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koRM0-8mIWA&t=1025s
<설교영상>
오늘 지나온 일년 동안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마 각자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복의 정도는 다 다를 것입니다.
그 어느 해보다 큰 축복을 받고 감사한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이나 금전적인 면이나 가정사에서 힘든 날이 더 많았던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도 삶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방황했고 목이 말라 기진했다고 합니다.
안전한 성읍을 찾지 못해 불안하고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올려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말씀에서 계산 할 수 없을 만큼 부어주시는 축복을 깨닫고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1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 감사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바로 뒤에 나오는 ‘왜냐하면’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선한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면 하나님은 선하신 신이 분명합니다.
작품에는 만든 사람의 성품과 영혼이 깃드는 것이잖아요?
아주 작은 곤충 하나에도 하나님은 그 존재에게 최상의 영광을 옷 입혀 주신 것을 우리 눈이 봅니다.
그 어떤 피조물에게든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선하심은 특히 우리 인생에 대한 인자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선하시다 해도 내게 인자하지 않으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니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축복에 어떤 변수가 있고 완전히 보장된 게 아니라면 큰일 난 것이죠.
올 수능에서도 수험생 자식 뒤에서 마음 졸이는 부모들의 간절함을 기자들이 전해 주더군요.
수험장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서 눈물을 훔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수험장에서 혼자 미래를 건 두려운 싸움을 하고 나온 딸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엄마의 모습은 모든 부모의 마음을 젖어들게 합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죠.
그 사랑이 변하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지으신 하나님의 더 완전한 인자와 사랑은 변하지 않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시대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죄로 팔려간 백성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2절,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우리 국민들에게 잊지 못할 가까운 시대의 역사 중 하나가 IMF 경제위기 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국제통화기금에서 돈을 꿔서 막았던 사태입니다.
그때 시중은행 금리가 30%에 육박했습니다.
빚으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당할 재간이 없는 것이죠.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나락에 떨어졌고 가정도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4년 만에 빚을 조기상환하고 국가가 정상화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모든 국민이 고통을 당한 이런 국가적인 사태는 잊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나라 이스라엘도 잊지 못할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종이 된 뼈아픈 역사와 칠십년 만에 그 포로생활에서 다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한 일입니다.
오늘 시편이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두고 쓴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말고 감사하자고 시를 지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은 그 포로 귀환을 두고 ‘하나님이 속량해 주셨다’고 합니다.
속량은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왔다는 뜻입니다.
시편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이런데서 나타나죠.
이들의 포로귀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의 정치적인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고 하나님이 값을 지불해서 자신들을 다시 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시 무슨 값을 지불했기에 시편은 속량이란 말을 썼을까요?
죄 값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속량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빚을 졌거나 남에게 잘못을 해서 손해를 입혔을 때 상대가 모든 피해를 탕감해 주었다면 그 사람이 손해를 떠안은 것이지 자동으로 피해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물질적 피해만이 아니라 사람간의 사랑과 신의를 저버리는 것도 상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물질적 피해보다 마음에 입힌 피해가 더 지독하고 오래 가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의를 버리고 배반한 민족이죠.
그들이 죄의 결과인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당하신 손해를 껴안으신 것이기에 그것을 속량이라고 한 것입니다.
출애굽이나 출바벨론 역사가 예수님의 속죄를 통한 구원을 상징한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바벨론 해방을 두고 하나님이 속량하셨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악의 갚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상징이고 사인인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이 바벨론포로 귀환의 속량을 감사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대속을 통한 구원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들처럼 무상으로 속량의 은혜가 임하신 것이잖아요?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것 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잖아요?
오늘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드릴 감사는 바로 이 예수님의 속량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감사이고,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다시 우리 마음에서 샘솟는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원천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믿음은 든든한 반석입니다.
속량의 은혜를 모르면 이 든든함이 없습니다.
속량의 큰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은 시련이 오고 세상이 유혹할 때 쓸려 없어집니다.
어느 날 보면 믿음도 간데 없고 사람도 사라져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감사한 복은 이 속량을 아는 복이고 이것을 믿게 된 것이 가장 큰 생애의 기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늘 감사한다면 삶을 헤집는 풍파가 밀려올 때라도 꿋꿋이 믿음과 삶을 지켜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부족함을 느끼신다면 하나님께 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길 매일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이 매일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와 마귀에게서 뿐 아니라 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곤경과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위험한 여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시편의 주인공들은 당시 삼차에 거쳐 단체로 입국한 귀향민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족 단위로, 마을 단위로, 삼삼오오 고국행을 선택한 무리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동서남북 원근각처에서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며 우리 교회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를 한사람 한사람 부르신 게 정말 동서 남북 원근 각처잖아요?
