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생명전도축제 예배를 함께 드리시는 귀한 분들을 사랑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발길을 인도하셔서 이 자리에 오시게 된 줄로 믿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주신 모든 분들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성경 시편121편에 기록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여호와는 나의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시편23편과 함께 기독교 신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편입니다.
도와 줄 손길이 없을 때 눈을 들어 도우시는 하나님을 보고 무수한 도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몸을 뒤척이며 고민하는 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안에서 내일을 낙관하며 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에서 노래하는 좋으신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구절에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우리 인생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기록한 사람도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하게 필요로 했었다는 이야기죠.
살다보면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그런데 내가 노력한다고 필요한 게 다 얻어지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반드시 생깁니다.
흥사단 윤리연구센터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고교생의 절반이 10억이 생기면 감옥에 가도 좋다는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돈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철이 너무 없는 건지, 너무 빨리 철이 든 건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세대의 현실은 얼마나 또 심각합니가?
OECD가 발표한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5%라고 합니다.
OECD 국가 중 노인최빈국입니다.
매일 11명의 노인이 경제적 어려움과 고독감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면 그 분들이 그런 모진 결심을 했겠습니까?
숨을 거둘 때 까지 점점 더 도움이 필요해 지는 게 인생입니다.
정말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좀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데 하는 애절한 생각이 들 때가 우리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드라마를 보면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던 부모들이 하나같이 왜 그렇게 부자가 돼서 나타나는 지 참 부럽죠.
그러나 사실 부모자식, 형제간에도 도움을 바라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릴 때는 무조건 사달라고 떼쓰던 아이들도 철이 들면 부모에게 손 벌리는 걸 계면쩍어 합니다.
그러니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꺼내는 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사람이 기댈 언덕이 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공감하며 마음이 씁쓸해 지는 것이죠.
그러나 모 재벌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는데 자식 문제와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건 자기 힘으로만 인생을 꾸려나갈 수는 없습니다.
작던 크던 끝없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인생입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시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이 절실했던 인생의 경험을 돌아보며 호쾌하게 외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시하게 사람의 도움 따윈 기대하지 않는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어쩌다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나면 마음이 편치가 않죠.
왠지 비굴해진 느낌도 들고 내 처지가 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도움이래봤자 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생색낼 정도의 도움을 줄 뿐입니다.
그러니 뭐하러 사람에게 구차한 소리를 하고 헛된 기대를 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걸어온 인생을 돌아보면 진짜 도움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내 힘만으로 된 것도 아니고 스스로 귀인이 나타나 내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닙니다.
가장 필요할 때 가장 절묘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셔서 나를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나면 사람에게 도움 받았을 때와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닫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칩니다.
문제가 해결 된 것 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도우신다는 그 사실이 더 감격스러운 것이죠.
오늘 시편을 기록한 시인의 마음이 그런 벅찬 감격에 겨워 확신에 찬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록자는 도대체 어떤 도우심을 받은 걸까요?
본 시편의 부제를 보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의 전체적인 그림은 성전을 향해 예배하러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자신의 험난한 순례의 길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에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당시 순례자들의 여행은 요즘 여행과는 다릅니다.
이 시편이 씌어졌을 시대는 약 2500년전 쯤 될 것입니다.
여행엔 목숨을 위협하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당도한 수십만명의 순례객들이 성전산을 올라가며 웅장하게 부르는 찬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순례길의 어떤 위험에서 나를 지켜주셨는지를 제각기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죠.
실제 이 시에 꼭 맞는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 중에 있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시편이 바로 그 때 기록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의와 악을 저지르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당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 때 먼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사람들이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70년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사할린 같은 곳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포로 귀환은 세 차례로 나눠 이뤄졌습니다.
1차 귀환 때는 5만명의 사람들이 대거 귀국을 합니다.
2차 귀환 때는 에스라라는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1754명이 귀환합니다.
이 시편이 바로 그 당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차 귀환자들의 특별한 사건 때문입니다.
성경 에스라서에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왕은 총애하던 에스라의 귀국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허락합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왕에게 구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지켜 줄 경비병을 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무려 15000킬로가 되는 험악한 여행길에 제일 필요한 게 무장한 경비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에스라와 제사장들이 신변보호 요청을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러 가는 데 하나님이 지켜주셔야지 어떻게 군사들에게 신변을 보호해달라냐는 것이죠.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엄청난 양의 금과 은과 값비싼 물건들을 싣고 우리나라 남북 거리를 두 번 이상 왔다 갈 거리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소문을 이미 듣고 노리는 도적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위험한 여정을 위해 에스라와 제사장들이 구한 것은 왕의 경비대가 아니라 금식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자녀를 거느리고 무장군인도 없이 먼 여정을 떠났던 것이죠.
