어지길 축원드립니다.

 

4. 복있는 의인과 악인의 운명은 영원히 갈라집니다.

4절을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달리 악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의인들이 하나님이 심어주신 자리에서 끈기 있게 말씀대로 삽니다.

어떻게 보면 물가에 심기웠다는 것은 하나님께 발이 묶인 것이죠.

반면 악인들은 마음껏 돌아다니며 탐욕의 열매를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몰려다닙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 인생은 바람 부는 대로 쉴새 없이 요동하고 흔들립니다.

멀미 나는 인생이죠.

그렇게 돈과 성공과 명예를 구하며 살았으나 그 인생을 결산할 때 까보니 속이 텅 빈 쭉정이와 같더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살고 있지만 그 이후로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완전히 갈라집니다.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절,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땅에서의 생애를 마친 종말적인 때를 말합니다.

악인들은 그들이 선택했던 그 삶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예레미야서를 읽는 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멋대로 사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계속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보게 된 게 있어요.

진노하며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말투에 기품과 품격이 있으신거예요.

우리는 화나면 인격이 다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자세하게 그들이 잘못을 깨닫도록 따지시는지 놀랐습니다.

그 두꺼운 예레미야서 분량이 거의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잖아요?

그건 정말 사람이 쓴 게 아닙니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사람의 죄를 추적할 수는 없고, 그렇게 정확히 마음을 꿰뚫어 모든 죄를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그 성실하심이 느껴지더군요.

분명히 추상같고 공의로우신데 여전히 선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신 거예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악인의 잘못을 핑계치 못하게 날짜와 장소까지 들어 꾸짖으시되 하나님의 성품인 공의와 사랑 안에서 하시는 심판인 것이죠.

공의로 심판하시되 그 사랑 때문에 무저갱에 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탄과 그이 세력은 무저갱에 던지시잖아요?

지옥에서 영원히 징계하시며 그 악인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것이죠.

영원히 징계하신다는 것은 악인이 영원히 안 바뀐다는 뜻입니다.

회개하고 바뀌면 하나님이 그냥 거기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 온 의인들의 천국에서 영원히 그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되기 원하신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 말씀대로 지키며 사십시오.

세상은 자기의 꾀로 살아가지만 복있는 사람은 자기 계획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법을 생각하고 지키는 것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 관심을 좀 더 하나님과 주신 계명에 둔다면 오히려 모든 것들이 형통하게 됨을 오늘 다윗의 시편에서 잘 마음에 새기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