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23편)

남수연 2013. 3. 15. 16:58

오늘 시편23편 말씀을 읽으니 지난 한주간의 피곤도 불안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무겁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이 지은 아름다운 시입니다.

시는 아무리 딱딱해진 마음이라도 작은 틈새를 파고 들어와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역사적인 내용으로도 말씀하시지만 우리 감성에 더 직접 다가오시기 위해 시편으로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시편의 기록자인 다윗은 볼품없는 양치기 목동에서 이스라엘2대 왕에 오른 격변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적의 목을 겨누어야 했던 장수였지만 풍성한 성령의 영감을 받아 70여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강인한 군인이고 왕이었지만 때로 촛밀 같이 녹아지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나약함을 기록했기에 시편은 많은 고난당한 자의 위로가 됩니다.

전쟁과 사망의 위협과 가정의 아픔과 부끄러웠던 사랑까지 인생의 고통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깊은 공감을 주는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 롱펠로우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를 바로 이 시편23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본문을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다윗의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 시라고 생각됩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하는 것은 우리 귀에 은혜롭고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결코 평범한 고백이 아닙니다.

다윗 이전에 하나님을 목자라고 생각하고 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목자란 말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렸을 것 같습니까?

가축들과 어울려 더러운 옷을 입고 목초지에서 생활하는 천한 신분의 목자를 떠올렸겠지요.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입니다.

높은 하늘에서 장엄하게 인간을 다스리는 전능자의 이미지하고 맞지가 않죠.

그 당시 누구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권능을 알고 있던 다윗이 이 하나님을 자신을 돌보는 목자로 비유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저 하늘 멀리 계신 전능자가 아니라 내 삶에 뛰어내려 오셔서 나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 생애를 통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목자가 양들을 위해 어떻게 헌신하는지를 체험한 목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 만큼 사물을 이해합니다.

부모가 되고 나서야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교사였기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교육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를 가르치기에 열심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실을 느낍니다.

선생으로서 학생 앞에 설 때 그들이 잘되길 바라고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교사적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아무리 불량교사라도 학생들에게 해롭고 거짓된 걸 가르쳐주진 않습니다.

내가 맡은 아이들의 불행에 결코 무심할 수 없는 것이 또 교사의 마음이거든요.

오래 전 무속인 계모와 같이 사는 한 여학생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각자 도시락을 싸오던 때인데 그 아이가 한번도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는 거예요.

알고보니 계모가 아이를 옥탑방에 가두다시피하고 밥을 해주질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한동안 그 아이 도시락을 싸다주었습니다.

가정형편이 그러니 아무리 해도 아이를 바르게 잡아주기 힘들더군요.

가끔 무단결석을 하는 날이면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으로 그 도시락을 먹은 날도 있었습니다.

심재숙집사님과 제가 바로 옆 반 담임을 할 때 급식하고 나면 음식이 좀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각자 엄마가 안 계신 학생에게 챙겨주려고 신경을 쓰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읽었던 글에 6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 선생님의 도시락을 먹으며 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는 선생이나 학생이나 다 점심먹기가 빠듯하던 시절이 있었죠.

이 분 역시 도시락 싸올 형편이 않되 점심이면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교실에 들어왔는데 앞에서 점심을 드시던 선생님이 도시락의 반을 남겨서 배가 불러 못 먹겠다고 그 학생에게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도시락이라고 해봤자 보리밥에 김치와 멸치복음이었지만 어찌나 맛있게 남은 밥을 먹었는지 그 선생님 밑에서 일년을 그 밥을 먹으며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생각하니 선생님이 배가 불러 남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못난 교사라도 자기 학생을 바르게 지도하고 아이들이 잘 되길 바라는 그 마음을 알기에 불쌍한 백성들의 스승이 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에 절대 거짓이 없다는 믿음이 제게는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한 뚜렷한 신뢰감이 제게 누구보다 강한 것을 느낍니다.

목동의 경험이 있던 다윗은 하나님이 마치 양들을 돌보고 헌신하는 목자와 같이 자기를 돌보신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다윗의 시편을 통해 목자되신 우리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그의 눈을 통해 느끼고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목자는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야겠죠.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양떼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항상 양을 이끌고 먹이가 될 만한 초원을 찾아다녀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이 양치는 곳으로 가서 안부를 알아오라고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요셉이 세겜으로 형들을 찾아갔더니 그들이 이미 도단으로 떠났죠.