도중에 당연히 매복한 도적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셨다고 에스라는 기록합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4달을 걸어 드디어 저 멀리 성전의 산이 보일 때 그들의 감격과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긴 여행의 피로에 지친 1754명 전원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낙하심을 받고 모두가 평탄한 길로 인도를 받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시인의 추상적인 감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인도를 받은 성도들의 실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생생합니까?
거친 땅에 텐트를 치고 위험한 야영을 할 때 그들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평안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태우는 사막의 태양과 밤의 음습함이 결코 그들을 해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늘이 되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음에 종교적인 위안이나 얻으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실제 이렇게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인간의 도움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광야와 산악을 넘은 사람들의 간증시인 것입니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자녀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건너느라 애가 타지는 않습니까?
오늘 시편에 성전을 향하는 순례자들을 돌보셨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지금도 동일하게 도와주고 또 지켜주고 계십니다.
사람을 보며 이 사람이 좀 도와주려나 저 사람이 좀 도와주려나 헛된 기대를 뭐하러 하겠습니까?
욥기에서는 사람이 의지하는 것들이 거미줄 같다고 말씀합니다.
시편147편3절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인간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힘없는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신의 인생도 감당하기 버거운 게 모든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고 책임져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만으로 충분합니다.
배경도 없고, 실력도 없고, 건강도 없고, 지혜가 없어도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하나님이 기르시고 책임지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어둠 속에 앉아 흘리던 눈물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두려워 떨던 일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분명히 절망인 줄 알았는 데 하나님을 붙잡은 순간 소망으로 바뀐 것입니다.국립재활원 연구원인 김종0 박사가 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던 총명한 청년이 어느 날 친구 자취방에 들렸다가 허술한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 아래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전도유망하던 청년이 한 순간 혼자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 마음의 절망감이 어땠겠습니까?
이불 위에 누워있는 몸 안에 영원히 자신이 갇혀 버린 것입니다.
그때 누님이 성경책을 건네주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길고도 지리한 시간에 성경을 펼쳐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는 순간 쿵 하는 충격이 왔습니다.
영원히 자유를 뺏겼는 데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음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고 예수님이 나를 자유롭게 하신다는게 섬광처럼 깨달아 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로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그렇게 창피했던 장애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냥 자신의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이상하게 괜찮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나니 열등감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장애의 몸으로 미국의 피츠버그대학에서 공부하고 교수로 임용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살기는 한국보다야 미국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김박사님은 한국 장애인 복지를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인을 위해 많은 기구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해 밥을 먹여주는 식사보조 로봇을 비롯한 수십개의 기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를 도왔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은 단지 돈 몇 푼 쥐어주며, 밥 한번 사주고, 한 번 선심 써서 도와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도움을 주시고 가장 복된 길로 끝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평생 도움만 받아야 할 줄 알았던 김박사님의 인생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인생이 된 놀라운 기적, 하나님이 베푸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면 그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일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했기에 사랑하는 분들을 이 자리로 초대한 것입니다.
3절부터는 끝절까지 시편 기록자가 길을 떠나는 이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길, 순례의 길을 떠나는 아들을 축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길이 어떤 길이든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가냐에 따라 여행도 인생도 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돌봐야만 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됩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면 어떤 짐을 지고가는 길이든 주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주시고 우리의 짐을 져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떠나는 이들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축복하는 것이죠.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리라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영원까지 지키시리라 이렇게 계속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와 도우심을 보았기에 자신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악해도 고의로 나그네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 주겠습니까?
그 길이 불확실한 길이고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인생을 떠나는 자녀들에게 이 길을 권하겠습니까?
인생의 길은 거칠 뿐 아니라 미끄럽습니다.
거칠고 미끄러운 인생 노정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붙잡아 주십니다.
세상을 걷는 사람들의 걸음은 미끄러지고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잘 나가는 것 같다가도 꼭 미끄러지지 않습니까?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천0 선수가 또 폭행과 거짓말 문제로 선수생활에 치명적인 위기를 당한 것을 봅니다.
박대통령을 수행했던 윤창0 씨의 성추행 사건도 얼마나 어이가 없이 미끄러진 일입니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자기도 이해가 안될 것 같습니다.
어? 그 집 괜찮았었는 데 어쩌다 그렇게 됐어? 이런 소리 많이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실수로도 실족하지만 원치 않는 사건과 환경에 얽혀 넘어지기도 합니다.
난치의 질병으로, 가정문제로, 사업의 실패와 열리지 않는 장래로 인해 언제든 사람들은 실족하고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발걸음을 지키면 위기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1977년 우리나라 등반대원이 세계에서 8번째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 때 김영0 장로란 분이 등반 대장이었습니다.
