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시편은 어머니 품에 잠든 아기의 평온한 모습이 떠오르는 시입니다.
아이들 키우다 보면 다들 잠들었을 때가 제일 예쁘다고 하더군요.
본 시편을 쓴 다윗은 자기의 마음을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온하다고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일터에서, 가정에서 고요하고 평안하셨습니까?
잡코리아가 지난 달 조사했는데요.
요즘 걱정이 많은가라는 질문에 64%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열 명 중 여덟 명은 꼬리를 무는 걱정으로 최근에 잠을 못잔 적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 얼마를 벌어야 할지에 대한 걱정과 막연한 노후, 취업, 이직, 이런 문제들이 가장 큰 고민으로 나왔습니다.
응답자들은 자신이 걱정하는 불안의 실체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고 대답했더군요.
다들 동감하시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매일이 어떻게 고요하고 평온하겠습니까?
다윗 역시 모든 여건이 좋아서 이런 시를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험악한 세월을 산 사람입니다.
금수저를 물고 나온 왕족출신이 아니라 흙수저를 물고 나온 목동 출신이 왕 위에 올랐으니 그 과정이 얼마나 파란만장했겠습니까?
사울왕은 자기의 왕조를 이어가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무려 십년을 스토커처럼 추격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 세월을 보냈던 다윗의 신앙고백이기에 오늘 이 시편의 평온이 더 기이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다윗을 왕으로 만들어 주시고 축복하셨던 과거의 역사는 비천한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덮으시고 왕같은 제사장을 만들어 주신 것과 똑같은 은혜입니다.
오늘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겸손으로 응답하며 평온한 삶을 살았던 다윗의 시편을 통해 피곤하고 불안한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깨닫고 삶에 잘 적용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 시편은 단순히 다윗의 신앙 간증적인 시일 뿐 아니라 성전에서 불려지던 예배 찬송시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한 목적은 3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모든 국민들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자기와 같이 고요하고 평온한 중에 살기를 바라는 왕의 간곡한 심정인 것이죠.
이번 총선에 당선된 분들이 이런 마음으로 국민들의 형편을 잘 돌봤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앙 인생을 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았나이다
그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에 그런 사람을 사실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만하고, 그 결과 오만한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벌써 서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그의 본성에서 그런 죄성이 다 제거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교만의 실제적 기준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입니다.
시편10편4절에서 교만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자기의 삶을 스스로 통치하는 사람을 성경은 교만한자, 악인이라고 합니다.
엄연히 계신 창조자를 부인하는 것이잖아요.
자신을 가장 높은 왕좌에 앉히고 모든 것이 자기 눈 밑에 있는 상태가 교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가 그 왕좌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존재가 불분명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기 나타나서 확실하게 존재를 보여주신다 해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진정한 왕좌에 모셔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인간은 자기 원대로 스스로 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통치자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순복합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앞에서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죄성을 느끼기에 근본적으로 교만하고 오만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겸손하게 구할 형편이니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랬기에 자신이 교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많은 시편들에서 하나님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죄악을 대신 속죄해 주고 죄를 변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근본적인 죄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인간의 마음에만 근본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불화를 빚어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교만은 항상 자신을 높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걸 가만히 보면 서로 자기를 과시하다 돌아오는 거 아닌가요?
다윗은 그런 면에서 볼 때 기이하게 자신을 낮춘 사람입니다.
그러면 타인과의 관계가 편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겐 아이러니하게 열등감이 없습니다.
열등감은 교만으로 인한 자신과의 불화입니다.
자기의 이상적인 모습을 너무 높이 잡았기에 열등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현재 내 지위와 처지가 내게 적당하다 생각하면 열등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은 워낙 자기 자신을 높은 데 두었기에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어느 부분에서건 숨겨 놓은 열등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존재 차체를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사람들은 열등감 속에서 삽니다.
다윗이 오늘 이런 모든 관계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위대하신 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시편 118장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우리는 분명히 다윗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사람 앞에서 두려워 할 필요도, 내 우월감을 스스로 드러내며 교만할 필요도없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불확실하면 하나님과,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고요하고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야 말로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놀라운 일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큰 돈을 만지고 싶어하고, 크게 성공하고 싶어합니까?
조금 뭐가 되는 듯하면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려다 망하잖아요.
큰물에서 놀아야 하고,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이 덕담이 되는 게 우리 사회아닙니까?
