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남수연 2015. 11. 4. 11:25

 

깊어가는 가을에 맞춰 아름다운 시편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 시편1편은 시편 2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만큼 성도들이 사랑하는 시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을 읽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왠지 영혼이 풍성하고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심령에 은혜를 주십니다.

멜랑히톤이란 신학자의 말대로 시편은 세계에서 최고의 우아함을 갖춘 작품입니다.

특히 시편1편을 보면 성도들이 걸어가는 아름답고 선한 길과 그에 따른 풍성한 복이 정말 우아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시편의 시들이 총 150편인데, 얼마나 탁월하면 시편의 첫 번째에 내세웠겠습니까?

오늘 시편1편은 시편 전체를 소개하는 관문입니다.

정말 복된 인생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대다수 시편들은 인간의 삶의 자리에서 겪게 되는 모든 상황들과 아픔과 인생의 풀리지 않는 의혹들 속에서 지어졌습니다.

괴로운 삶속에서 씌어졌기에 시편의 시들을 읽다보면 탄식과 한숨과 분노와 억울함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시편을 대표하는 첫 시편이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것일까요?

1편을 넘어가면 당장 내 대적이 왜 이리 많냐는 시인의 호소와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탄식이 계속 계속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편 전체에서 이 1편의 존재는 잔잔한 호수에서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유영하는 백조 같다는 것입니다.

순백의 자태로 유유자적하게 호수를 떠다니는 그 물 아래에서 부지런히 물살을 헤치고 있는 고단한 두 발이 있다는 것이죠.

전체 시편에 있어서 시편 1편이 사실은 이런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시작 될 시편 전체에는 수면 밑에 있는 죄악 세상에서 허덕이는 성도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질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복있는 자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견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1편도 조금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 안에도 역시 수면 위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던 고단한 의인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의인의 삶이라고 아름다운 시나 읊조리며 고상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을 비롯한 시편의 기록자들은 하나님께 매순간 고통을 호소하고 도움을 간청하며 결국 복있는 자들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 멀쩡한 얼굴로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 시편을 통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삶의 모든 고단함과 초라함과 탄식과 불안들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복 있는 사람의 길을 발견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먼저 이 탁월한 시는 세상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복 있는 사람, 즉 의인과 복을 받지 못한 악인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 아니면 그 사람이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삶을 살았든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악인이라는 것은 성경에서만 알 수 있는 진실입니다.

하나님만 유일하게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진실을 말해주시는 것입니다.

1절에서 흥미로운 것은 복 있는 사람은 단수로 나타냈고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쉬워보여서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만연한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에 둘러싸여 괴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

왜 이렇게 세상엔 복있는 사람보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이 훨씬 더 많을까요?

인간의 죄성이 그만큼 그 쪽으로 기울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은 유별나게 나쁜 사람들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대면하고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1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다 악인들의 꾀를 따릅니다.

사람들이 다 꾀돌이들이잖아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다 저의가 있고 거의 의도적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고 자기에게 이익을 얻고자 하는 무슨 속셈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보면 꾀를 내고 있는 데, 그 순발력이 대단하죠.

대화를 하다보면 피차 상대의 머리 속의 회로가 한 바퀴 휙 돌고 있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타락한 사람들의 생각과 인격이 이렇다면 죄인의 길에 선다는 것은 습관화된 죄악 된 행동을 말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유명인들이 어이없는 부정으로 한 순간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는 이미 습관적인 죄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죠.

죄인이 죄인의 길에 서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리라 함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내린 영적인 교만을 말합니다.

인간이 다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돈 많고 떵떵거리는 사람보다 절대 못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할 때는 비굴하고 아첨하기도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겉으로든 속으로든 상대에 대해 당장 오만해집니다.

인간의 오만은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별합니다.

나보다 못한 남의 약점을 눈여겨보며 항상 모든 사람보다 자기를 더 나은 사람이라고 구별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왕좌에 앉힙니다.

이런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은 우리 밖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바로 그런 자가 살고 있습니다.

안 그런 척 해도 우리도 거의 다르지가 않다는 것이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이게 모든 사람들의 죄의 속성이고 우리의 본성 속에도 똑같이 이런 마음이 있기에 의인의 인생도 고단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고의는 아닐지라도 순간적으로 악한 꾀를 내고 있고, 아차하면 벌써 죄를 지었고, 냉큼 오만한 자리에 앉아 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 괴로운 환경 속에서 마음이 요동치고, 원망했다, 감사했다, 실망했다, 기대했다, 그런 중에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 오늘도 나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죄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에서는 그게 통하기 때문입니다.

