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44Sn9PyGq1Q
이 시편 118편은 종교개혁가인 마틴루터가 가장 사랑했던 시편입니다.
다윗은 전반부에서 그의 환난 날에 도우신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당당히 고백했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구원의 즐거움과 벅찬 감동이 흠뻑 느껴지는 본문이죠.
우리도 오늘 다윗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을 생각하며 이 시편 같은 감사와 찬양이 가득 차게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오늘 시편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구원과 예배,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먼저 시편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과 그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에서 구원이란 단어가 네 번 나오죠.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도들이 생각했던 구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천국과 내세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자세히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야 비로서 예수님께서 천국과 구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 해 주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자세히 알려주셔도 소용이 없죠.
왜냐하면 구원은, 구원 받고 나서야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오셔서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야만 하나님도 알게되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이해가 됩니다.
구약성경은 구원과 내세보다는 그것을 성취하실 구원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는 이런 것들을 좀 감안해야 합니다.
다윗은 14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그런데 이 구원이 무엇을 말하는지 17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17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18절,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1)구원에 대한 첫 번째, 다윗이 감사하는 구원은 현재 죽을 처지에서 살려주신 구원인 것이죠.
사람들은 살면서 몇 번은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만납니다.
병마를 만날 때, 포탄이 터지는 전쟁 중에, 자연재난과 큰 사고를 만날 때 죽음이 바로 곁에 있는 것을 느끼죠.
죽을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서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죠.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은 살 길이 막막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지난 주 기사를 보니 사람의 일생을 경제활동으로 분석한 기사가 났더군요.
나이대별로 얼마가 흑자냐 얼마가 적자냐가 나오는데 17세가 적자인생 1위더군요.
사교육비 때문에 그런 것 같은 데 이때 쓰는 돈이 일년 평균 삼천만원이 넘었습니다.
돈을 한 푼도 못 버니, 그게 고스란히 적자인 것이죠.
왜 우리가 이렇게 맨 날 돈이 없는지 아시겠죠.
애들이 벌지는 않고 다 써버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다 28세가 되어서야 버는 돈이 소비보다 많아지는 흑자인생이 되더군요.
그리고 올라가던 그래프가 60세부터는 다시 적자인생에 접어듭니다.
우리 중에 벌써 적자 인생이 되신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70대가 되면 버는 돈과 쓰는 돈의 차이가 평균적으로 보면 일년에 천만원 이상 적자가 난다고 합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제적 고통이 가장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은 인생은 매일이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이 모든 고통에서 구원받았다는 고백이 줄을 잇습니다.
누군가는 죽을 병에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새가 사냥군의 올무를 벗어난 것 같았다고 놀라워합니다.
새가 사냥군의 올무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누군가는 극심한 가난에서 부요케 되었다고 즐거워합니다.
누군가는 원수의 모략에서 벗어났다고 감격합니다.
오늘 다윗은 필경 사울의 손에서 살아난 구원을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구원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오른 손이 높이 들려 권능을 베푸신다고 하잖아요?
거기에다 우리의 구원은 현재 삶에서의 구원 뿐 아니라 죽음 뒤의 삶도 포함 되잖아요?
‘죽으면 죽으리라’로 나섰던 에스더가 나라를 구했다면 ‘죽으면 다시 살리라’라는 우리는 사실 두려울 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겐 죽음이 끔찍하고 무섭다라는 생각이 안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 뒤에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모르기에 더 큰 공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과정 자체가,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과정을 지켜보니 정말 만만치 않더군요.
그러나 죽음 뒤의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지 그 아픈 과정만 힘든 것이지만 내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공포에 비할 수 없죠.
우리는 죽음이라는 커튼을 걷으면 나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주신 예수님이 기다리시고, 그 아들을 대신 죽이실 만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죽음 뒤에 진정한 행복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두려움보다 훨씬 큰 소망과 기대가 되는 것이죠.
지금 행복하지 않잖아요?
오늘 시편은 현세적 구원에 대해서만도 이만큼 감사가 절절합니다.
우리는 현세와 내세의 구원에 더욱 감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합니다.
이 구원의 소망이 현실의 모든 어려움에서 낙담하지 않도록 우리 생각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이길 힘이 필요하다면 힘든 현실을 한없이 묵상하지 말고, 구원을 묵상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구원에 대한 두 번째, 이런 성도들의 구원의 경험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꿉니다.