헤브론에 있는 집에서부터 형들의 움직인 거리가 무려 백 킬로 정도가 됩니다.

양을 먹일만한 풀이 집 근처에 언제나 풍족하게 자라는 게 아닙니다.

어디든 신선하고 좋은 풀이 있는 곳으로 양떼를 이끌고 다니며 먹여야 하는 목자들의 고충을 알 수 있죠.

양들은 푸른 초장을 만나면 배불리 풀을 뜯고 편히 눕지만 목자는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양을 지키려고 편히 쉴 수도 없습니다.

다윗이 목자였을 때를 사무엘상17장34절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실제로 맹수가 습격할 때 양들을 지키려고 싸우다 목숨을 잃은 목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 것은 어떤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고도 이렇게 자신을 끝까지 구해주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엄위하신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분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다윗의 독특한 영성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가 깊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시편22편을 통해서 고난당하는 메시야를 예언하고 많은 시편들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예언 시들을 기록한 것을 보면 필시 그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를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TV에서 보니 양치기 목자들이 양의 발굽이 자라면 일일이 깎아주고 마치 아이를 돌보듯이 보살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이 자발적으로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더군요.

만일 하나님이 저 하늘에서 관망만 하고 계신 것 같다면 양의 발톱을 직접 깍아주고 새끼를 받아주고 야영지에서 돌로 울타리를 쳐 양들을 보호하며 양떼들 틈에 앉아있는 목자 같은 하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서도 필요할 때 놓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내 삶에 뛰어 들어와 무엇이든 해주실 그럴 목자가 아니시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안심합니까?

그저 막연한 하나님이 내가 죽으면 혹시 있을 천국에서 어쩌면 나를 알아봐주시지 않을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34장8절에서 얼마나 간곡하게 말합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은 맛볼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다윗이 맛본 목자되신 하나님을 우리도 더 느끼고 더 깨닫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더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확신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과연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는 주님의 양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편에 흐르는 기분좋은 만족함과 평화로움과 부어주시는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라는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시편을 읽을 때 마다 너무나 아름답고 목가적인 서정이 넘치는 은혜로운 시라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그림이 아름답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런 은혜가 내 삶에서 일어나려면 우리에게도 다윗이 가졌던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확신이 있어야죠.

우리에게도 목자가 필요합니다.

때로 너무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냥 믿을만한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내가 결정해야 하고 내 판단이 과연 맞는 건지 저 너머 성공이 있을지 실패가 있을지 모를 때 얼마나 삶이 두렵습니까?

어려울 때 마다 비빌만한 언덕이라도 좀 있으면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을 이룰 것 같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다 빈털터리가 되어간다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남은 시간도 줄어가고 건강도 약화되고 평생 직장에 나가 열심히 벌었지만 이래저래 자식들 키우고 남은 노후를 생각하면 손에 쥐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도망다니던 다윗이나 우리나 별로 다른 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빈털터리 외로운 인생에 하나님만을 목자로 섬기며 따랐기에 노년에 오늘 시편과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의 목자로 모시고 평생 주를 따랐던 다윗은 그의 노년에 오히려 내 잔이 넘친다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릅니다.

재산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 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한 성도들이 그들의 노년에 나의 잔이 넘치는 복을 받았다는 고백을 많이 듣습니다.

심지어 평생을 선교지에서 보내고 빈 몸으로 귀국한 노사역자들 조차 그에게 부족함없는 복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삶에 목자가 되어주셨기 때문이죠.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만날 때 우리의 빈 손에 든 빈 잔도 넘친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어떻게 주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까?

다윗이 죽고 4백여년이 지난 뒤 에스겔이란 선지자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며 악한 마귀에게 채여 가는 인간을 끌어모아 안전하게 구원하실 목자를 보내준다는 말씀이죠?

