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감사의 이유-시편118편

남수연 2010. 11. 23. 18:01


오늘은 우리교회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올해에 모든 일에 은혜와 복을 주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드리는 것이지만 오늘 더욱 진심어린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유래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의 소산을 수확 한 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1621년 청교도들에 의해 지켜진 첫 추수 감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국 구교의 박해를 피해 102명의 개신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신대륙으로 떠났습니다.

항해와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겨우 살아남은 27명의 청교도들이 첫 수확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예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의 첫 추수감사절 예배가 얼마나 감격과 눈물의 예배였을까 생각하며 우리도 첫 추수감사 예배를 그런 마음으로 드리길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지만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보다 교회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다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미션여고를 다닐 때 학교에서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모든 학생이 다 한복을 입고 배추를 한 통씩 가져와 교실에 쌓아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갈래머리 여고생들이 한복 치마를 펄럭이며 하루 종일 감사 축제를 드렸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때였지만 알 수 없는 기쁨이 넘쳤던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요즘은 구역별로 쌀을 한 포대씩 가져와 하나님께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교회 앞에 있는 수퍼마켓에 전화로 주문을 하고 배달원이 쌀을 실어다가 강단에 올려 놓습니다.

모두 다 바쁜 세상에 살다보니 이해는 되지만 정성과 마음이 담기지 않은 감사 예물이 왠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들 합니다.

돈 키호테로 잘 알려진 소설가 세르반테스는

풍족함은 좋은 일이지만 감사할 줄 모르게 하고

부족함은 나쁜 것이지만 감사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참 역설적이죠?

모든 것이 부족함 없었던 에덴동산에 단 하나 부족했던 것은 감사였습니다.

허용 된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감사하지 못하고 금지 된 단 한 개의 나무 로 불평했던 마음이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모든 물자가 풍성하고 생활이 편리해졌기에 현대인에게 감사가 더 어려워지는지 모릅니다.

부족한 환경을 경험해 보지 않은 젊은 세대에서 더욱 그런 모습을 보게 되니 걱정입니다.

미국의 심층 뉴스 진행자로 유명한 데보라 노빌이 지은 0.3초의 기적 ‘감사의 힘’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에는 위대한 성공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하는 사소한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데는 0.3초 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 말은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에미상을 두 번 수상한 노빌은 어려서부터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알았던 것이 오늘의 자기를 있게 한 에너지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만난 감사의 주인공들이 이루어낸 기적적인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감사는 훈련이고 연습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감사의 힘을 알기에 세계 모든 부모들은 공통적으로 엄마, 아빠 다음에 감사합니다를 가르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인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길 원하십니다.

감사가 자녀들의 삶을 복되게 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야 말로 감사했던 사람들의 승리 행전입니다.

일반적인 감사도 기적을 일으키는 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얼마나 더 큰 기적과 축복이 일어나겠습니까?

오늘 본문인 시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의 생활이 더욱 회복되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절규와 탄식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역동적인 성경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 신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150편 가운데 다윗 왕이 73편을 기록하였습니다.

목동의 신분에서 처절한 고난을 통과해 왕이 되기까지 그를 인도하시고 높여주신 하나님께 바친 그의 헌정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왕자였던 솔로몬은 그에게 주어진 세기적인 지혜에도 불구하고 단 두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고난 중에 있어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도움심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시편을 기록한 저자들의 공통적 특징은 고난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과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탄으로 시작 된 시편일지라도 마지막은 항상 찬양과 감사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만큼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치는 성경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본문 역시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성전 문으로 들어가는 감사의 행렬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의 감사가 얼마나 열광적이고 뜨거운지 느껴지십니까?

19절에 시편 기자가 환희에 넘쳐 당당하게 외치는 큰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왠지 우리의 가슴이 다 벅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뜨거운 감사에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시편 기자가 이렇게 폭발적인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감사의 이유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발견하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풍성한 감사가 넘치는 축복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시편기자가 이런 뜨거운 감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째는 그가 받은 구원의 감격 때문입니다.

우리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감사의 제목은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정말 아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은 정말 큰 값을 치르셨습니다.

아들을 주신 희생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댓가로 그 엄청난 고통이라을 치루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 만이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심판 받을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이 되었음을 깨달은 기자는 감격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끌고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을 다 아시죠?

각종 죄를 지은 사람들이 용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집안 형편에 따라 비둘기나 양이나 염소 같은 것을 끌고 제사장 앞으로 가서 자신의 죄를 제물들에게 이양시키고 성전을 빠져 나옵니다.

물론 그 제물은 죄인 대신 죽어서 제단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쳐집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계속 죄를 속해야만 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정결의식입니다.

그러니 성전에 제물을 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다 죄인들이죠.

그런데 오늘 시편 기자는 의의 문을 열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칩니다.

20절에도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의인이라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사도 드리기 전에 당당하게 의인의 자격으로 성전의 들어간 다는 것은 불법이고 이단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영감을 받아 시편 기자는 장차 오실 구속자를 믿음으로 자신이 의롭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짐승 제사로는 우리를 영원히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이 짐승제사의 불완전함을 알았습니다.

짐승을 끌고 성전에 들어가 죄를 고백하고 돌아서 성전을 나올 때 그는 탄식하지 않았겠습니까?