다윗은 죽음에서 살았으니 이제 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17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다윗은 사울의 손에서 죽지 않고 살았으니 이제 왕의 권력과 영광을 마음껏 누리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소요리문답 1문에서 배웠듯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잖아요?
그것은 나를 위해 살았던 삶이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바뀌는 것이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아마도 갑자기 변화되진 않아도 아주 조금씩 삶이 하나님을 향해 방향이 맞춰지고 있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새신자들이 처음 교회 나올 때는 주일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꾸준히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몇 해 지나다 보면 어느새 주일 스케줄이 거의 다 조정이 되어 무난하게 예배에 나오게 되죠.
목적과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예배만큼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구원을 선포하는 확실한 고백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이렇게 신앙을 따라 조정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눈이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호한 사실 때문에 실제 생활을 바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오감에 해당되는 시각에 또 다른 눈이 하나 생깁니다.
그것은 자연세계를 보고 인지하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옛날에 나는 자연의 물체만을 보는 눈 하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안에 다른 눈이 하나 더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눈은 항상 하나님을 응시합니다.
퇴근 길 떨어지는 낙엽을 내 눈이 보고 있지만 내 안의 또 하나의 눈은 낙엽의 신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을 맹인과 같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거듭나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배워도 성경 속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을 맞추고 살지는 못하는 것이죠.
이 눈이 떠져야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서 산다는 것을 매순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건 하나님을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나님을 향해있는 상태로 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면 무엇을 믿는 것인지 배우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신기한 것이 내가 배운 것을 믿고 있다는 데 놀라게 되죠.
그리고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이 나를 지키시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더 이상 누가 물어도 부정할 수 없이 하나님을 선포하게 되죠.
왜냐하면 계속 내 안의 어떤 눈은 하나님을 보고 있으니까요.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 안에서 늘 하나님을 응시하고 든든히 살아가길 축원드립니다.
3) 구원에 대한 세 번째, 구원에는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아주 중요한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죄에 대한 인지력입니다.
18절,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다윗이 죽을 뻔한 상황을 사실 자기 죄에 대한 경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한 가지 죄에 대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본성적 인격을 관통하는 죄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예를들어, 다윗이 사울에게 시달린 것은 사실 다윗 잘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감화하신 다윗은 사울왕의 무고한 살해위협에서 오히려 자신의 죄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이 내 잘못은 아니라할지라도 그것을 대처하고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나의 죄인 된 본성을 끊임없이 보게 되는 것이죠.
모든 순간에 자기 죄를 인지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의 반대는 심판이 아닙니다.
구원의 반대는 죄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인지하지 못하면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남이 백 프로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그다지 억울해 하지 않는 것은 성령께서 항상 내 죄를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본질을 보면 그다지 억울해 할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죠.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어떻게 실행 가능하겠습니까?
성령께서 그 원수 못지않은 파렴치하고 위선적이고 악한 죄가 내 안에 있다는 걸 한 밤중 서치라이트처럼 눈이 아프게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억울해서 펄펄 뛰는 것은 당장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잠깐은 그럴 수도 있지만 평생 원수를 삼을 수는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다윗이 끊임없이 사울왕을 용서하며 자기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기도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령님으로 인해 얼마나 철저히 자기의 죄의 본성을 깨달았는지 시편에 구구절절 죄를 고백하잖아요?
시편 51장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구약성도 다윗도 이정도로 자기 주제파악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믿음에 역시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죄인 됨의 인식이 동반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구원에 대해 세 가지 깨달음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예배에 대해서입니다.
2. 이런 죄의 자각과 구원의 확신을 받은 성도들이 성전으로 예배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예배에 대한 이 뒷부분은 참 신비하고 경이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편이 구약 제사시대의 시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신약시대의 속죄와 예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예배자의 신분에 대한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19절,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0절,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구약시대 성전에 제사 드리러 들어가는 무리들은 죄인들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제물을 드리고 속죄를 받아야 의인이 되는 것이죠.
지금 성전 문으로 들어가는 구약성도들이 아직 의인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여호와의 문으로 의인들이 들어가고 있다고 표현하죠.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라면 이렇게 시를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의인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온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예배드리는 곳, 성전에 대한 놀랍고 기이한 증언을 합니다.
