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시편122편)

남수연 2017. 2. 22. 15:23

우리교회가 창립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이 땅의 교회를 세우실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짧은 말씀 안에는 교회에 대한 분명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의 세력이 이기지 못하는 곳이 딱 한군데 있는데,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과 헌신 위에 세우시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여 창립7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고 우리에게는 큰 축복과 자랑이라고 믿습니다.

이미 조직 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여러모로 편히함이 있고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잘 차려진 밥상 위에 수저하나 올려 놓는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미 뿌린 터전을 원치 않았던 바울처럼 우리는 다 개척자들입니다.

그동안 함께 수고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하며 하나니의 큰 위로와 축복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의 말씀을 읽었는데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십니까?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과 그런 성도를 축복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성도들 서로가 평안과 복을 빌어주는 광경에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교회에도 충만해지길 바라며 이 말씀에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시는 이유가 있어서 짓게 됩니다.

시인이 사랑의 시를 썼다면 연인이 생겼다는 뜻이겠죠.

있지도 않은 감정을 끌어내서 시를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 시편은 당시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앙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지정 된 성전이 예루살렘에 단 한 곳 밖에 없습니다.

이 유일한 성소에 이스라엘 남자성도들은 일 년에 세 번 정해진 절기에 꼭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지정되어 있습니다.

교통수단도 마땅찮던 고대사회에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을 찾도록 만드신게 사실 너무 무리 아닙니까?

신앙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함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예배는 여러가지 현실적 이유로 해마다 지키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아내와 자식들은 누가 지키지? 온 동네에 남자들이 떠나면 여자와 어린 것들만 남을텐 데!’

일을 못하는 동안 생활도 어려워질 텐데

이런 염려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신명기34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이 문제를 언급하십니다.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모든 것을 준비하고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희생하고 먼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희생이 없으면 감격도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나 애틋함이 없어 보입니다.

자식들 눈에 부모들이 그렇게 큰 희생을 했다고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들도 잘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부모들은 예나지금이나 자식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속으로 여전히 희생하지만 자식 눈엔 그게 안 보입니다.

과거 우리 세대엔 자식들이 밥상을 물려야 그때 가서 한술 뜨는 어머니들이 많았잖아요?

그걸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부모님의 희생을 알기에 존경심이 있고 애잔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희생이 없으면 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순례객들이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성전의 제사장들은 아름답고 우렁찬 노래를 부르며 성도들을 환영했고 서로를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앞에 보면 뭐라고 써 있습니까?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다윗의 저작이 맞냐 틀리냐의 논란은 있지만 우리는 성경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오늘 시편을 보면 구절들이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 시편은 단지 과거 이스라엘성도들의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성령에 크게 감동 된 사람으로 이 시편을 지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 우리 구원의 여정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그래서 과거의 성경이 현재 우리를 교훈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1절에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에 대한 다윗의 기쁨이 나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예배하자 할 때 기뻤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러가자큰 결심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기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나하고 무슨 큰 상관이 있다고 남들이 교회 오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한 영광을 받으실 때 자녀 된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무엇으로 시작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람들에게서 온당하게 받들어지게 되길 성도들은 가장 원하고 그렇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던 가족들이 , 오늘 교회 좀 나가볼까할 때 그 기쁨은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또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면 그들이 복을 받을 줄 알기에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길 건너 주유소를 항상 이용하는 데 거기서 일하시는 분 중 소소하게 가정사를 나누는 분이 계십니다.

아내가 사십대에 디스크 수술을 하다 하반신 마비가 되어 삼십년을 누워 생활하고 계십니다.

여름이면 욕창이 제일 무섭다고 무더웠던 지난 여름 저를 보고 걱정스럽게 기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칠년 전 뵈었을 때만 해도 걸음걸이에 힘이 있고 꼿꼿했는데 며칠 전 보니 그새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구부정하게 걸어다니시더군요.

주름이 깊게 패이고 혈색이 다 사라진 얼굴을 대하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짠하던지요.

그 팍팍한 생활이 안 봐도 뻔하잖아요?
우리가 다 생활의 질고를 알기에 그 짐의 무게가 가슴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저 분이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저 지친 얼굴에도 기쁨이 깃들텐데.

주일에도 일하고 아내 분을 돌보시느라 교회를 나올 길이 묘연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시 기도를 했습니다.

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사람들이 말할 때 기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를 의지하고 그 은혜에 기대려고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시고, 축복해주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대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윗 역시 그것을 몸소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그런 복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양치기가 왕이 되는 복을 받았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복은 세상에서 구한 복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나면 다른 사람도 그 복을 받게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구한 복은 내가 많이 가졌다고 다른 사람도 꼭 그렇게 되야 한다고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없는 사람 것 하나를 더 뺏어 독식하려는 게 세상의 복입니다.

구속된 이부회장을 보십시오.

7조 재산이 부족해서 온갖 불법을 동원해 3조 부당이득을 더 얻었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점점 복을 받게 되는 데, 하나님의 복은 그 복을 다른 사람도 내가 받은 이상으로 누리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 마음이 오늘 다윗의 마음이자 먼저 은혜를 받은 우리들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래서 내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하나님께 올라가자고 이끌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의 감격이 2절에 나오죠.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짧지만 하나님 앞에 나온 감격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도 저 멀리 있는 이스라엘나라의 예루살렘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곳이고, 하나님이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 선택했던 성경의 장소이기에 성도들이 한번쯤은 다 가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죠.

제가 이번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싼 항공권을 샀더니 모스크바까지 열시간을 가고 거기서 세시간을 기다렸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네시간을 더 가서 이스라엘 텔아비브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멀미도 하는 저로선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가이드가 준비한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데 정말 설레이더군요.