이젠 먼 스리랑카에서, 싱가폴에서 장로님 가정을 불러오시니 하나님이 참 독특하게 우리 교회를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축복의 땅으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그 길이 평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피곤하였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려면 죄악으로 인해 끌려갔던 그 광야를 다시 되짚어 걸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끌려갔던 그 광야를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합니다.
죄로 인해 망가졌던 인생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삶에도 광야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날 때는 어느 곳이 길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길이 보이는 것 같다가도 모래 폭풍이 한바탕 불고나면 다 덮어 버립니다.
어떤 길이 안전한 성읍으로 향하는 길인지 안 보입니다.
또 광야는 황량하리만치 넓고 막막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이 광야에 들어서면 그 시간이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습니다.
저 너머가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광야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차를 타고 지나 본 이스라엘광야는 몇 시간을 달려도 오로지 황무지 뿐인 그런 광야였습니다.
그렇기에 광야를 지날 때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들도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올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구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장막을 펴야 할지, 어떻게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는 길을 가야할지.
내 앞에 있는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기로에 섰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근심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 그 고통에서 건지셨다고 합니다.
고통에서 낚아 채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올해 광야의 막막함에 낙담하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고통에서 우리를 낚아채서 끌어 올려 주셨습니다.
그 기적 속에서 우리가 올 한해를 살아 온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한달 정도 사이에 이렇게 교회 이전 문제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체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심을 목격했습니다.
올해 저희 딸이 결혼해서 미국에 가정을 꾸린 것도 기적입니다.
멀리 싱가포르에서 초등학교 때 만난 사위를 페이스북에서 다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저만 이런 기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가요?
우리 삶에서 많은 눈물이 사라진 것도, 근심의 자리를 평안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다 기적입니다.
매일 일의 지혜를 구하며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들은 감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지난 주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가 세계 1위 선박 수주국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기사를 읽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과 오십년 전만 해도 아시아의 빈민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 대단한 나라가 되었지?언제 이렇게 사람들이 잘 살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으며 한 사람이 방 하나씩 차지하고 사는 나라가 되었지?
저희 집은 방이 세 개인데 남편과 둘이 사니까 한 개 반씩 차지하고 삽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단칸방에 온 가족이 득실거리며 사는 집이 많았잖아요?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건 부모세대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한사람이라도 있으니 이 가정도 살리고 저 가정도 살려주신 것이죠.
아무리 어린 애라도 해도 그 애 하나가 예수님을 믿으면 고사리 손을 맞잡고 기도하잖아요?하나님이 어떻게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어린애가 혼자 교회 나오면 그 아이가 그 집의 리더이고 그 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형편이 좀 나쁘다 해도 낙담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숨겨져 있는 길을 아십니다.
간구하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바른 길을 보여주고 기적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하나님께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의 깊은 속에서 흘러나오는 갈구는 참 끈질기고 채워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받기에 늘 목말라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에 갈급해 마음이 늘 공허합니다.
누군가는 올라가고 싶은 성공의 자리를 애타게 좇고 누군가는 돈이 주는 풍요로움을 갈망하며 입에 단내가 나게 일을 합니다.
우리는 다 바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무조건 다 쓸 데 없는 거라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그 갈구하는 것들이 진짜 만족하고 좋은 것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걸 세상에다 대고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도 간절히 원했던 것을 가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고통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해서 결혼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제 간절히 헤어질 걸 원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것을 가졌지만 그게 매일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한결같이 우리 심령에 평안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받아 누리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갈구하되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대고 갈구하는 것은 결국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 남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얻은 것은 크던 작던, 넘치던 빠듯하던 진정한 만족을 주시고 계속해서 공급되며 영혼에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설교에서 감사의 이유를 찾아 내셨습니까?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원근각처에서 불러 한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한 공동체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아직은 광야와 같다 해도 간구할 때마다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안전한 거처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길 바랍니다.
우리 삶에 크고 작은 선물과 열매들을 풍성하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를 지난 10년동안 인도하시고 이제 새로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갈망하고 사모하는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만족하게 채워주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주셨고 앞으로 영원히 더 베풀어 주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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