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올 한해 우리를 돌보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포항 지진으로 인해 국민들 마음도 크게 한번 출렁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시간 교회에 있었는데 본당 통로 부근에서 울컥하는 진동을 느꼈습니다.
사실로 따져보면 우리가 안전하다고 딛고 있는 이 땅이 지구 속까지 암반석이 아니잖아요?
암석권은 겨우 백 킬로미터 정도이고 그 밑으로는 2900킬로미터 깊이의 유동성 고체인 맨틀로 채워있는 게 지구입니다.
단단한 지반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변화무쌍한 맨틀 위에 이 땅덩어리가 떠있는 셈이죠.
사람이 일궈놓은 문명 세상만 불안한 게 아니라 문명을 세운 땅덩어리도 불안한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히 안전하고 흔들리지 않는 게 있겠습니까?
올해도 돌아보면 내가 흔들리지 않았노라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환경도 흔들리고 마음도 흔들리고 때로 믿음도 흔들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죠.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과거 자신이 얼마나 어이없는 말을 했었는지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다윗은 크게 흔들렸고 걸음이 미끄러져 죽음의 깊은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견고한 게 아니라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견고하신 것을 깨달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오늘 시를 지어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다윗의 감사시를 통해 우리도 이런 은혜 안에서 일년을 살았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절부터 3절까지에서 다윗은 죽음에 문턱에 선 것 같은 큰 시련을 만났음을 생생이 회고합니다.
다윗의 생애가 얼마나 파란만장 했는지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건을 겪은 뒤 이 시를 썼을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추격하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때였을지, 압살롬의 반역으로 야밤에 궁전을 탈출하던 때였을지, 아니면 불법적 인구조사의 징계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때였을지.
아니면 힘들었던 모든 시간을 되돌아보며 지은 시일 수도 있겠죠.
어떤 상황이었든 다윗은 죽음을 느낄만한 공포 앞에 서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원수들에게 시달렸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문제 자체도 힘들지만 주변사람들의 시선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지난 주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더 이상 국민들게 폐를 끼칠 수가 없다며 삼년 반 콘테이너 생활을 접고 팽목항을 떠났습니다.
깊은 바다에 남겨질 아들 생각에 어머니는 결국 울며 주저앉고 말더군요.
이제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겠다며 울음을 삼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도 눈물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었습니다.
악몽 같은 그 날 이후 모든 일상을 잃었지만 비수 같은 말도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이번 포항지진만 해도 포항 수험생 때문에 수능이 연기되었다고 욕하는 글들이 올라왔다고 하죠.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죄인이 되는 것이 이 죄인사회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약자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려움이 지속될 때 사람들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죠.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했고, 하나님의 도움도 못 받는 믿음도 없고 박복한 사람처럼 보여 지는 게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난 중에 원수 같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했으면 1절에서 제일 먼저 이 문제를 털어 놓겠습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막혔던 문제가 풀리고,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니 제일 큰 기쁨이 나를 비방했던 사람들의 코가 납작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원수는 사람의 배후에서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마귀의 세력을 포함합니다.
다윗을 충동해서 인구조사를 유도한 것이 사탄이었잖아요?
다윗의 시편에서 원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입니다.
힘들 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본성도 문제지만 그를 통해 우리를 농락하려는 마귀의 간계를 우리도 파악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고난 중 사람의 비방을 참는 것은 결국 원수들 앞에서 우리에게 상을 차려주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원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시고 환란에서 자신을 다시 높여 주셨기에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비천한 중에 들어서 사람들 앞에 높여주시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다윗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감사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다윗이 당한 시련 중엔 중병에 대한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일생을 살며 어떻게 모든 병을 다 피해서 살았겠습니까?
게다가 다윗은 늘 사망의 위협을 당하는 전쟁터에서 살았잖아요.
우리도 마음과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올해 우리 성도님들이 여러 가지 병을 얻어 많은 고생들을 하셨습니다.