밤중이라 예루살렘시가지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도시의 불빛이 환히 보이는 데 그게 마치 높이 들린 왕관같이 보여 일행들이 막 탄성을 질렀습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시온산이 해발 7백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엄청 높은 천연 요새입니다.

저 멀리 높이 솟은 시가지의 불빛을 보는 데, 고생은 했지만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 보름, 한달을 걸려 기진맥진 도착한 이들의 기쁨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여정이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잔뜩 쌓인 주일 아침, 교회 나오는게 어떻게 쉽겠습니까?

어느날은 좀 쉬고 싶을 때도 있고, 교회 오기 싫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교회 오기 싫은 날 있어요.

평생을 한결같이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키며 따르는 것은 어쩌면 순례자들처럼 매순간 마음의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한 걸음을 디뎠을 때, 거기엔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이 우리를 맞아주십니다.

기도로 한 걸음 나가고, 말씀으로 한 걸음 나가고, 예배로 한 걸음 나갈 때마다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의 집 안에 흔들림 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잘 오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함께 완주하시길 축원드립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순례자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어땠다고 합니까?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수도인 예루살렘은 성전을 중심으로 모든 게 질서 있게 건설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성전의 모형도만 하나님께 받은 상태지만 그의 눈엔 이 모든 게 생생하게 보이는 것이죠.

지금도 예루살렘은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도시 전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건물이 다 돌로 지어졌고 색깔도 다 돌이 가진 자연색 자체입니다.

다른 재료로 건물을 짓는 것을 법적으로 허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거대한 돌의 도시입니다.

당시에도 돌로 지어진 웅장한 왕궁 건물들과 관저들과 제사장들의 집이 계획적으로 들어선 예루살렘은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의 외관적인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모든 곳에 충만한 질서와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이 광활한 우주를 보십시오.

정해진 궤도에 따라 저 많은 별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있게 운행합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연구할수록 놀라는 것은 이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 없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계산 된 법칙과 상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개만 틀렸어도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지적 설계대로 오늘도 지구는 정확하게 정해진 궤도를, 정확한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 천체를 이렇게 질서있게 짜 맞춰서 운행하시겠습니까?

욥기383절에서 물으시잖습니까?

네가 천체의 운행 법칙을 아느냐? 네가 땅의 자연 법칙을 세웠느냐?

전지전능한 신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다보면 신기하게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성품과 지혜를 닮아가며 우리도 삶이 새롭게 재 정렬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을수록 무질서하고 잘못된 삶의 기준들이 제자리를 잡아가며 규모 있고 지혜롭게 생각과 삶이 달라집니다.

잘 짜여 진 예루살렘 거리처럼 생활에서 각이 나오는거죠.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잘 짜여진 청사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죠.

과거엔 코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등바등 살았지만 어느새 하나님의 짜여진 청사진을 믿으며 담대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예루살렘의 외곽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성도들은 점점 중심으로 들어와 가장 중요한 것을 대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비슷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심판의 보좌입니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성전에 들어온 성도들은 성전에 계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거기 법궤가 있잖아요?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다가가면 우리는 판단을 받습니다.

내가 그런대로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말씀이 우리를 깊이 탐색해서 죄를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만물을 공의로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보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집을 찾은 성도들에게 이 사실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의 제사와 예배를 통해 이들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는 것은 아주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늘 양심에 걸리는 불의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교회에 오면 복을 받는다고 해봤자 본인 스스로도 사실 안 믿어집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면 무능하거나 불의한 신인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고 때로 양심을 속이며 살아 온 일들이 심판받을 죄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장차 모든 사람을 판단할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먼저 일어난 것이죠.

그러나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물을 통해 죄가 해결되었기에 심판이 축복이 되었듯이, 심판 중에 축복을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모든 죄를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공의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의를 심판하셔서 바로 잡으실 텐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의하게 산다는 것은 경우에 맞지를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것이 우리 본연의 영광입니다.

교회가 소중한 것은 이런 것을 배우고 우리의 죄를 알고 예수님의 속죄로 깨끗하게 되어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평안하기를 먼저 구한 뒤에 네 성 안에 평안이 있고 궁중에 형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지 못한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신앙이 바로서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가정에 형통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또 서로가 형통하도록 복을 빌고 평안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이 잘 성장하고 그 삶이 형통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서로 격려를 받게 됩니다.

같이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시험에 드는 것은 모든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윗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라.

우리 성도님들이 처음에 낯선 분위기에 어색하게 교회에 와서 앉으신 모습들이 저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하나님과 성도들을 서로 섬기는 일에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당 하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영상)

며칠 전 길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큰 개를 두 마리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목줄 고삐를 주인이 잡고 가는데 다른 한 마리는 목줄 손잡이를 자기가 입에 물고 따라 가고 있는거예요.

그 장면이 어찌나 우습던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믿어야 될지도 몰라서 하나님이 목줄을 잡고 인도하시죠.

이전에 살던 삶이 더 편해서 그 쪽으로 향하면 하나님이 목줄을 잡아 끄십니다.

그런데 점점 믿음이 성숙해지면 자기 목줄을 입에 물고 스스로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안하게 주인을 잘 따라 즐거운 산책길이 되는 것이죠.

개에 비유해서 죄송합니다만 잘 적용이 되시죠?

이런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봉사와 헌신으로 우리의 교회, 주님의 교회가 이렇게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창립7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 우리 성도님들이 나날이 하나님의 복으로 모든 삶이 충만하시고 형통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2월1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