교만의 본성 때문에 사람들은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도 개척교회를 하면서 이만큼 넓은 장소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살아 큰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나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고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생각에서죠.
큰일은 자기 능력 이상의 과중한 일이나 임무를 말합니다.
사람이 뭐든 자기 능력만큼만 하면 그렇게 과도한 짐은 피할 수 있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무리하다 과중한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도 자기가 가진 이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면 그게 부담이 되고 짐이 됩니다.
어쩌다 가진 능력이상으로 잘했다는 평판을 받으면 뭐하겠습니까?
다음에도 그 평가를 유지하려면 더 잘해야 하기 때문에 점점 더 허덕이고 좇기는 심정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이나 현재 여건 이상으로 큰일을 하려고 지지 말아야 될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일을 도모하며 과도한 짐을 지면 평온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신기하게도 평생에 스스로 큰일을 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선지자를 통해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되어 은밀히 기름부음 의식을 했을 때 그는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그를 사람들 앞에 나타내시기까지 여전히 양을 쳤습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잘 던진 것도 양떼를 지켜내기 위해 연마한 실력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사람들 중에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사건은 골리앗을 이긴 일이죠.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움을 한 것도 한방에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야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심부름을 갔더니 사나운 곰 같은 골리앗이 무기도 제대로 없는 이스라엘사람들 앞에서 포효하는 모습에 목동본능이 나온 것이죠.
하나님을 모욕하고 백성들을 조롱하는 덩치 큰 골리앗이 다윗의 눈에 평소 상대하던 곰과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떼를 위협하는 곰에게 물맷돌을 날려 치명상을 입혔던 것처럼 다윗은 물맷돌을 날렸던 것이죠.
그러니까 골리앗과의 대결도 별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다윗은 사울왕의 눈에 발탁이 되고 국민들 눈에 띄게 되었지만 그 후에도 왕권을 얻기 위해 무슨 십 개년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않았습니다.
망명자 신세가 되어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도는 입장에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왕이 되잖아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지금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도 결국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광야에서 쫒겨 다니고 허송한 것 같은 십년동안 다윗은 자기를 찾아온 오합지졸들을 이끌며 그들의 형편을 깊이 헤아리는 왕으로 준비되어 갔던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세상에선 좀 큰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다들 자기를 대단하게 내세우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저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은 일도 하나님이 주신 가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하고 성실한 자녀들을 다윗처럼 귀하게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머리에서 나온 큰 일을 먼저 생각하기에 작은 일부터 시작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공무원시험 부정을 저지른 한 청년이 있었죠.
최근 저녁 뉴스에 자주 나오던 데, 그 청년이 머리를 참 비상하게 쓰는 점에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 대입수능시험에도 가짜 약시판정을 받아 장애인들과 함께 시험을 보며 시험시간을 더 받았다더군요.
일반 학생들이 먼저 끝낸 과목에 대한 답을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숨겨 놓았던 휴대폰으로 확인한 다음 유유히 다음 시간 답을 썼답니다.
이걸 짜내느라고 얼마나 머리를 많이 썼겠습니까?
만일 그 노력과 그 머리를 착실하게 공부하는 데 썼다면 9급공무원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취직해서 평범한 생활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적어도 지금 같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위해서 큰 일을 경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의 성취감과 풍요를 위해 큰일을 했다 해도 피곤할 뿐입니다.
큰일에는 큰 피곤이 따르잖아요.
솔로몬은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좋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다윗은 큰 일을 구하는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결말은 어땠을지, 궁금하시죠?
역대상29장28절에 다윗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솔직히 오늘 다윗의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한 것보다 이 결말이 더 맘에 드시죠?
다윗이 3절에서 말한 대로 오직 하나님을 바랐더니 고요하고 평온한 심령에 이런 세상적인 성공과 존귀도 옵션으로 따라왔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의 큰일을 도모하지 않고 작은 일에 만족하길 원합니다.
다만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라면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매일 성실하게 실력을 쌓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또 다윗은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신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종교성이 있습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 자신을 영적으로 높이려는 쪽으로도 교만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를 좀 아는 체 하고 싶어 합니다.