저도 심각하진 않지만 여러 군데 병원을 전전하며 보낸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감사할 것은 단 한분도 병에 지지 않고 이렇게 건강하게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치료의 시간은 길고 힘들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치료가 잘 되도록 우리를 돌봐주셨습니다.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것만이 아닙니다.
찢고, 꿰매고, 약물을 투여하고, 그런 과정 속에 얼마나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시술을 하러 들어갔다 생명을 잃기도 하고, 더 큰 병을 얻어 나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전에 신장에 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려 들어갔는데 나와 보니 신장 한쪽을 다 잘라냈더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건강이 있는 것, 우리 집안에 큰 중병이 없는 것 하나님 앞에 큰 감사의 제목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질병들은 또 우리를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없는 것은 어떤 질병이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잘 치료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그러셨듯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치유하시고 삶에 지장 없는 건강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치유가 단지 육체의 질병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육체의 질병에서 고쳐주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은 우리를 사망의 문 스올, 지옥에서 끌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을 병에서 살려주셨다 해도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할 수는 없습니다.
영벌을 받아야할 사망의 몸이 영광스런 부활의 몸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야말로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4절에서 다윗은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권유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는 주님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쓰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견디고 복을 받는 모습은 서로에게 큰 격려가 되지 않습니까?
다윗은 성도들이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할 이유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 죄로 인한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총은 평생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십계명을 주실 때 이렇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노염이 3이라면 은총은 1000인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사랑의 비율입니다.
그러므로 저녁에 울고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밝아오는 아침엔 반드시 기쁨을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일 밤만 울면 되는 것입니다.
긴 밤을 근심으로 보내며 차라리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두려움의 때를 지나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마다 주신 새 힘으로 이겨냈고 마침내 지금처럼 편안한 아침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 울음이 깃든 저녁을 맞고 있다면 오늘 말씀대로 기쁨의 아침을 주실 주님께 감사하며 믿음을 굳세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도 이런 고난 중에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2절과 8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도움의 길을 예비하셨지만 기도할 때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이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천사를 보고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아라우나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을 해법을 일러 주셨잖아요.
역경을 헤쳐 나갈 귀중한 지혜도 기도할 때 주십니다.
우리는 조급해 죽겠지만 하나님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부르짖어야 할 때 우리는 믿음에 낙담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때가 많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역경 중에 부르짖고 응답받고 감사하는 내용으로 수두룩합니다.
올해 우리의 많은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6절에서 다윗은 문득 지난 날을 돌아보며 부끄러운 고백을 꺼냅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교만한 말이었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시편16장8절에서 하나님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런데 번영과 형통이 다윗을 둘렀을 때 이런 망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강성해지고 사방의 대적들이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칠 때 이젠 내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좋은 것이 어디서 왔는지 정말 잘 알고 있었습니다.
7절을 보면 주의 은혜가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다고 합니다.
양을 몰던 광야에서 불러내어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혀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통과 번영이 길어질 때, 이젠 그렇게 질질 짜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자만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이렇게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젠 혼자 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불치병인 배은망덕과 교만에 대해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십니다.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모든 은총과 부요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시면 점점 기쁨과 행복은 사라지고 근심이 덮여 옵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1장9절을 보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과 그 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곳으로 유배되는 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시니 다윗에겐 점점 근심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멀어지자 현실이 두려웠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마침내 다윗은 국력을 확인하고자 군대의 숫자를 헤아리는 범죄를 행합니다.
고난을 견디기만큼 힘든 것이 번영을 견디는 것입니다.
아니, 형통과 번영만 있는 인생을 견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가진게 많고 잘나가서 무너진 사람들이 뉴스에 매일 등장하잖아요?
