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2편 - 메시야의 고난 시

남수연 2015. 3. 24. 16:18

지난 주 내내 따뜻한 봄날씨에 마음도 한결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곧 봄꽃이 피고 더 화창한 봄날을 기대하게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생에 마지막 봄을 한번 더 맞이해서 활짝 핀 벚꽃을 보고 싶어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아름다운 봄날에도 아련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봄바람에 마음마저 들뜨는 4월을 전후해서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사순절과 고난주간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아픔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떠올리는 게 고난 속에 감추어진 값진 보석인 것 같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우리 죄에 대한 속죄에 대해 지난 주 부터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와 속죄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우리의 자연적인 이성과 지각으로 이해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런 영적인 진리는 성령께서 우리 영에 깨닫게 해주시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속죄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삶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것은 더더욱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나는 영혼의 대 변혁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지고 믿어져야 비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개로 해서 일어납니다.

오늘도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누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속죄에 대해 영혼이 울리며 깨달아지는 은혜입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지은 시 한편을 통해 인생의 고난과 또 주님의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시편을 보니 시를 쓴 다윗도 헤어나기 힘든 고통의 때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정말 깊은 비통에서 터져나오는 탄식입니다.

칼빈은 시편을 일컬어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절절히 표현한 고통의 흔적은 우리 인생의 단편이고 우리 영혼을 해부해서 드러나게 하는 예리한 칼과 같은 것이죠.

고난의 때, 우리는 말문이 막혀 그 심정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시인 김소0 권사님이 연대 교수로 있던 남편을 떠나보내고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 속에 매일 묘소를 찾아가며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 이거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하나님 왜’

그리고 나중에 시편22편을 읽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여기 다윗이 이렇게 내 마음을 절절히 표현해 놓았구나.’

예기치 못한 고통이 닥쳤을 때 우리도 겨우 이런 탄식을 내뱉을 뿐입니다.

‘하나님 어째서요, 하나님 왜요.’

지난 주에 수업을 받던 중 한 전도사님이 문자를 받고 황급히 일어나더군요.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문자였습니다.

또 한 집사님에게서 삼십대 초반의 교우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누가 이런 일들이 우리 생애에 갑작스레 끼어들지 생각하며 살겠습니까?

저 역시 길을 가는 꼬부라진 할머니를 볼 때마다 저 분들은 저렇게 오래 사시는 데, 왜 우리 어머니는 암에 걸려서 돌아가셨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순간에 일어난 사고나 고통뿐이 아닙니다.

점점 삶이 궁핍해지고,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관계가 악화되는 것 같을 때 인생이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과연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며 자신감도 없어집니다.

지난 설날 차 안에서 발견된 일가족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빚에 시달리던 가장이 아이들 셋과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흉기로 살해하고 자기도 목숨을 끊은 사건입니다.

이 남자는 유서와 같은 메시지를 SNS에 올렸다고 합니다.

‘인생..답이 없다.’

우리에게도 좀처럼 답이 없는 문제들이 하나씩은 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런 문제들을 안고 여기 앉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답이 없는 다윗의 처지와 심경을 기록한 시를 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일까요?

먼저는 다윗이 당하는 고난을 보며 이런 삶의 고난을 잘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즉시 답을 주시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가 생에서 만나는 고난은 복합적이고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다윗에게도 곤경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이건 분명히 외면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에는 눈물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 앞날이 무풍지대 온실 속 같이 평탄하기만 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 분은 아마 없으실 겁니다.

한 바탕 소동이 지나고 나면 잠시 숨을 돌리자 곧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풍랑이 몰려오는 게 현실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윗도 살 소망마저 다 끊어진 것 같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만난 곤경은 사울왕의 개인적인 질투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세우고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에 대한 마귀의 분명한 항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도 복잡한 환경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삶 자체가 의문부호 투성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래도 노력하며 살아가는 저도 얼토당토 않게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도무지 감을 못 잡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문제에 답을 하나님은 단번에 풀어놓을 수가 없지만 한가지 분명히 분명한 것은 모든 문제를 관여하고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의 답을 역사 속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사 속에서 하나님이 해 오신 일을 기억하고, 또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랬다고 하지 않습니까?

3절에 이렇게 말씀하죠.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과거 조상들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며 이 고난의 답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내셨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 분명히 지금도 하나님이 주를 의뢰하는 자를 건지실 거라는 것이죠.

다윗이 답이 안 나오는 현실 속에서 그랬듯이 우리도 이유 없이 당하는 삶의 크고 작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여정에서 위기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인도하시고 극적인 구원을 이뤄주신 내 인생 역사 속의 하나님을 돌이켜 보고 지금의 고난에 대해서도 선한 결과를 믿는 것입니다.

환경이 요동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하나님,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랑과 설교들을 떠올리며 굳게 그 신앙을 고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일하셨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의뢰하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다윗왕조가 세워지기 까지 오랜 고난이 필요했다는 것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인생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일사천리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 어찌 한 순간에 세워지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아름답게 세워질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의 단편들을 보면 죽음을 피해 황무지로 도망 다니던 날에 어찌 다윗왕조의 화려하고 성대한 날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삶 전체를 보면 왕 위에 올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치하고 부귀와 영광을 누린 날에 비해 고난의 시기는 분명히 짧은 세월이었습니다.