내일 틀림없이 또 죄를 지을 텐 데, 한 달 후면 또 짐승을 한 마리 끌고 와야할 텐 데, 탄식하던 시편기자는 비로서 하나님이 완전한 제물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경에는 선지자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탄생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것을 깨달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오늘 또 하나의 새로운 예언시를 기록합니다.

22절과 23절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예언시입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 할 메시야를 배척하는 먼 훗날 사람들의 행위가 그의 눈에 기이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 탄생 700여년 전에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도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53장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시편의 기자도 놀라워하며 그들의 행동이 기이하다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거란 것이죠.

우리가 바로 그런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돌이켜 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러 다가온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은근히 멸시했는지요.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멸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시편말씀을 인용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유대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21장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빼앗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7절에도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인간의 모든 종교를 통해 아버지께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구원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도덕성을 갈고 닦아 스스로 구원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행위는 결국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견주려는 또 하나의 수준 높은 범죄일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한 마음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젠 죄로 인해 치러야 할 형벌은 없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조차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의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고 환희에 가득찬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제단은 죽임당한 제물을 가져와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곳입니다.

제단에는 죽은 동물만이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물을 제단까지 끌고 왔다는 기록은 성경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기자는 하나님 앞으로 갈 때 우리의 죄를 위해 더 이상 제물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단 위에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신 예수님이 불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피가 묻은 제단 뿔에 단지 살아있는 제물을 묶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보혈에 묶이기만 하면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에게 이 구원의 벅찬 감격이 있었듯이 오늘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이 구원의 감사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 감사의 이유를 시편 기자는 21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기 때문이라 고백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본문의 앞 부분인 18절 까지 큰 고통과 환란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뭇 나라가 에워싸고 밀쳐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짖었더니 응답하셨기에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4장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 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시편 34장 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 서 나를 건지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제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신실하게 응답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기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올 한 해도 어느 덧 다 가고 이제 한 달이 조금 더 남았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내 부르짖음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절박한 문제 앞에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혼자 지고 가야 할 짐이 너무 무거워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안한 앞 날이 너무 두려워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오늘 이 곳 까지 오게 하신 것은 때마다 시마다 함께 하시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지나온 일 년을 돌아보십시오.

모든 것을 선하고 아름답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와 다른 응답이었기에 더욱 감사한 것도 있습니다.

아직 응답되지 않은 일들도 언젠가는 뒤돌아 보며 감사할 날이 올 것이기에 더욱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저절로 해결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아직 우리는 응답 받지 못한 큰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이 더 크게 감사하는 것이 놀라운 신비입니다.

고난 당한 많은 사람들의 간증에서 우리는 그들이 그 전보다 더욱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미즈노 겐죠라는 일본의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로 인한 뇌성소아마비가 되어서 얼굴을 제외하고 몸 전체가 꼼짝도 못하는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마야오라는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목사님의 헌신적인 사랑에 차츰 마음 문을 연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미즈노 겐죠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보는 순간 뜨겁게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인생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겨우 눈 하나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이 몸으로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의 마음 속에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시를 쓰거라”

말을 못하는 그는 벽면에 시력 검사판처럼 일본 히라가나를 붙여 놓고 어머니가 차례대로 글자를 짚어갈 때 원하는 글짜가 나오면 눈을 깜빡여 표시했습니다.

어머니는 온 종일 그의 곁에 앉아 겨우 한 줄의 시를 받아 적었습니다.

이렇게 쓴 그의 시를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선정하여 시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시집이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시편인 데 그의 시를 한편 읽어보겠습니다.

제목은 “택할 가치가 없는 나를”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택할 가치가 없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찾을 가치가 없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는 큰 목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외쳐보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감사한다면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탈무드에 보면 "혓바닥에게 '감사합니다'는 말을 버릇들이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간절함이 응답 받지 못했다하더라도 감사하시길 축복합니다.

나쁜 상황에 원망하고 불평해도 결코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상황에서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에먼스라는 심리학자가 실험자들을 모아 세 그룹으로 나누어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A그룹은 기분 나쁜 말과 행동에 집중하게 했고 B그룹은 감사하고 고마움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C그룹은 일상적인 말과 행동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일주일을 시행해 심리를 분석한 결과 B그룹의 사람들에게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타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실험기간 동안 긍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고 두통이나 감기를 앓은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활동지수도 높아져 운동에 시간을 투자하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느꼈으며 일주일 전의 삶에 비해 많은 것이 개선되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이 실험기간을 1년으로 늘려 실시한 결과 실험군에게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고 이야기 합니다.

삶에 대해 더 행복하게 느끼게 되었다.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유머감각이 생겼다

숙면을 취하게 되었고 건강해졌다

스트레스에 강해졌다

가족관계가 돈독해졌다

신앙심이 깊어졌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디 감사할 일만 있겠습니까?

어쩌면 낙담하고 눈물짓고 원망할 일이 더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모든 조건에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 낮아지고 힘든 삶을 살아도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당당하게 의의 문을 통과할 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비교할 수 없는 영화로운 삶이 영원토록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고난과 역경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감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저는 요즘 기도를 하며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실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느낍니다.

저의 조그만 헌신에도 주님은 고맙다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수학여행을 가 보잘 것 없는 선물 하나를 사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고마워하는 것 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매일 고마워하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29절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오늘 이 마음으로 드리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받으시고 감사할 것을 더 넘치도록 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