다 그 길로 가서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데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도 다 적당한 선에서 편법을 쓰고, 거짓말도 하고, 눈속임도 하며 직장 생활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차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살 때 오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버리십니다.

그렇게 해서 만일 잘 되었다면 그건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하시면 안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방식대로 살지 않는다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한 사람의 생애가 오늘 말씀에 잘 적용되는 것 같아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유리 창업주인 최태0 회장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최회장은 북한이 공산화 될 때 월남한 분이십니다.

당시 월남한 사람들이 고생한 이야기야 누구나 다 비슷하죠.

우유배달에 자동차 수리공에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가 유일한 삶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했던 최회장을 하나님은 축복하셨고 형편이 점점 나아져 어느덧 작은 사업을 벌일 만큼 되었습니다.

은행에서 사업자금을 대출 받아 일을 막 시작하려던 중 그만 6.25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국가가 패닉 상태에 빠져 다들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정말 난리가 났는데, 최회장은 대출받은 돈을 싸들고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은행직원들도 회사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최회장이 대출받은 돈을 갚겠다고 하자 다들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봤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마당에 누가 돈을 갚으러 오냐는 것입니다.

대출 원장도 어디 갔나 모르니 그냥 그 돈은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회장은 그럴 수 없다고 우겨서 돈을 직원에게 주고 영수증 한 장을 써 달래서 받아 넣고 그제사 피난을 떠났습니다.

피난생활 중에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철저하게 정직한 거래를 하다 보니 다시 안정적인 작은 회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마침 원양어선을 구입할 좋은 기회가 왔는데 최회장의 자산으로 어림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은행을 찾아갔지만 담보가 없어서 안된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 나오려다 지갑에 들어있던 그 은행의 영수증이 생각이나 다시 들어갔습니다.

직원에게 그 상환 영수증을 보여주며 이 신용을 담보로 대출을 해달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영수증을 살펴본 직원이 당신이 바로 은행가에 떠도는 그 전설의 인물이냐며 깜짝 놀라더니 지점장에게 데려가더랍니다.

결국 그 신용하나로 엄청난 금액을 대출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원양어선을 구입해 많은 돈을 벌었고 그것이 바로 한국유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최회장은 기독교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독교학교인 신일고등학교를 세우고 기아대책본부를 설립했고 돌아가실 때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교훈을 따르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눈에 당장은 바보같이 보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회장의 생애야 말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결국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나라와 세상에 큰 유익을 끼친다는 복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쉽게 세상의 길로 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가 나를 복되게 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원칙을 세워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삼킬 듯이 범람하는 세속의 가치관으로부터 오히려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복되게 하는 양식이기에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심령에 말씀에 대한 갈망을 부어 주십니다.

거듭난 영혼은 태어난 아이가 젖을 찾듯 본능적으로 자기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새생명을 자라게 하고 죄의 본성이 드러나게 하고 거룩하게 성도들을 단련시키십니다.

오늘처럼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내가 서있는 자리가 어딘지가 보이고 내 실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죄악 된 모습을 볼 때 부끄럽고 낙심이 되기도 하지만 희한하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더 생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씀이 맞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실 수 밖에 없는 게 맞네.’

이러면서 성경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당연히 말씀만 듣고 성경만 끼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많은 영상매체를 통한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10, 20독을 하고 매일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깨닫는다 해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또 말씀대로 지켜보지 않으면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왜 이렇게 믿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인생을 향한 부요하심이 왜 내게는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손을 펴서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21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물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른다는 것은 죄악된 우리 본성상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삶의 방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또 깨달았다고 그것을 쉽게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걸 벗어버리는 데도 그 버릇과 습관이 생겨난 시간만큼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언제고 심령이 약화되면 거기로 회귀하려는 강력한 요요현상이 있습니다.

한번 기념비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그 긴 과정은 절대로 건너 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한 두 해에 되는 게 아니라 평생을 끊임없이 말씀을 앞에 두고 내 안에 있는 죄와 외부의 적과 유혹에 대항해서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끈기와 인내가 관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이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때가 되면 약속하신 대로 3절과 같은 아름다운 삶이 점차 나타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가을에 풍성하고 소담스런 열매를 가득 맺은 나무는 얼마나 대견하고 아름다워 보입니까?