그는 내 종 다윗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다윗은 죽은 사람이고 이 말씀은 다윗의 자손 중에 나셔서 우리를 목자처럼 이끌어주실 예수님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 후 6백년 뒤 오신 예수님께서 뭐하고 자신을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10장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6장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모실 때 안전하게 보호받는 주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를 믿고 그 문을 통해 들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십니다.

베드로전서2장25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가 양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목자가 알아서 우리를 인도하고 챙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양이 길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 인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 길을 계획하고 성급하게 이루려고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하신 길이 가장 복된 길이고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보장도 없이 하나님이 왜 스스로 우리의 목자를 자청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안성맞춤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해 오늘 주님 안에서 살면 어느새 견고한 터에 우리가 서있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셨다면 안심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심을 확신한다면, 목자 되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나의 궁핍한 날에 맞춘 듯이 필요한 것을 날라다 주시는 하나님,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치료의 손으로 만져주시는 하나님, 내일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데 왠지 안심하고 잠들게 하시는 하나님을.

아침에 눈뜨기가 두려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도 목자되신 하나님의 보살핌과 인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도, 그에게 감동을 주시고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맛보며 이런 복된 인생을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상대의 인격을 믿는데는 많은 시간과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를 믿을 만하다 생각하면 속마음도 열고 집도 드나들고 그런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교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그의 생애의 많은 광야의 밤을 하나님과 보낼 때 쏟아질 듯 빛나는 많은 별들을 주의 손가락이 지으셨다고 깨닫지 않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 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고 인자가 무엇인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렇게 예배를 통해 오로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깨닫고 느끼게 해주시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던 일들이 응답되어진 경험들이 쌓이고 성경을 통해 배워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쌓여갑니다.

만나는 시간이 적으면 서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전능하신 창조주의 광대하심이 느껴지고 또 나를 향한 섬세하신 사랑과 인도가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이죠.

이런 선하신 하나님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 걸 확신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살 때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는 인생, 너무 부럽지 않습니까?

매일 여전히 무언가 부족함이 있는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다윗이 노래하는 이 부족함 없는 인생이 그림의 떡인 것처럼 느껴지죠.

그렇다면 다윗은 과연 부족함이 없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그의 일생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평생에 기록한 70여편의 시 가운데는 고난가운데 부르짖는 기도 시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노년에 그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 역경과 고난 속에서 함께 하셨고 죽을 길을 영광의 길로 바꿔주신 아름다운 결말을 주셨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선교지에서 모든 것을 다 헌신하고 빈 몸으로 돌아온 노 선교사들 조차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 삶에 부족함 이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부족함 없는 현실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돈이 채워지면 사랑이 부족하고 자식이 속썩이고 명예와 권세가 채워지면 건강이 부족하고 이게 있으면 저게 부족한 게 인생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신기하게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모든 일에 자족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온 길을 돌아다보니 그런대로 만족한 인생이라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천국은 나중 일이라도 확실히 이 세상에서도 지금보다 못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 힘든 이 순간도 결국 나중에 돌아보면 내게 가장 알맞고 좋은 길로 인도하셨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지금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기에 평안도 있고 족한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으로 평안 가운데 주님을 따르면 반드시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은 3절에서 우리에게 또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육신의 필요만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아닙니다.

매일 힘든 삶을 살다보면 어느새 힘은 다 소진되고 점점 무기력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 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이 평범한 날들 속에서도 영혼이 점점 시들어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의기소침해지면 모든 게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당면한 문제가 점점 커지고 내 모자람에 대해 점점 골몰하며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이런 침체 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또 이러구있구나 생각이 들면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너무 내 문제에 몰두하고 나 자신을 너무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나 자신에 너무 집착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점점 더 실망하고 절망하게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린 그런 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들지 않고 봄비 맞은 새 순처럼 싱그럽게 살아가려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매일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듯이 매일 매순간 내 영혼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길 기도할 때 영혼이 소생되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영혼이 소생될 때 기쁨이 회복되고 부정적이던 마음도 될 것 같은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 가운데도 성령께서 우리를 소생시켜 주십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실질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평안할 때 우리 믿음을 견고히 다져놓아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는 살아내기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로 경제는 제 기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쌓아온 도덕과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혼돈 속에서 정체성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더 이상은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성도들에게도 심각한 위기가 닥치게 될 것을 성경은 경고합니다.