산소가 희박한 험준한 막바지 지형을 올라갈 때 산소통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한 산소통의 조절장치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미리 점검하지 않은 큰 실수를 한 것이죠.
등반을 포기해야 할 심각한 갈등 속에서 힘겹게 몇 걸음을 진행하는 데 갑자기 오늘의 시편 121편 3절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이 말씀을 묵상하며 발걸음을 주시하며 몇 걸음 걷는 데 무언가 발에 탁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발 밑을 파보니 나사마크가 찍힌 미사용 산소통이 12개가 묻혀있었습니다.
대원들이 그 산소통을 이용해 무사히 정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누가 이렇게 절묘하게 우리를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그 시각 장로님의 아내 역시 시편 121편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에서 우리가 실족하거나 영 실패하지 않게 붙들어 주십니다.
시편37장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오늘 본문에서 지키신다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낮의 해로부터, 밤의 달로부터, 모든 환난으로부터, 우리의 출입하는 모든 일도 다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변치 않고 언제나 한결 같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변덕이 많아 잘 해주다가도 어느날 보면 냉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결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변덕이 없고 변치 않으십니다.
사무엘상15장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영원토록 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이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안연하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에 보면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죠.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의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로 지으신 천지만물을 주인이 없는 양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강에 누운 큰 악어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편50편10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셔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에게 그것을 맡기신 것입니다.
인간이 과학을 자랑하며 우주 생성의 비밀을 밝히려든다구요?
인간의 과학이라 해봤자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별들을 다 세어 볼 능력도 없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우주의 별들의 숫자도 다 세지 못했습니다.
그 셀 수 없이 많은 별들 중 유일하게 한 별, 지구에만 생명이 살 환경을 만드신 것을 보십시오.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라면 왜 오직 한 별에만 생명체가 살 수 있겠습니까?가장 가까운 화성조차 평균 기온이 영하 55도입니다.
대기가 이산화탄소 뿐이라 사람이 살 조건이 전혀 안됩니다.
지난 여름 화성에 이주할 주민을 뽑는다는 네덜란드 벤처회사의 모집 공고에 세계 각국에서 10만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고 하죠.
화성에 기지를 만들고 2023년부터 해마다 2명씩 이주를 시켜서 총 24명을 거주시킨다는 계획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지구로 귀환시킬 프로젝트는 준비가 되지 않아서 지원자들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고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야 합니다.
화성은 사람이 살라고 만드신 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지구에만 인간생존을 위한 모든 물질과 법칙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인간의 몸은 또 얼마나 신비합니까?
심장은 하루에 10만번을 뛰고 혈액은 2억6천킬로를 매일 우리 몸에서 돌아다닙니다.
하루에 2만3천번을 호흡하고 7백만개의 뇌세포가 매일 움직입니다.
이런 기관들이 움직이는 데 우당탕 거리는 소리 한번이 납니까?
모든 것이 정밀하게 규칙에 따라 쉴새없이 움직이며 우리 생명이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창조의 지혜이고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은 선인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골고루 내려주시는 자비한 창조주이십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섬세하게 피조물을 돌보시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세계를 경영하고 계십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4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라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의 역사적인 인물 중 가장 진실하고 믿을만한 성인으로 인정받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창조주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께 갈 수도 없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도 못합니다.
죄의 본성대로 온갖 악을 자행하며 삽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이 죄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철저히 무능력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스스로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을 완벽하게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영적인 진리는 아무리 잘 설명해도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깨달아 지는 것이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 때 까지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어느 순간 진리가 환히 깨달아지고 인생 전체가 보이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깨닫게 되고 감격과 은혜 속에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인생의 순례자들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시간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양은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모든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죠.
마지막 이 땅에서 숨이 끊어질 때 우리는 창조주 앞으로 가게 됩니다.
창조주 앞에 내 평생의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피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이 죄를 다 속죄하신 그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천국에서 누립니다.
또 이 땅 험악한 순례의 길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영원까지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실한 보호자가 되주시려고 우리를 다 부르신 줄 믿습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교회생활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배워보길 결심하시길 간절히 권합니다.
반드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죽음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받고 풍성한 이 땅의 축복도 누리게 되실 줄 믿으시길 주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10.20 주일설교 남수연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께 감사하라(시편107편1절-30절) (0) | 2014.09.11 |
---|---|
시편127편-가정의 달 설교 (0) | 2014.05.05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23편) (0) | 2013.03.15 |
송구영신예배 (시편65편1절-13절) (0) | 2013.01.02 |
추수감사절 설교 (시편103편1절-5절) (0) | 201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