그런데 나무의 결실은 나무가 어디에 심겨 있냐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척박한 곳에 심겨진 과실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기 힘들 것입니다.

비가 안 와서 바닥이 다 갈라지고 식물이 다 시들어가는 모습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져서 그 뿌리가 물줄기를 향해 뻗어 있고 매일 충분한 물과 양분을 공급받는 나무라면 가물어도 걱정 없이 열매가 맺히고 청청한 것이죠.

사람의 삶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풀리고 점점 결실이 풍성해지고 생활에 항상 기쁨과 활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리를 잘 잡았다는 것입니다.

마르지 않는 신선한 말씀의 생수와 영혼의 자양분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시냇가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 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가지에는 절로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복 있는 자리인 예수님께 붙는 방법은 주님에 대한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과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들을 진실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편이 아니라 예수님 편으로 가서 붙는 것이죠.

또 시냇가 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는 교회와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를 한번 빠지고 말씀을 한번 놓치는 것은 보약 한 재 버린 것 정도가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에 관련되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생활에 적용할 것들을 성령께서 주십니까?그런 은혜가 우리 심령을 강하게 하고 구원의 확신으로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영을 살리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본 뜻을 그대로 전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무시하고 원하는 구절을 골라 설교자의 생각을 주장하는 설교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흘려보내주시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정은 잠시 고양되었을지 모르지만 영혼의 뿌리는 생명의 강줄기에 가 닿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해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꾀를 내고, 죄를 적당히 용인하고, 설교자나 교인들이나 다같이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어떤 말씀을 받아 먹었냐에 따라 같은 종류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뛰어난 역량이 없는 설교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깨닫길 위해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하는 설교자의 말씀을 구별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제가 하는 말씀이 좀 수상한 게 있으면 저와 따져보고 안되면 성경대로 진리를 전하는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또 시냇가 자리는 우리가 매일 조용히 성경을 펴고 읽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을 채우는 곳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시간을 내서 한 줄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께서 말씀의 뿌리가 깊이 내리게 하십니다.

나무가 살기 위해 스스로 물 있는 쪽으로 뿌리를 뻗듯이 영적 자양분을 얻으려고 성도들은 말씀 쪽으로 뿌리를 뻗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확고하게 서있는 성도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들이 점점 더 많이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삶이 점점 윤택해 지고 오늘 말씀대로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해 진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수고한 그 이상으로 쳐서 더 얹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양을 약탈하는 것은 이리나 늑대이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더니 모든 것을 잃고 원망만 남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생애에 잘 먹고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 값지게 사용할 만큼의 충분한 복을 다 주십니다.

혹시 남들이 보기엔 어려워 보이는 환경에서 사는 것 같아도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굳게 붙어있는 사람에게는 신기하게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감옥에 갇힌 노년에 자신을 회고하며 내게 부족한 것이 없다며 기쁨과 감사에 충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오는 동안 부족함이 있으셨습니까?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니요, 주님을 따르는 내 삶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눈을 감을 때면 다 내 생애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스러웠다며 이생에서 움켜쥐었던 손을 편안히 놓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인에 삶에 대비하여 악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묵직한 열매를 가득 달고 시냇가 자리에 견고하게 서있는 나무에 비할 데 악인들의 삶은 정처 없이 떠돕니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동분서주하며 자기를 위해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남겨진 것은 빈 껍질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좋다고 하면 우르르 거기 가서 몰리고, 저것이 대세라고 하면 거기 가서 줄을 서며 불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큰 소리를 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면 점쟁이의 말을 믿겠습니까?

옛 말에 길가에 지은 집치고 잘 지은 집이 없다는 말이 있죠.

설계도가 없이 집을 짓던 시절에 길 가에 집을 짓고 있으면 오고가는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합니다.

창문이 너무 작다느니, 문을 저 쪽으로 내야 한다느니.

이 말도 저 말도 그럴 듯해서 그 때 그 때 모양을 바꾸다 보니 이상한 집 모양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 뿌리를 두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풍파가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다 제대로 된 인생의 집을 세우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종말적으로 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항상 일관성 있는 목적을 향해 가기에 삶이 단출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삶은 항상 예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중심으로 돌며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받고 점점 더 아름답고 견고한 집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종말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모임에 들어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에 다 참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실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말씀을 가까이 하고 힘써 지키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015년11월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