깨어 믿음을 굳게 하고 날마다 천국을 소망하고 점점 구원이 구체적인 사실로 느껴지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4절에 기록했듯이 성도들에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가 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 삶에도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있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한 푸른 초장에서 며칠 편히 눕고 먹으며 그림 같은 평안을 누리지만 풀 사이로 메마른 흙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영적인 진리가 여기서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목초지에도 풀이 사라지고 메마른 땅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아직 풀이 조금 남았다고 안주하고 있다간 큰일납니다.

인간의 죄성도 아직 버틸만 할 때까지 적당히 세속의 맛을 보며 눌러 앉고 싶어하죠.

풀이 바닥을 드러낸 다음 이동했다간 다음 목초지에 도달하기 전에 양들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양은 마냥 초장에 누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목자는 아직 더 누워있고 싶은 양떼를 몰고 더 풍부한 목초지를 찾아 가야 하는 것이죠.

때로 그 곳엔 위험한 협곡을 지나고 세찬 시내도 건너야 하는 험난한 길입니다.

인간은 우리 안에서 살며 안전한 미래를 보장받고 싶고 내일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보여야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이 안전하게 보장된 삶이라면 우리 죄성은 영적으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않고 주저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양떼는 우리에 가두고 키우는 돼지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우리에 갇혀 음식찌꺼기나 얻어먹고 살을 찌우는 도살 될 돼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험한 언덕길도 오르내리고 사망의 골짜기도 두려움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도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뒤를 돌아보면 그렇게 우리를 인도해 오신 길이 보입니다.

사망과 같은 침통한 현실에서 우리를 도우실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동행해 주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잡은 손을 어느 순간에도 놓치 않으심을 믿는 것이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오늘 시편23편은 행복을 꿈꾸며 결혼하는 부부를 위해서 축가로 많이 불리워집니다.

그러나 인생을 막을 내리고 천국을 향해 떠난 사람의 장례식장에서도 많이 불리워집니다.

어느 개척교회 목사님의 스물무살 된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던 날, 젊은 청년들이 장례식장에서 바로 이 시편23편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친구와 반드시 동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다른 빈소에 있던 사람들도 다 모여와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딸이 10달 투병생활을 하며 아동부를 맡았는 데 아이들이 삼백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도 군부대에 가서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건강을 걱정하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일 죽을지 모르는 데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이제야 작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았는데 작은 시간 하나도 무의미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딸은 짧은 시간을 아름답게 보내고 그가 사랑하던 목자되신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두려움 없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의 순간에도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잡은 손을 단 한번도 놓치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그 순간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 혼자라는 생각이 더 이상 그들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만들었던 것이죠.

다윗 역시 죽음과 같이 두려운 환경 속에 홀로 서있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자이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반드시 나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협적이고 겁나는 협곡을 지나면 하나님은 반드시 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묵묵히 계시는 동안이 우리에게 고통스런 시간입니다.

게다가 음침한 협곡에는 원수가 숨어 도사리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결국 가장 정확한 시간, 원수가 우리 목전에 있는 순간에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존귀한 자가 되도록 기름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높여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힘든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차려주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때가 오면 어려운 환경도 문제도 어느 순간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고 기쁨과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옵니다.

매일의 평범한 삶 속에서도 이런 주님의 인도가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느긋하고 담대한 믿음의 관점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에 다윗은 노래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은 평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가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던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따르리니’라는 히브리 원어에는 바짝 쫓아오다. 추격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어둡고 음침한 길을 갈 때 앞이 무섭습니까?

뒤가 무섭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뒤에서 든든한 백이 되어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시편엔 반전이 있어서 더 아름답습니다.

매일이 푸른 초장에 누워 뒹굴기만 하는 삶엔 영적인 성장도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깊은 체험도 없고 오히려 감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손을 꼭 잡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고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목자되신 주님과 동행하면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또 다른 반전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목자되신 하나님을 더욱 체험적으로 알기에 함께 힘쓰길 원합니다.

모든 은혜의 방편들을 더욱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할 때 지금보다 더 깊은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격을 더 신뢰할 믿음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