그렇기에 인생에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하나님은 번갈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번영 중에 있을 때 다윗의 넘어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을 받는 곤고한 날엔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성도의 형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미약하고 가난하고 늘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9절 내가 무덤에 내려 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하나님을 찬송하고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나를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성공과 형통이 자기를 위한 목적일 때는 다윗처럼 실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과 돈과 명예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도들에게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렇기에 다윗의 기도는 더욱 힘차고 담대해집니다.
10절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모든 환경과 문제를 다윗처럼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아낌없는 은혜와 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고난과 기도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며 점점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매 절마다 여호와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를 쉴 새 없이 부릅니다.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꽉 차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우리를 졸졸 따라 다니며 엄마, 엄마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부모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엄마를 밝히던 자식들이 어느덧 장성해서는 별로 부모가 필요치 않은지 엄마라는 말도 잘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 이름이 머리 속에 꽉 차있지 않습니까?
다윗의 입에는 하나님, 내 하나님 소리가 입에 붙어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부르는지가 하나님에 대한 결속과 친밀감의 증거인 것입니다.
올해 하나님께 대한 성경의 지식과 우리를 인도하신 사랑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주님을 찾게 되었다면 이 또한 감사해야 할 제목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 모든 축복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시고 슬픔의 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워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신 영광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영원히 주님께 감사하기로 작정합니다.
과거의 슬픔이 지금은 기쁨으로 변하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게 있는 모든 영광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송하는 복된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도 다윗의 결론과 같습니다.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느껴 보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순간 하나님이 현실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성령님을 통해 즉시 감동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후로 우리 주는나의산성교회 성도들은 범사에, 그리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아버지, 감사해요, 예수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입술로 고백하며 사는 삶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윗은 자만의 결과 엄청난 시련에 직면하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감사의 시로 보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인구조사의 실책으로 인한 전염병의 징계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 고난은 복된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했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성전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차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다는 놀라운 구속의 비밀을 공개하신 것이잖아요?
그래서 아마 이 시를 표제에 기록한 대로 성전 낙성가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도 복되신 구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가장 값진 길이 되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큰 축복으로 이끄십니다.
성도들에게 목적없는 시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은 구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영국 청교도들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정착한 첫 해 추수의 감격을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1621년 박해를 피해 미국대륙에 건너간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은 거친 항해와 풍토병과 추위 속에서 죽고 겨우 27명만 생존합니다.
그들이 가져 간 밀과 식물의 씨앗을 파종했지만 토양이 맞지 않아 농사는 실패했고 모두는 굶어 죽을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발을 디딘 바로 그 땅은 10년 전 영국의 무역상이 먼저 들어왔던 곳입니다.
그들은 그 지역의 모든 인디언 원주민들을 속여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그 중에 스콴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스콴토는 스페인의 한 사제에게 팔려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늘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같이 좋은 고향을 만들겠다는 것, 평생을 감사하며 살겠다는 것.
스콴토는 독실한 기독교인 새 주인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여 마을을 새롭게 재건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해 1621년 청교도들이 스콴토의 마을에 들어온 것입니다.
스콴토는 기도해 온 대로 청교도성도들을 환영하고 먹을 것을 나눠주고, 유창한 영어로 농사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을 인도한 브래포드 목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콴토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는 옥수수 심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땅을 개간하고 낚시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를 인도했다.’
스콴토가 없었다면 그 해 청교도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다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죽음의 항해를 떠난 청교도 성도들을 위해 신실하게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스콴토는 노예상에 팔려가는 재난을 만났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미국 땅의 하나님나라를 위한 귀중한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조차도 놀라운 축복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년을 돌이켜 보면 탈출구가 없는 깊은 웅덩이의 시간이 오히려 믿음을 성장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천국에서의 영원불멸의 행복한 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감사를 드리지만 다윗이 그랬듯이 우리는 또 넘어질 것입니다.
삶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반드시 기쁨이 온다면 저녁에 울음이 있다 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매일 흔들리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하며 어떤 환경과 문제라도 축복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7년11월19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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