또 분명한 것은 다윗이 이런 고난을 통해 강인한 왕으로 세워졌고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강대국으로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고난 중에 하나님은 나에게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우리 개인사의 힘든 시기도 이와같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중에도 분명히 구원이 이루어지고 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세워질 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일은 고난 중에 일어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사가 잘 풀리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때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분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그럴 때는 누구든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윗의 고난을 통해 왕으로서의 자질이 만들어지고 견고한 왕조를 세우신 하나님은 하루 하루 힘든 삶에서 끝까지 주님을 의뢰하는 우리를 통해 가정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인생을 견고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다음 6절부터 다윗은 현재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다윗의 고난의 때, 이런 조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때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했습니다.

그때 다윗을 알아본 그의 신하들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했다고 사무엘서는 기록합니다.

왕이 될 다윗이 미친놈 취급을 받고 내쫒겨 겨우 목숨을 건졌던 것입니다.

이런 멸시를 당해도 대항할 힘이 없을 때 얼마나 자괴감이 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존귀한 자녀이고 상속자들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고, 애매한 오해도 받고, 잘 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초라하고 구차하게 보일 때 내가 창피하고 한심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벌레 취급을 당하던 그 일을 왕좌에 오른 다음에도 부끄러워했겠습니까?

영광스런 내일이 있으면 과거는 고통스럽고 힘들수록 더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오늘 고통당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했던 일을 후일에 추억할 때, 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하시고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윗은 자기의 고난을 쏟아놓습니다.

나를 보는 자가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우리의 고난 중에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숙덕거림입니다.

‘저렇게 일이 안되는 걸 보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게 분명해, ’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지지리도 박복한거야?’

뒤에서 이런 말로 수근거릴 때,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집니까?

다윗이야 말로 그렇게 하나님을 의뢰해 전쟁에 승리하고 골리앗을 이겼던 하나님의 용사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기름부음 받고 잘 나갈 줄 알았더니 이스라엘 변방으로 쫒겨 다니고 있을 때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게 주변에 다 알려졌는데.

승진도 잘 안되고, 취직도 잘 안되고, 집안 문제들이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을 때 주변 사람들은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절망 속에 이렇게 호소했던 다윗의 결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역대상14장17절에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

벌레같이 여겼던 다윗을 모든 민족이 두려워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듭니다.

다윗의 시가 점점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의 경험으로 보기에는 정황이 딱 맞아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절망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향해 시를 쏟아내기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막힌 운명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미래에 일어날 한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원한 메시야의 나라를 이루시게 될 비밀을 성령의 감동으로 본 것입니다.

다윗 왕국이 다윗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듯이 그의 씨로 오실 메시야 왕국도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시편 안에 무수히 많은 메시야의 계시를 담아 놓았습니다.

오늘 시편22편도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메시야의 고난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 시를 기록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해석하라고 주신 것이지만 그 내면에 감춰두신 비밀은 이 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적인 사실 위주로 기록되었다면 성령의 감동 된 다윗의 시가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영혼을 해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서 다시 오늘 본문을 읽으면 모든 게 더 선명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실은 1절부터 다윗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고난을 읊고 있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던 그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5장 34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려지시는 그 심경을 성령께서 지금 해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는 아픔을 당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봄꽃이 흩날리는 날, 실연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걸어보셨습니까?

피땀으로 키운 자식들이 비수 같은 말로 우리를 찌르는 걸 당해 보셨습니까?

사랑을 나누던 상대에게 버려지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 아픔을 우리도 살면서 당할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신뢰를 받으시고 완벽하게 연합되었던 주님이하나님께로 부터 버려졌을 때 그 절망감이 어땠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잔을 놓고 눈물과 피땀으로 기도하신 것은 단지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서만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이를 갈고 저주를 쏟아 붓는 것을 온 몸으로 당해야 하는 그 두려움이 더 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이 달리신 그 때, 성령님도, 성부하나님도 주님을 버리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 품에서 독생하신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을 속죄양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된 그 견딜 수 없는 절망감과 공포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경건한 신자들이 가장 두려운 게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과의 연합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신자라면 가장 큰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들에겐 바로 이 절망감과 두려움이 현실에서도 항상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들의 절망과 두려움을 십자가에서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삼위일체 되신 성부하나님과 성령님께로 부터 분리되는 있을 수 없는 그 기이한 경험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아버지에게서 끊어져 항상 허허로운 광야를 헤매는 것 같은 죄인들의 깊은 절망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계속되는 시상은 여지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통하고 고통스런 현장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보여줍니다.

14절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습니다.

15절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건 분명히 다윗의 경험이 아닙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17절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요한복음19장23절에서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쫓았던 요한은 그날 십자가 아래서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 시편이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단번에 속죄하실 것이 지난 주 스가랴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듯이, 오늘 시편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속죄를 이루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의 결과를 27절에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라

우리의 주님은 역사적 근거도 없이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하신게 아닙니다.

최근 신천0 취재 영상이 큰 논란이 되고 있죠.

이만0 같은 자가 당치도 않은 근거를 대며 하나님 행세를 합니다.

오직 구약의 삼천년 역사를 통해 진실한 선지자들로 부터 예언되고 이렇듯 정확하게 계시되었던 대로 이루신 예수님만 세상의 구세주이십니다.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고, 처녀 몸에서 나야 했고, 제자에 의해 은 삼십개에 팔려야 했고, 수족이 찔려 죽어야 했고, 그 옷이 제비뽑기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450여개나 됩니다.

이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류 역사에 많은 선인들도 있고 의인들도 있고 지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2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와 어떻게 상관이 있는지는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며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길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이미 그 은혜를 깨달은 분들은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더 감사하며 그 분의 뜻을 기쁘게 순종하며 따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5년3월22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