다윗은 사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다윗만큼 많은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예배를 위한 모든 제도를 만들었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직접 설계도를 받았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자신이 직접 준비해 놓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나안의 왕들처럼 신의 대리자로 치장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다윗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다윗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자칫 영적으로 남다르게 보이려고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만 지각할 수 있지 하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신명기 29장29절에서 모세가 고별설교에서 장차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들을 선택할 것을 예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너희가 할 일은 분수에 넘는 영적인 오묘한 일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분명히 드러내어 지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특권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래봐야 이 땅의 영역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시길,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보면 우리가 해야 할 부분들은 다 땅의 영역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오묘한 하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신비한 응답으로 우리 믿음을 강화시키시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환경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신비하고 오묘한 일은 우리가 직접 하는 게 아닙니다.
가족과 이웃을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섬기고 그들이 감동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섬겨야지 이해하지도 못할 영적인 것들을 들이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뿌리는 자와 물주는 자가 다 다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실재적인 일을 충실하게 하면 하나님은 오묘한 일로 응답하십니다.
이런 일들을 다윗은 힘써서 행하고 그 다음 스스로를 고요하고 평온하게 했다고 합니다.
2절을 보면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영혼의 고요와 평온이 저절로 왔다고 하지 않습니다.
‘실로, 내가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기 힘으로 영적 평화를 찾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영혼이 교만과 오만으로 요동하거나 큰일을 하려는 생각에 안달하지 않도록 스스로 영혼을 평온하게 유지하려고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남이 나보다 잘되고 연봉을 더 받고 성공하는 모습을 볼 때, 다시 솟구쳐오르는 조급함과 질투심에 휩쓸리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어머니의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의 평온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본절에서 젖먹이 아이가 젖을 다 먹고 난 다음 만족하게 엄마 품에서 잠든 것을 떠올리겠지만 본 뜻은 그게 아닙니다.
원하는 대로 젖을 다 먹은 아이가 아니라 완전히 젖을 뗀 아이를 말합니다.
아이들 젖병 떼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젖먹이가 천진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엄마 젖을 찾을 때 보면 집착이 대단하고 앙칼지기까지 합니다.
젖 먹는 나이엔 엄마와의 유대감 이전에 엄마는 생존을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젖을 성공적으로 뗀 아이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젠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신뢰감이 생기고 그냥 엄마 품에 있기만 해도 안심이 되고 가장 평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께 안달하며 매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신뢰 안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신 모든 것을 통해 선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보채고 울며 매달리지 않는 것이죠.
지금 내가 원하는 게 정말 내 행복을 위할 것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한 뒤엔 결과를 하나님의 판단과 인도하심에 맡겨야 하는 것이죠.
기도하는 대로 모든 병이 다 낫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믿으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지난 주에 김연자권찰님 심방을 갔다 할머니 한분을 만났습니다.
딸이 대영교회 다니는 데, 자기는 절대 교회나가지 않는다고 너무 완강하게 말씀하는거예요.
대영교회 목사님이 자기 얘기를 듣고는 따님에게 어머니에게는 절대 전도하지 말라고 했다며 마치 교회 안나가도 되는 자격증을 받았다는 듯이 말씀하더군요.
할머니의 사연인즉, 젊어서 개척교회를 도와주고, 남편께서 교회 건축에 큰 도움을 주셨는데 사십대에 일찍 중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고쳐주지 않았으니 교회 안나가도 떳떳하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편을 고쳐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단단히 화가 나 있으시더군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어떤 엄청난 헌신의 값으로 흥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셨잖아요?
그 측량할 수 없는 값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목숨과 흥정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젖을 줄지 밥을 줄지 알아서 정하십니다.
누구는 낫게 하고 누구는 데려가실지, 누구는 합격시키고 누구는 떨어지게 놔두실지, 각 사람에게 맞게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의인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해서 번번히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악인을 처벌하고 의인을 구해주지도 않으십니다.
병이 낫는 게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고, 병을 끼고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을 낮추는 게 더 유익이면 그러실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했고 우리는 확실히 주신 명령을 지키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전히 자신이 독립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젖은 뗐지만 여전히 엄마의 품에 있어야 안심이 되고 평온한 젖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마지막 절에서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항상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통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들이 내려온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의지해서 괴로운 문제들과 필요한 것들을 꾸준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해도 당장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인내하며 현재의 작은 일에도 만족하게 여길 수 있는 저력은 오직 기도에서 나옵니다.
다윗의 신앙인생의 비결을 들은 대로 우리도 잘 지켜 다윗의 평안과 축복을 매일 받으며 사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6년4월17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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