22절,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지금 배경은 성전입니다.
시인이 다윗이라면 그에겐 아직 눈에 보이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입니다.
성전은 아들 솔로몬이 건축하죠.
그러나 하나님이 그려주신 성전의 설계도가 다윗에게는 있었습니다.
다윗이 말했잖아요?
역대상 28장 19 다윗이 가로되 이 (성전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
다윗은 성령께서 그리게 하신 성전의 조감도,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의 기초가 되는 머릿돌을 유심히 보니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렸던 그 돌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나중에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해석을 해 주시죠.
이 시편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인용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버리잖아요?
십자가형을 내려 달라고 로마법정에다 고발해 죄인으로 넘겨주죠.너희가 나를 쓸모없다고 버릴 것이지만 하나님은 버려진 이 돌로 구원을 이루신다고 정확히 이 구절을 가져다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버리고 하나님은 가져다 세우신 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다윗이 예수님 탄생 천년 전에 이렇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하고 경이로운지요.
성령에 감화 된 일생을 살았던 다윗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3) 또 제사와 제물에 대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표합니다.
27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구약성경 제사법 어디에도 제물을 끌어다 제단 뿔에 매어 놓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제물은 모두 다 죽어서 각이 떠지고 피를 양푼에 받아 뿌리고 몸은 제단에 번제로 올려놓는 것입니다.
제물이 살아서 제단에 묶여있다는 것은 기이한 광경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기이한 것에는 반드시 구원에 대한 코드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놀라운 신약적 제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완전한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이제 번제로 불살라질 제물은 필요치 않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일찍이 깨닫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시편 40장 6절,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절,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참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제사를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들었다고 하죠.
그 때 ‘나’라고 하는 신비로운 존재께서 등장하십니다.
그 동물의 제사 대신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나’는 다윗이 아닌 게 분명하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더 이상의 제물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얼마나 주도면밀 하신지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시대 제물을 통한 제사는 예수님 모티브였기에 이후로 더 이상의 제물제사는 필요가 없게 되었잖아요?
이스라엘 국민들 중 여전히 구약성경의 유대교를 믿는 열혈 종교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성경에 정하셨던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정해진 예루살렘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거든요.
지금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 이슬람의 황금돔 사원이 떡하니 세워져있기에 일단 제사드릴 성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집행 할 제사장이 있어야 되는 데 나라를 잃은 이천년 떠돌이 생활 동안 족보를 다 잃어버린 터라 레위지파 제사장이 한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했던 모든 게 없어진 것입니다.
성전도, 속죄제사도, 제사를 드릴 대제사장도, 주인공이 오셔서 완결하셨기에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부 차단해 아예 구약제사를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는 산제물이 되라고 하셨죠.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워 드리고 자신의 피로써 정결하게 한 그 제단의 뿔에 너희를 묶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묶여서 살아있는 제물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통하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도들은 예수님께 묶여있는 끈을 스스로 풀고 돌아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제물이 되어야 할 어린 양이 제단에 묶여있지 않고 끈을 풀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늑대와 이리의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우리의 시선도 삶도 항상 예수님께 붙잡아 매 놓아야 안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감각의 세계는 밤낮으로 계속 우리의 주의를 뺏습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보다 이 감각의 세계가 거의 우리를 이깁니다.
그래서 이 두 세계의 균형을 잘 유지하려면 상당히 의도적으로 믿음의 세계쪽으로 치중해야 그나마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묶어 놓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묶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과 복음서의 말씀들, 성령께서 지시하신 서신서의 교훈들에 내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제약받는 것이죠.
그 말씀 밖으로 내 감정이나 언행이 뛰쳐나가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시를 쓴 다윗은 십여년 이상 사울에게 쫒기며 고생을 하다 드디어 구원을 받았다고 기뻐합니다.
어쩌면 지금 속히 벗어나고 싶은 우리의 문제들도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른 손은 우리를 위해 이미 능력을 베풀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속도를 잘 맞춰서 한걸음씩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응시하는 눈을 자꾸 확인하며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보내주십니다.
또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늘 나의 죄를 살펴보고 내가 죄를 인정하고 있을 때가 구원의 상태라는 것을 반드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밧줄로 단단히 묶어야지 밧줄을 끌러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않는 그런 복된 우리 주나산가족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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